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세계를 스칠 때 - 정바비 산문집
정바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책 읽는 사람들 SNS에 이 책이 드문 드문 보여서 읽을까 말까 고민했다. 발췌된 글은 좋은데 정바비가 누군지 몰라서. 알아보니 가을 방학의 작사, 작곡을 담당하는 남자였다. 나 가을방학 되게 좋아하는데! 그런데 지금까지 내게 가을방학은 곧 계피나 마찬가지였다. 정바비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으니 노래만 많이 들었지 이거 순 엉터리 팬이었다. 


가을방학 듣는 사람들에게 베스트 넘버를 꼽아보라 하면 보통은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나 <언젠가 너로 인해>를 꼽을 것이다. 나는 그것들도 좋아하지만 <이브나>를 더 좋아한다. 정확히는 그 노래의 가사에 담긴 정서를 좋아한다. 


이브나의 후렴구는 이렇다. "식은 커피 같은 나의 고백에 몇 차례 버스를 보낸 뒤 넌 내게 이렇게 말했지. 난 절대 결단코 수백 날이 지나도 너밖에 모르는 바보는 안 될 거야. 행복함에 눈물범벅일지라도 너 하나로 숨 막힐 바보는 안 될거야." 이렇게 읊조리는 사람이 쓴 글이라면 읽어야겠지. 그래서 읽었다.


읽어보니, 책에선 노래 가사에서 줄곧 보이던 서정성보다는 지적인 유머가 두드러졌다. 정바비는 '무작위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거기에 괜찮은 농담이 있는 책'이 좋은 여행 에세이집이라고 말하는데 그의 책이야말로 괜찮은 농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을 불쾌하게 하지 않는 지적인 유머. 이런 건 언제나 환영이다. 


재밌게 읽고 나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든다. 그는 남녀 관계에 대한 솔직하고 신랄한 글을 참 잘 쓰는데, 정작 자신은 이성 때문에 외로움을 느껴본 적 없다고 말한다. 그가 느낀 유일한 외로움이란 키우던 고양이를 건강상의 이유로 원래 주인에게 돌려보냈을 때 한나절 내내 울며 느낀 감정이었다고. 이 사람이 어떻게 가을방학 가사를 쓴 건지 잠시 혼란에 빠졌다. 곰곰이 생각하고 내린 추측은 이렇다. 사랑의 애틋함을 말하는 노래들보단 사랑의 시작을 약간 경계하는 듯한 <이브나>가 그의 사랑 방식에 조금 더 가까운 것 아니었을까. 많은 사랑을 해봤기에 깊게 사랑하면 깊게 아프다는 걸 알아버린 것 아닌지. 많았던 연애 경험이 그로 하여금 깊은 연애를 경계하게 만든 것 아닌지. 그래서 너와 함께 있어도 '너의 세계를 스칠 때'라고 말하는 것 아닌지. 


그 뜻이 아닌 것 같다구요? 아님 말구요. <이브나>를 좋아하는 사람의 자의적 해석이었다. 제목은 왠지 서글프지만 읽는 내내 웃음이 앞니 사이로 비져나오는 재미진 책이었다.



결국 인간의 생에 있어 최악의 사건은 뭘까 생각해보면 역시 크고 작은 시간낭비가 아닐까.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긴 시간을 들였던 사람이 실은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라는 현실은 우리를 미치도록 우울하게 만든다. 그건 정말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재판 선고다. 따라서 우리는 자주 불복한다. 항소하고 또 상고한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지점에 이르러서까지. `너와 나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는 감상적인 명목을 들어 유예하고 만다. 물론 묵묵히 결과에 승복한다고 해도 당신은 절대 그이를 처음 만났던 날로 돌아갈 수 없다. 29세에 만나 1년을 보내다 헤어지고서 여전히 29세일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1년 된 연인과 헤어진 당신은 빼도 박도 못하는 30세인 것이다. 그것도 가장 소중한 20대를 마지막 한 해를 오해에 기반한 기대와 실망으로 보내버린 30세 말이다. 1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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