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말과 글은 다르다. 말에는 동반되는 눈빛, 호흡, 억양, 떨림이 존재하지만 글은 글 자체로 존재한다. 그래서 글은 감정을 담기 위해 길어지고 깊어진다. 안부를 묻는 편지든, 연애편지든, 반성문이든, 싸우고 나서 화해를 청하는 글이든. 거기에 진심이 담겨 있다면 글은 말과 비교되지 않게 깊어진다. 


말은 휘발되지만 글은 남는다. 글은 반복해서 읽을 수 있다. 사소한 일상을 글로 남기는 이유는 언제든 다시 돌아보기 위함이다. 사랑을 말이 아닌 글로 남기는 이유는 언제고 사랑하는 사람이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일 테다. 


글 없는 독자도, 독자 없는 글도 없다. 비단 사랑의 글이 아니라도, 비밀 일기를 제외한 모든 글은 남에게 읽힌다는 전제하에 쓰인다. 글은 쓰인 순간 타인에게 가닿기 원하는 무언가가 된다. 도달한 글은 독자를 변화시키길 원한다. 글은 그렇게 스스로 생명력을 얻는다. 


그러나 대개 원하는 사람에게만 닿는 말과 달리 글은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에게 닿을 수도 있다. 불행하게도 끝내 바라던 사람에게 닿지 못할 때도 있다. 주인을 잃고 방황할 때도 있다. 『사랑의 역사』는 주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썼지만 잃어버린 글, <사랑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폴란드의 소년 레오와 소녀 알마는 사랑에 빠진다. 레오는 알마를 위해 글을 쓴다. 글의 제목은 <사랑의 역사>이고 등장하는 모든 여성의 이름은 알마다. 그러나 글도 사랑도 완성되기 전에 알마는 나치를 피해 이민 간다. 레오는 가족을 모두 잃고 뒤늦게 미국에 가지만 알마는 다른 사람과 결혼한 상태다. 알마가 낳은 첫아이 아이작은 레오의 아이다. 그들은 레오에게 갈 수 없다. 미국으로 떠나온 레오에겐 <사랑의 역사>의 원고도 없다. 모든 걸 잃어버린 레오는 이제 글을 쓰지 않는다.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 남자'처럼 살아간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 알마와 알마의 새 남편까지 죽고, 레오는 자신의 죽음만을 바라보고 있다. 죽기 전 자신과 알마의 진실을 담은 <모든 것을 뜻하는 단어들>을 집필하고, 아들의 주소로 부친다. 아들에게 대답이 없고, 며칠 후 아들의 부고가 난다. 그러던 어느 날 갈색 봉투 우편물이 레오의 집에 도착한다. 발신인은 없고 수신인에 레오의 이름이 적혀있다. 봉투를 뜯어보니 그것은 오래전 자신의 글 <사랑의 역사>다. 레오는 혼란에 빠진다. 과연 아들은 죽기 전 <모든 것을 뜻하는 단어들>을 읽었을까?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사랑의 역사>는 어떻게, 그리고 왜 자신에게 돌아왔을까. 


소설 속 사람들은 레오가 쓴 <사랑의 역사>를 통해 서로 얽히고 연결된다. 레오와 알마, 샬럿과 다비드, 즈비와 로사, 샬럿과 제이콥, 그리고 또 다른 알마와 레오.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야기를 쓰고, 읽어주고, 번역하고, 전달한다. 모든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이 알마였던 것처럼, 모든 사랑은 제각각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한마음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를 위해 쓰인 사랑의 언어는 잊혀선 안 된다. 마땅히 읽히고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수행한 사랑의 준칙 아래, 레오가 쓴 <사랑의 역사>는 우연처럼 여러 사람을 거쳐 레오 자신에게 돌아온다. <사랑의 역사>를 매개로 레오는 또 다른 알마를 만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했던 개인들의 역사가 맞물릴 때 다시 커다란 하나의 '사랑의 역사'가 탄생한다. 어떤 인생이 이야기로 쓰일 때의 간절함과, 그 이야기가 진실에 가닿으려 하는 몸짓은 이토록 아름답다. 


이야기와 사랑은 마땅히 제 자리를 찾아 돌아와야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법이다. 이런 귀환 서사는 논리가 없는 당위 명제다. 그러나 사랑의 구성 요소에 논리는 포함되지 않는다. 논리로 설명될 수도 없다. 소설에서 눈에 띄게 많이 나오는 접속사는 '그런데도'다. 소설에서 사람들은 '그런데도' 사랑을 했고, 레오는 '그런데도' 다시 쓰기 시작했고, 죽어버린 그의 글은 '그런데도' 생명력을 되찾아 사람들을 연결했다. 우리도 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런데도' 누군가를 사랑할 것이란걸. 

가을이 되자 엄마는 대학에 입학하려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주머니에는 가장 낮은 땅에서 온 모래로 가득했다. 엄마는 몸무게가 49킬로그램이었다. 패딩턴 역에서 옥스퍼드까지 기차로 가는 길에 두 눈이 거의 먼 사진사를 만났다고 가끔 이야기하곤 했다. 그 사진사는 짙은 선글라스를 꼈고, 10년 전에 남극으로 여행을 갔다가 망막을 다쳤다고 했다. 그의 양복은 완벽하게 다림질이 되어 있고 무릎에는 카메라를 올려놓고 있었다. 그는 이제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되었는데, 그렇게 나쁜 것만도 아니라고 했다. 그는 엄마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가 카메라 렌즈를 들어 올리고 그 안을 들여다보자 엄마는 뭐가 보이느냐고 물었다. "늘 같은 거죠." 그가 말했다. "뭔데요?" "흐릿한 거요." "그러면 왜 사진을 찍는 거죠?" 엄마가 물었다. "내 눈이 치료될 경우를 대비해서요. 그러면 내가 뭘 보고 있었는지 알 테니까요." 5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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