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사전에 따르면 청춘은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를 뜻한다. 푸를 청靑에, 봄 춘春 자를 쓴다. 그렇다면 청춘이란 보기만 해도 시원한 푸른색에다가 모든 생명이 약동하는 봄의 이미지까지 띠고 있는 것이렸다. 그런데 청춘이라고 일컬어지는 시절의 나는 눅눅한 방에서 게임을 하거나, 강의실에서 휘달려 하며 족보를 외우거나, 남자들끼리 뻔한 술 마시며 밤을 새우곤 했다. 취직하고 나니 시시한 청춘은 지나가고 고달픈 청춘이 찾아왔다. 격주로 한 주는 8시간, 한 주는 24시간 오프를 받았다. 일주일 내내 일하고 오프 땐 밀린 잠을 잤다. 오프 때 뭐라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영화관에 갔지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그냥 잠들어버린 적도 있었다. 아프니까 청춘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청춘이 늘 푸른 봄은 아니었다. 내 20대의 전반기는 시시했고 후반기는 졸렸는데, 청춘이라는 단어는 왠지 부당하다. 차라리 청춘은 너무나 파래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고 말하는 게 적당할 것이다. 


『청춘의 문장들』은 소설가 김연수가 인상 깊게 읽었던 시구(詩句)와 그에 얽힌 젊은 시절의 이야기들을 엮은 것이다. 지금이야 소설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20대의 그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불안해하는 흔한 청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책을 읽어보면 생각하지도 않던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고 숱하게 시를 쓰고 버리다가, 등단하지도 못한 채 회사에 취직하고, 가끔 자괴감에 빠진 그의 역사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때의 김연수를 지금의 김연수로 만들었을까? 20대 초반의 김연수는 부모님의 빵집에서 카운터를 보다가 한 스님을 만났다. 그 스님은 빵 두 개를 시켜놓고 보리차를 달라고 말했고, 빵을 다 먹고 나선 김연수를 보더니 10년 뒤엔 모두가 아는 유명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열심히 하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 후 6년이 지났을 때 문인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그는 '너는 이제 끝났어'라는 무례한 말을 듣는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스님이 말한 10년을 떠올리고, 아직 4년이 남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시를 계속 썼다 (그는 시로 등단했다). 지금은 우리가 아는 김연수가 됐다. 


사실 김연수가 유명한 소설가가 된 것이 스님의 말 때문은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계속 써 나갔으니 시인이 됐을 테다. 무언가를 사랑하고 열망할 때 청춘은 그 자체로 추동력을 갖고, 그는 시를 사랑했으니까. 스님의 말은 그 사랑에 대한 확신이 희미해져갈 때 조금 유예기간을 준 것뿐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다. 보통의 청춘에선 더 해도 된다는 스님의 말 같은 게 없고 젊은이들은 늘 불분명한 미래에 시달린다. 스스로를 믿고 삶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란 어렵다. 


문장과 에피소드는 아름답지만, 뒤돌아봤을 때 청춘이 아름답다는 내용엔 '그건 당신이 성공한 소설가이기 때문이지'라는 삐딱한 심사가 들었다. 이건 무언가를 사랑할 틈도 없이, 떠밀려서 지금 있는 곳까지 흘러 들어온 나의 질투심이다. 어쨌거나 청춘은 돌아오지 않고, 그래서 아름답다는 말만은 확실하다. 그러니까 그 시절의 나는 남자들과 뻔한 술자리만 갖지 말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여자 후배나 병동 간호사에게 추근거려야 했던 것이다. 오늘 일 끝나고 뭐 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청춘의 문장인가. 용기가 없어서 보내지 못한 구애의 문장들이 머리에 맴돈다. 직장 동료가 그 시절의 화려한 무용담을 뽐낼 때, 지금의 나는 도저히 할 말이 없다. 고작 오프 때 차 안에서 잠들었다는 이야기 정도라니. 돌아보니 정말 보잘 것 없는 청춘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남자 다섯 명이랑 술 마셨구나. 제길. 


* 김애란의 「도도한 생활」 중 '청춘은 너무 환해서 창백해져 있었다'라는 문장을 변형

그해 11월, 나는 남몰래 정이 들어 자꾸만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유목민이었다. 염력을 익히는 게 아니라, 일단 대학에 가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고 싶은 사춘기였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몰라 선생님을 만나고 돌아와서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머리통을 때렸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G.K. 체스터튼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것이 사라질 때를 상상할 수 있다면. 열여덟 살의 11월에 나는 처음으로 그렇게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단순히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 사실 때문에 사랑했던 것이며, 사랑하지 못할까봐 안달이 난 것이었다. 19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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