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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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아주 예쁜 김연수 책이다. 대중에 영합하려 하는(ㅋ) 말랑말랑한 제목과 감각적인 단색으로 몸통을 치장했다. 마무리는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감성적인 띠지. 한마디로 소녀풍. 그러나 오해 마시라. 베컴이 잘 생겼다고 축구 못했던 게 아니었듯, 표지 좀 예쁘다고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집을 관통하는 주제는 역시나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세계다 (아 지겹도다!). 김연수는 어느 팟캐스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 그게 소설가의 과제다. 나를 이해하는 문제는 이해하는 척하면 어느 정도 쏟을 수 있다. 나 자신에 대해선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러나 남을 이해하는 문제는 속일 수가 없다. 소설을 쓰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궁지의 상태다. 네가 타인의 삶에 대해서 쓸 수 있겠느냐. 솔직한 작가라고 한다면 못 쓴다는 걸 알게 된다. 쓸 수가 없다. 진짜 쓸 수가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걸 인정한 상태에서 글쓰기가 이루어진다. (...) 쓰다 보면 약간 놀라운 게 있다.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아주 미약한 지점이 보이게 된다. 그게 나오면서부터 내가 이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 하지만, 어느 정도는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재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라고 생각한다). 간신히, 겨우, 그렇게 소설을 쓰게 된다."

이런 인터뷰를 듣고 나면 그가 한결같이 이해의 문제에 천착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는 끈질기게 묻는다. 다만 그의 이전 소설들이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영역을 인정하며 일종의 체념과 허무를 보여줬다면, 이 소설집은 타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작가는 서로 소통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인물들을 소설 속에 배치했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의 미국인 화자는 오래전 한국 남자 케이케이와 연애했다. 케이케이는 젊어서 죽는다. 오랜 시간이 지나 한국에 찾아온 화자는 오래전 케이케이가 살았던 '밤메'에 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한국에 '밤메'라는 곳은 없다. 한국인 통역사는 '밤메'와 비슷한 이름 '방미'로 그녀를 인도한다. 그러나 그곳엔 케이케이에게 들었던 풍경이 남아있지 않다. 이곳은 결코 '밤메'가 아니므로 화자는 분통을 터트린다.

「모두에게 복된 새해」에선 한국인 '나'와 아내의 인도 친구 '싱'이 나온다.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 아내의 인도인 남자 (사람) 친구가 집에 찾아온다. 오래된 피아노를 조율하며 서로 어색한 언어로 이야기한다. 화자는 서로 언어가 잘 통하지 않으므로 아내와 싱은 '서로의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달로 간 코미디언」에선 정상인과 시각 장애인이 대비된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각-언어와 시각-의 차이는 이들의 소통을 방해할 것인데, 과연 이들은 서로의 세계에 닿을 수 있을까?

결코 통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들이 서로에게 닿는 순간이 있다. 바로 감정을 공유하는 순간이다. 기쁜 감정을 공유하면서 월드컵 베이비도 막 낳고 그러면 좋겠지만 ㅎㅎ, 그러기엔 살아있을 동안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리는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반면, 안타깝게도, 슬픔과 고통의 순간은 넘친다. 우리는 결코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없다. 단지 내 고통과 타인의 고통을 견주고, 같이 슬퍼할 수 있을 뿐이다. 이 한계는 명확하지만 고통의 공유는 타인을 간신히나마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로 돌아오자. 방미에 가서 실망한 화자는 돌아오는 길에 한국인 통역사 '해피'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는 차 안에서 담담히 자신이 아이를 잃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가 군살처럼 느껴지던 시절 아이의 해독되지 않던 울음을. 그 아이를 잃고 나서 텅 비어버린 것처럼 느껴지던 지구를. 그제야 아이의 울음은 내 고통이 아니라 아이의 고통이란 걸 깨달았음을 이야기한다. 해피는 한국어 낙(樂)을 어떻게 통역해야 할지 몰라 nak이라고 그대로 말한다. 자신은 nak을 잃어버렸다고. 그걸 듣는 화자는 그건 케이케이의 젖은 몸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뜻이야 아무래도 좋다. 이 순간 두 사람의 말은 '단순한 음성적 신호(28)'가 아닌 내부에서 생성된 의미가 되어 서로를 연결한다.

「모두에게 복된 새해」의 남편은 인도인 '싱'에게 아내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묻는다. 언젠가 한국어 교실에서 아내는 싱에게 이렇게 말했다. Always I wanted a baby. I want to be the elephant like this. I am alone. I feel lonely. 한국어가 서툰 싱은 lonely를 통역하지 못 한다. 언어가 다른 두 사람이 외로움으로 연결될 때, 남편은 외로움을 방치했다. 남편이 실패한 순간, 싱은 성공한다. 남편은 그제야 아내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제 남편은 돌아올 아내를 기다린다.

「달로 간 코미디언」의 안 PD는 코미디언 아버지의 천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천함의 진짜 이유를 시각 장애인 이관장을 만나고서야 알게 된다. 아버지는 자신의 천함으로 남들을 웃겨야 할 때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안PD는 아버지가 실종됐던 사막으로 간다. 안 PD는 사막에서 소리를 녹음한다. 그걸 듣는 화자는 비로소 시력 없는 사람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

때로는 고통이 화해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대부분이 끝까지 타인을 오해하고 마는 세계지만 같은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은 간신히, 겨우,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와 타인의 이야기가 겹쳐질 때, 아무리 공유하는 공간이 작을지라도 그곳은 세계가 된다. 그땐 나무둥치도 당당히 세계의 끝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소설 속 '세계의 끝'에 묻혀 있던 편지처럼, 내 세계의 끝엔 늘 타인의 세계가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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