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너머로 달리는 말
김훈 지음 / 파람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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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롭고 정제된 문장이 마치 하얗고 파르스름하게 날 선 식도의 그것과 같이 문단과 문단을 넘나들며 글이 가진 그 원초적 기운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몇 안되는 작가로 꼽히는 '김훈'이 산문집 <연필로 쓰기> 이후 근 1년만에 장편소설로 독자들을 만났다. 김훈 작가의 글을 사랑하는 평범한 독자로서 항상 느끼는 것은 그의 글을 보고 있노라면 글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동경이 나의 심연에 정동으로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유난히도 빨리 찾아온 초여름의 어느날, 김훈의 신간 출판 소식을 접하고 내가 느낀 솔직한 감정이다. <칼의 노래>를 통해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접했기에 2017년 소설로서는 <남한산성> 이후 뜸했던 그의 행보가 무척이나 궁금했던차였다.

그렇기에 코로나로 한참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이 때 그의 출간 소식은 내게 가뭄 속 단비와 같은 작은 희열을 가져왔다. 책을 받고 속지에 인쇄된 저자의 친밀 서명을 응시하며 책내음을 들이킨다. 인쇄지에서 전해져오는 야릇하고 진한 잉크 냄새를 변태스럽게 흠향함과 동시에 그가 그려갈 이야기의 향연을 기대하며 첫 페이지를 연다. 책장을 넘길때 전혀 예상치 못한 내러티브가 펼쳐진다는 사실은 독자에게 있어서 행운이자 한편으로는 상당한 모험일 수도 있는 경험이다. 문장은 여전히 살아서 치근덕대듯 꿈틀대고 있지만 지금까지 느껴왔던 김훈이 보인 집필의 전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초입부에서 강하게 느끼는 순간 기대감과 함께 출처를 알 수 없는 염려가 엄습했다.

어차피 픽션인 소설은 팩트보다는 글쓴이의 생각의 곡선을 따라가는 것이 더 매력적인 장르라는것을 알고 있지만 김훈이 이러한 작품을 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역사와 공상이 만나서 탄생된 이름하여 '역사판타지' 소설이라고 표현한들 그의 작품에 대한 경의를 잃는 것은 아니리라. 역사적 배경을 깔았지만 실제로 없는 무형의 역사를 지면으로 소환해내어 육필로 꾹꾹 눌러 쓴 저자의 문학적 저력이 엿보인다. 더군다나 책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닌 짐승이다. 옛부터 영특하다 여겨진 영물로서의 말(馬)을 전면에 내세워 말의 눈으로 본 인간 사회의 대소사를 지극히 절제되고 담담한 필치로 그려냈다.

저자는 책의 전반 지면을 할애하여 소설의 배경을 멍석깐다.'나하' 라는 강을 사이에 두고 태고의 국가로서 북쪽 초나라와 남쪽 단나라가 존재했다.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초나라와 땅에 정착하여 흙을 먹고 살아가는 단나라는 분명 인류 문명의 이질성을 드러낸다. 각기 다른 문명이 서로의 다름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은 피가 당기는 것과 같이 참을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본성에 기인한다. 저자는 두 문명의 충돌을 이야기의 근간으로 삼지만 거기에는 전중반부터 시작되는 인류 문명 속에 깊이 관여했지만 그 태동은 알 수 없는 말(馬)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말(馬)이라는 짐승이 언제부터 인간에게 자신의 잔등을 허락했고, 인간은 어떻게 말(馬)을 문명의 중심축으로 끌어들였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말(馬)이 인간사의 굴곡진 일상 속에 깊이 관여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말의 역사를 찢고 침범한 것인지 그 진위를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저자가 본서를 통해서 드러내는 것은 인간과 말의 서사를 통한 문명과 야만의 민낯을 독자들에게 가감없이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초나라의 신월마 토하와 단나라의 비혈마 야백은 순수 혈통의 우수한 명마들이며 이야기의 중심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이질성을 극복하지 못한 인간들은 죽고 죽이는 전쟁을 통해 야만과 광기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리고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인간의 폭력을 여과없이 목격한 말의 관점을 빌려 물고 물리는 아수라장 같은 인간사 각축장의 혼돈을 다소 거칠게 그러나 때로는 한없이 세밀하면서도 절제된 저자만의 명문으로 토해낸다. 문명은 길들여진 것이며 야만은 날 것 그대로의 비릿함을 전한다. 인간에게 자신의 등을 허락하지 않았을 때의 말은 야만 자체였으며 자신의 등에 인간을 태우고 달리기 시작하면서 말은 문명의 일원이 되었다. 그렇기에 저자는 문명과 야만의 충돌을 모두 다 지켜본 말(馬)을 이야기의 전면에 내세운다.

신화적 상상력으로 써내려간 저자의 신작은 분명 또 하나의 한국 문학계에 일획을 긋는 소설로서 기억될 것이다. 본서는 <칼의 노래>와 같은 벼락같고 날카로우면서도 무섭게 절제된 명문보다는 시원의 그 알지 못하는 언어의 태고적 신비스러움이 더 많이 묻어나오는 저작이다. 저자는 간격과 공간마다 어휘와 문장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서 읽는 이로 하여금 쉽사리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여리면서도 동시에 매몰찬 긴장감을 책의 말미까지 끈질기게 끌고간다. 이렇듯 작은 틈새 하나도 허투루 날려버리지 않는 진득한 저력이 바로 작가 김훈만이 가진 그 무엇이다.

스러져가는 공상 속 두 나라의 저물어가는 운명의 끝단을 지켜보는 신월마 토하와 비혈마 야백의 관점을 통해 저자가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진의는 무엇일까? 흩어진 역사의 파편들을 마치 깨진 토판 조각을 줏어모아 엇댄듯한 이야기의 편린들은 지금의 문명에 대한 조소이며 경계이다. 저자 김훈은 책의 '뒤에' 서 3호선 전동차를 타고 창밖의 일상을 바라보며 느낀 자신의 회상을 이렇게 적는다. "세상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서식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 책은 그 답답함의 소산이다. 세상을 지우면 빈자리가 드러날 테지만, 지우개로 뭉갤 수 없어서 나는 갈팡질팡하였다."

부정하고 싶고 지워버리고 싶은 세상에 대한 절절한 바람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공상의 나라 속으로 그를 침잠케했고, 한바탕 세차게 불어닥치는 비바람과 같이 흥망성쇠 문명의 한장면을 말(馬)이라는 영물의 관점으로 마음껏 비웃었다. 약육강식의 야만적 습성이 여전히 정상으로 여겨지는 이 비정상적인 세상에 대한 부정을 저자는 그나마 소설 속 두 문명의 대립과 스러짐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하여 훌륭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그 숨겨진 진의를 고발하는 주된 장치로서 말(馬)은 그에게 더할나위없이 중요한 도구다. 부인하고 부정하고 싶은 우리네 일상에 대한 애증이 들끓는다면 김훈 작가의 역사판타지 한편으로 이번 여름 우리네 삶의 틀어진 추를 의미있게 재정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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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오만과 편견 - 1894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제인 오스틴 지음, 김유미 옮김 / 더스토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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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고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하면서 뼈저리게 느끼는 것 중 하나가 관계의 어려움이다. 각자가 살아온 인생의 배경과 스토리가 다르기에 개개인의 개성과 성향, 성격 또한 천차만별이다. 우리 주변에는 만나면 함께 있고 싶은 따뜻한 성향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얼굴만 봐도 역겨운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불편한 진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미스터리한 팩트를 직면하면서 시작된다. 내가 좋아하는 너무나 따스한 성품을 가진 사람의 이면에 믿기지 않는 차가움과 건조함이 공존한다면 그 사실을 순순히 믿을 수 있겠는가? 반대로 주는 것 없이 밉고 그냥 이유 없이 진저리 나도록 싫은 끔찍한 사람들의 내면 안에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따뜻한 인간미와 숨은 인품의 고결함이 고요한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면 그 또한 쉽사리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내면과 속성에 대해 18세기 말 한 여류작가에 의해 흥미로운 소설로 탄생된 한 권의 위대한 고전 문학 작품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다. 18세기 영국의 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베넷 가문의 가장인 '베넷'과 그의 아내 '베넷 부인' 그리고 다섯 명의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장성한 딸들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그들이 사는 롱본 지역과 가까운 네더필드에 부유하고 잘생긴 상류층 가문의 청년 '빙리'와 그의 친구 '다아시'가 이사를 온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베넷 가문의 큰딸 '제인'과 둘째 딸 '엘리자베스'는 빙리와 다아시를 알게 된다. 상류층의 품위와 품격을 드러내며 누구에게나 따뜻한 성품과 친절함으로 모든 이들에게 칭찬을 받는 빙리는 그야말로 훈남이며 전형적인 신사로서 모든 여성들의 흠모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의 친구 다아시는 빙리보다 훨씬 더 부유하고 높은 계급의 가문이었지만 자신의 가문이 가진 고결함을 뽐내듯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마치 깔보는 듯 무뚝뚝한 표정과 일면식 있는 사람 외에는 낯선 사람들과 대화조차 기피하는 차가운 인상의 인물이다.

이후 따뜻하고 자상하며 지적이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베넷 가문의 첫째 딸 제인과 역시 부드럽고 따뜻한 성품을 가진 빙리는 서로를 향한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는데 그 원인은 다름 아닌 빙리의 친구 다아시의 반대로 인한 것이었다. 자신의 착하디착한 언니가 상류층 부유한 가문의 훈남 빙리와 이루어지는 것을 반대한 다아시에 대해서 가뜩이나 오만스럽고 건방지기 짝이 없다고 생각한 역겨운 귀족 다아시에 대해 둘째 딸 엘리자베스는 분노의 감정을 품게 된다.

여러 가지 얽히고설킨 사건들이 진행되면서 하나씩 밝혀지는 진실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끔 만드는 고전 문학이 가진 매력이 대단하다. 사건이 중반을 지난 종반으로 치달을 때쯤 독자는 제인과 빙리의 결혼을 반대한 다아시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진짜 이유를 알게 되면서 그동안 극중 인물 엘리자베스와 동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다아시에 대한 관점이 극심한 편견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지위를 이용하여 악행을 일삼는 교만하고 염치없는 뻔뻔한 인간인 줄 알았던 다아시. 그러나 그의 진심을 발견하고 내면 안에 흐르는 누구보다도 따뜻한 참된 마음의 소유자가 바로 다아시임을 알게 된 베넷 가문의 둘째 딸 엘리자베스는 오래전부터 자신을 연모하며 사랑을 고백했던 다아시에 대해 편견의 비늘을 벗기 시작하는데...

 

 

 

오만으로 대변되는 다아시와 편견으로 대변되는 엘리자베스의 대립 구도는 책이 가지는 메인 테마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독자라면 다아시와 엘리자베스 두 사람 모두에게서 오만과 편견의 그늘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가진 엄청난 부와 가문의 명예를 업고 차갑기 그지없는 오만스러운 모습으로 일관했던 다아시는 자신의 친구 빙리가 자신들과는 가문의 품격이 다른 중산층 베넷 가문의 천박함 속에 함몰되어 갈 것을 우려함으로써 친구의 결혼을 반대하는 편견을 보였다. 18세기 근대 유럽의 계급주의적 편견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다아시의 차가운 첫인상과 그가 행한 악행(사실은 그렇지 않은)의 소문을 듣고 그를 상류층 사람들의 오만스러움의 전형으로 여기며 극도로 경멸스럽게 대한 엘리자베스의 편견은 자신이 상대보다 더 인간적이고 공정하다는 오만스러운 망상에 기인한다.

책 한 권에 18세기 근대 유럽 계급주의에 의한 신분상의 차별, 남성과 여성의 차별을 비롯한 시대와 문화의 한 단면을 매우 절제된 언어의 방식으로 녹여 낸 본서의 가치는 탁월하다. 고착화되어버린 사회 시스템 안에 내재한 다양한 구조적 갈등은 전부 오만과 편견으로부터 파생된다. 타자에 대해 내가 가진 신분의 높고 낮음, 빈부 여부를 통해 선을 긋는 모든 행위는 오만스러운 것이며 극심한 편견에 의한 병적 태도이다. 혹자는 본서가 연예학 개론의 고전이라고 평하였지만 단순한 남녀 간의 갈등, 화해와 공존을 말하는 핑크빛 소설이라고만 한정 짓기에는 책이 가지는 그 진중한 의미가 아깝다.

오만과 편견은 개별적으로 분리된 성향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자웅동체와 같이 인간 내면 안에 동일하게 상존한다.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거미줄처럼 엃히고설킨 이 복잡다단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18세기 말 쓰인 고전 문학 작품 한 권이 던져주는 인상이 크고 깊다. 매일의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타자들에 대해 우리는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촌음 사이에 수십수백 가지의 편견을 머릿속에 주입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살인적인 오만함을 갖고 타자들을 내 삶의 영역 밖으로 쉴 새 없이 밀쳐내는 데에 전력을 다한다. 책의 마지막 뚜껑을 덮으며 인간 사회 어디에서나 발견하게 되는 오만과 편견의 프레임을 장밋빛 소설 한 권에 담아낸 저자 제인 오스틴의 인간 본성과 시대를 읽는 혜안에 박수를 보낸다. 더불어 책임 있는 독자라면 인간 본성에 코드화된 이 오만과 편견의 네거티브한 습성을 끊어내라고 요구하는 고전적 교훈을 겸손히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저자 제인 오스틴이 미래의 독자인 우리에게 원하는 작은 바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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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안드레아스 J. 쾨스텐버거.저스틴 테일러 지음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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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인생에 있어서 삶의 마지막 일주일이 주어진다면 가장 가치있고 의미있게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고 마무리하기 위해서 애쓸 것이다. 그러나 여기 자신의 마지막 일주일을 자신이 아닌 오로지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내어준 한 위대한 인물의 이야기가 기록된 책이 있다. 그 책은 바로 성경이며 그중에서도 신약성경 첫 네 권의 책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다. 그리고 오늘 리뷰하게 되는 본서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은 바로 이 네 권의 복음서를 통해 드러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자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마지막 일주일을 조명한다. 절대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 속에서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역사적 예수로서 그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단지 그는 역사적으로 한 시대를 살다간 선구자나 성인 정도로 이해되는 것이 요즘 시대의 기독교와 예수를 바라보는 지배적인 관점이기에 어찌보면 본서가 말하는 주제는 불신자들에게는 관심 밖일 수 있다.

그러나 신자들에게조차 1년에 한번 사순절과 고난주간, 부활절을 맞이할 때 되새겨보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주일에 대한 내용은 알듯하면서도 정확한 팩트를 인지하고 있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책은 고난주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수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 당한 후 3일만에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보이시며 승천하시기까지의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을 따라 간략하면서도 요점을 놓치지 않고 설명한다. 특별히 책이 가지는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주일을 조명하는 데 있어서 저자들이 어느 하나의 복음서만을 자신들의 집필을 위한 텍스트로 선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공관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물론이거니와 기술의 관점이 다른 요한복음까지 4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주일의 행적을 보다 더 정확하고 객관적인 차원에서 다루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돋보인다. 또한 신학적인 난해한 내용이 없기에 일반적인 신자들 누구나가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주간의 행적을 손쉽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편집된 점 또한 책이 가지는 장점 중 하나다.

특별히 예루살렘 입성 후 예수께서 유월절을 준비하시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행하시는 목요일과 유대 지도자들에게 체포된 후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 당하는 금요일의 기록은 지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내용의 구성이 광범위하면서도 집약적이다. 저자들은 복음서에서 증거하는 사건의 내용을 본문 그대로 가지고 와서 각 챕터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본문에 대해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해설을 싣는다. 동일한 한 사건에 대해 4복음서의 각기 다른 저자들이 바라본 4개의 관점에 의해 기록된 사건은 서로간 서술상의 차이로 인해 오류가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오류라기보다는 다양한 관점의 저자가 한 사건을 다각도로 관찰하고 기술함으로서 빚어진 서술기법 상의 차이이며 오히려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해주는 효과적인 장치이다.

책의 마지막 챕터인 '뒷이야기'를 통해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의심 많은 제자 도마에게 찾아가셔서 자신을 증명하시는 장면은 이 책의 백미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첫날 일요일에 도마를 제외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후 도마는 자신이 직접 예수님의 못자국난 손과 창으로 찔린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을 드러낸다. 저자들은 이러한 그의 회의주의는 역사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공유되어 왔다고 말한다. 사실 역사적으로 모든 세대는 예수의 부활을 진정으로 믿기보다는 허황된 유대인들의 신화이자 옛날 이야기라고 치부하며 불신하는 시대정신의 지배를 받았다. 그렇기에 어쩌면 인류가 은하계를 정복하는 지금의 최첨단 과학 문명의 시대를 향유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부활과 기독교 복음은 가장 미개하고 천박한 사상 가운데 하나다.

요한복음을 통해 사도 요한은 이미 사람들 안에 이러한 불신과 회의가 도사리고 있음을 보았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은 3년반 동안 스승인 예수의 곁에서 그와 함께 먹고 마셨던 제자 도마에 의해 극대화된다. 그런데 나를 더 놀라게 한 사실은 바로 이 도마의 불신까지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과 섭리이다. 예수의 사명은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서 철저하고 잔인하게 죽임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완벽하게 살해당하고 무덤에 묻힌 후 3일만에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셔야만 하는 것이 예수께서 이 지상에서 마지막 일주일을 사시는 것의 유일한 목적이자 하나님의 계획이었기에 그분의 의심할 수 없는 철저한 죽음은 그분의 부활의 사실성을 입증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선행조건이었다. 그렇기에 도마의 날 선 의심은 저자들이 말하듯 로마의 십자가 처형이 철저하고 치명적이며 따라서 못 박힌 흔적을 가진 사람이 살아있을 수 없다는 예수 죽음의 확실성을 굳게하는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도구였고 장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도마의 의심을 통해서도 증명되듯이 확실하고 철저하게 죽임당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명확하게 한치의 오차와 오류도 없이 죽임 당한지 3일만에 부활하셨다!

저자들은 책의 말미에 독자들에게 묻는다. 그럼 "당신은 그를 누구라하는가?" 신화적 예수, 역사적 예수의 주장이 판을 치는 이 세대 속에서 참된 신자의 믿음의 대상이자 구원의 절대성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성에 대한 물음은 신자라면 누구나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중대한 물음이다. 참된 신자들에게는 모든 날이 부활절이다. 그렇기에 때만되면 요란스럽게 지키려는 사순절, 고난주간, 부활절 안에 갇혀있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매일의 일상과 삶의 지평 속에서 그분의 부활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이땅에서 신자로서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는 진정한 경건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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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심리학 콘서트 - 독자들이 선택한 대중심리학의 텍스트 심리학 콘서트
공공인문학포럼 지음 / 스타북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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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즐겨 찾는 맥도날드나 버거킹과 같은 패스트푸드 매장 인테리어에 우리가 모르는 숨겨진 비밀이 있음을 아는가? 이러한 매장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비용을 계산하기 위해 우리는 무심코 계산대 앞에 선다. 그런데 이 매장 계산대의 높이는 약 72cm인데 이 높이가 사람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기 가장 편한 높이라고 한다. 또한 점원은 손님이 주문을 하면 감사의 인사를 하고, 3초 후에 곧장 다른 메뉴 중 필요한 것이 없냐고 다그치듯이 그러나 친절하게 묻도록 훈련받는다. 그러면 손님은 뭔가 더 주문을 해야할 것 같은 심리적 압박 속에 추가주문을 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위의 일화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한 마케팅 심리 기법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렇듯 물건 하나 팔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인간을 이해하고, 사람의 심리를 잘 이용해야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와같이 사람의 심리에 대해서 깊이 있게는 아니지만 우리의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생활 속 심리학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기술된 책이 오늘 리뷰하게 되는 본서이다. 초판 발행 후 50만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이후 10주년 기념 리커버 에디션으로 출간된 본서는 전문적인 학술 심리학책은 아니고 말그대로 교양 심리학책이다. 우리가 풍문으로 알고 있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칼 융과 같은 유명한 심리학자들의 복잡한 이론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실생활 속에서 만나게 되는 흥미로운 심리학적 주제들이 책의 내용 대부분을 채운다. 그래서 누구나 부담없이 즐겁게 심리학에 관한 기본적인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책은 총 3파트로 나뉘어진다. 사람의 속마음 들여다보기, 숨겨진 속마음 꺼내기, 상황을 역전 시키기로 구성되어 인간의 마음과 그 마음의 상태 그리고 상대방의 마음을 어떻게 나에게 유리하게 이끌 수 있을 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제법 흥미롭다. 읽으면서 나에게 해당되는 내용들이 너무나 많아서 흠찟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듯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무수한 인간관계를 통해 소기의 목적한 바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매우 필요한 기술 중 하나다. 그것이 비단 재화를 얻는 일이 아닐지라도...그렇기에 사람의 심리를 아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몸짓으로 상대의 속마음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인사라는 매우 일상적이고 어찌보면 큰 의미 없는 행동 하나를 통해서도 우리는 상대의 심리와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처음 만나는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보고 인사를 할 때 한 사람은 허리를 살짝 구부리며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반면 맞은편 사람은 몸을 깊이 숙인 채 눈을 내리 뜨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전자의 사람이 둘의 관계 안에서 상대에게 위압감을 줌으로서 향후 관계의 우위를 차지하게 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몸을 깊이 숙인 채 눈을 내리 뜬 사람은 충성된 개가 주인 앞에서 얌전하게 구는 것과 같이 이 관계 안에서 '을' 의 위치에 서게 될 수도 있음을 조심스럽게 짐작할 수 있다.

또 한가지 모든 이들이 공감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지하철에서 앉는 위치로서 파악되는 사람의 심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 종착역에서 출발하는 열차를 타 보았을 것이다. 텅 빈 자리가 펼쳐진 종착역 출발 지하철에서 우리는 보통 어느 자리에 앉는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좌석의 양 끝부터 자리를 채워가기 시작한다. 나 또한 지하철 빈자리가 생기면 양 끝 자리부터 앉기에 너무나 공감하게 된 내용이었다. 책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보디 존' 심리라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신체가 주변으로부터 침범받지 않기를 원하는 일정한 무형의 거리를 원한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지하철의 텅 빈 자리에서 가장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누릴 수 있는 구석의 양 끝자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 그래서 이 보디 존 심리를 잘 이용하면 상대방에게 친근감있게 비춰질 수도 있지만 반면 보디 존 심리를 무시하게 될 때는 무례한 사람, 공격적인 사람으로 여겨질 수도 있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더불어 인간관계의 심리가 가장 잘 나타나는 말씨는 경어와 같은 '인간관계어' 라는 사실 또한 내게 매우 깊은 통찰을 허락했다. 사회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경어를 사용하는 것은 예의바른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매우 효과적이고 필요한 화술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부자연스러운 경어를 사용한다거나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낸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어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무의식 속에 내재된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음을 의심해봐야 한다. 말은 의사 소통을 하는 두 사람간의 심리적 거리를 재는 척도라고 한다. 그렇기에 오래 알고 지낸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극도의 존칭과 경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보통 상대방이 자신의 바운더리를 침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내면의 방어기제가 작동 중인 사람인 경우가 많다. "나는 당신과 친해지고 싶지 않기에 내가 먼저 당신께 선을 긋고 정중하게 대해드릴테니 당신도 선을 넘지 마시고 나에게 정중하게 대해주세요!" 와 같은 무언의 메시지가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을 대하는 경어 속에 숨어 있는 의도로 비춰질 수 있다.

이 외에도 흥미로운 주제들이 독자들의 지적 욕구를 만족시켜주기에 충분하다. 어차피 은둔형 외토리로 살 수 없다면 인간은 누구나 사회적 동물로서 다른 이들과 평생을 관계하며 살아야한다. 다른 이의 표정과 말투, 행동의 작은 하나까지 정확하고 지혜롭게 간파해 낼 수 있다면야 우리는 사회 속에서 맺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행하는 시행착오와 오류의 상당 부분을 미연에 방지하고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심리학에 관련된 용어들을 알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풀이해서 우리의 일상의 지평 속에서 일어나는 관계의 문제에 대입하여 흥미롭게 서술한 책 <New 심리학 콘서트>를 통해 유난히도 일찍 찾아온 여름밤의 더위를 날려보는 것도 좋은 피서법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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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한중록 (패브릭 양장) - 1795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혜경궁 홍씨 지음, 박병성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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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후기 왕실 속 비극의 역사로 회자되는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죽음이 아닐 수 없다. 본서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 싼 이야기를 그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직접 기록한 자전적 회고록으로서 18세기 조선시대의 문화와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사료적이며 동시에 문학적인 가치를 인정받는 궁중문학의 정수라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책은 필사본 총 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저자의 친정 조카 홍수영의 청에 의해 회고록의 형태로 자신의 출생과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한 이야기 등이 기술된다. 이후 기록들은 혜경궁 홍씨가 남편 사도세자가 시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가슴 아프고 억울한 사실을 자신의 손자인 순조에게 알리기 위해서 쓰여졌다.

어린 나이에 부모의 품을 떠나야만 했던 사뭇치는 비애와 친정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읽는 이의 마음을 아릿하게 저며온다. 입궁 후 왕실의 일가로서 엄격한 왕실의 법도를 준수하며 세자빈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지켜나가는 모습이 대견스럽기도 했지만 안쓰러움으로 다가온다. 시아버지 영조와 남편 사도세자 사이의 숨막히는 관계는 발 한 번 잘못 내딛으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되는 위험스런 외줄타기와 같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묘사된다. 모든 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조선시대 그것도 궁중 여인의 그 말못할 사연이 오죽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하다.

이후 남편이 아버지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죽게 되는 충격적인 사건을 아녀자의 몸으로 오롯히 받아내야만 했던 슬픔이야말로 죽음보다 더 큰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안타까움은 그러한 슬픔조차 마음대로 내비칠 수 없는 서릿발과 같은 당시의 상황에 대한 원망이다. "모자(母子)를 보전함이 다 임금의 은혜 덕분입니다" 남편을 죽인 시아버지 앞에서 소위 표정관리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기막힌 사연이 또 있을까?

사도세자가 죽고 난 이후의 이야기는 대체로 자신의 친정 가문에 대한 정적들의 모함과 음해에 대한 기록들이다. 화완옹주와 그녀의 양아들 정후겸, 홍국영과 김종수 등 정적들은 아버지 홍봉한, 남동생 홍낙임 등을 역적으로 몰았고, 혜경궁 홍씨의 집안을 역적으로 몰아 폐가멸문 시키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다. 이러한 풍전등화와 같은 친정을 살리기 위해서 온갖 수모와 수치를 견뎌낸 이야기들이 슬픔과 분노의 감정과 적절히 혼합된 채 매우 절제된 필치로 기록된다. 그리고 마지막권에서는 남편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한권 전체의 지면을 할애하여 상세하게 기록함으로서 손자인 순조에게 할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여과없이 남기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사도세자의 아내로서 혜경궁 홍씨가 곁에서 남편을 지켜보며 모든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본서의 내용을 통해 후대의 독자들은 당시 사건의 정황을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는 유익함이 있다. 저자는 책을 통해 당시 인물들의 성품과 성향을 너무나 상세하게 기술한다. 영조의 인품과 사도세자의 사람 됨됨이 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 싼 왕실 인물들인 정성왕후, 정순왕후, 선희궁, 화완옹주, 친아버지 홍봉한 등등 인물들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본서의 1차적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게끔 만든다. 책은 아버지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를 축으로 하는 일종의 가족 비극사라고 보아도 무방하지만 이는 작품 감상에 있어 한 단면만을 바라보는 너무나 단순한 관점이 아닐 수 없다.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에 있어서 가장 큰 관심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이야기의 백미는 다름아닌 임오화변, 즉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게 되는 사건이다. 이 사건을 두고 다양한 관측과 해석이 분분하다. 그중 하나는 아버지 영조가 아들 세자에게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사랑 대신 매사에 비난과 비판을 쏟아부었고 이로인해 어린 심성에 쌓인 그 네거티브적인 영향이 세자를 비뚤어지게 만들었으며 그것이 세자를 정신적으로 병들게하고 마침내는 죽임 당하게 했다는 가족 비극사적 관점에서의 해석이다. 세자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그 홀대와 냉대로 인해 자신의 화를 못이겨 궁중 내인의 목을 쳐 살해하고,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는 일종의 정신분열 행동을 보이는 모습 또한 세자의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을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결국 그를 뒤주 속에 갇혀 죽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었을까는 재고해볼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또 하나의 관점은 사도 세자가 당시 노론과 소론이라는 당쟁의 희생양이라는 견해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당시 영조와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 싼 복잡한 정치적 지형과 주변인들의 암투와 계략 속에서 얼키고 설킨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당쟁의 과정 가운데 아버지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의 부자지간 이루어져야 할 건강한 관계의 결핍 등이 어우러지며 급기야는 이 모든 것이 복합적 원인이 되어 사도세자를 죽음이라는 비극의 장으로 내몰게 된 것은 아닐까 자문해본다.

영조 또한 자신의 이복형 경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지만 본인이 정실 법통의 문제에 있어서 무수리 출신 어머니의 아들로서 핸디캡이 있었을 것이고, 자신을 지지하는 노론파 세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소론을 지지했던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와는 보이지 않는 감정적 반목이 있지 않았을까도 생각해본다. 또한 한중록을 보면 종묘사직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분 하에 사도세자를 죽이라는 '대처분'의 의견을 제안한 사람이 다름아닌 노론파 사람으로서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이었다는 사실도 어찌보면 사도 세자가 당쟁의 희생양이 아니었을까하는 충분한 개연성을 내포한다. "소조의 병이 점점 깊어 바라는 것이 없으니, 소인이 차마 이 말씀은 모자지간의 도리로 보아 못할 일이지만, 옥체를 보호하고 세손을 건져 종사를 평안히 하는 일이 옳으니 대처분을 하소서"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사도세자의 아내로서 본서의 저자인 혜경궁 홍씨 또한 노론파 사람이었다는점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남편의 죽음 앞에서 한낱 세자비가 무슨 힘이 있었겠는가 싶지만 자신의 아들 세손(정조)과 자신의 목숨과 친정의 안위를 위해서 태연하게 몸가짐을 바로했던 혜경궁 홍씨의 모습이 괜시리 무섭기도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이렇듯 영조와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견해와 주장은 너무나 분분하다. 역사에 만약과 추측은 있을 수 없다고 하기에 나의 견해 또한 추측일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이 가진 역사적 가치와 국문 여류 문학으로서의 가치는 탁월하다. 세자빈이라는 상류층 여성의 수려하고 아름다운 문장과 극도로 절제된 필치는 여느 문학 작품과는 결이 다르다. '뒤주대왕',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팩트는 옆으로 잠시 밀어놓고, 한중록이라는 저작이 가진 문학적 깊이감에 침잠해볼 수 있다면야 그것으로 이미 행복한 독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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