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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교회사다 : 묻어둔 진리 - 중세교회사 편 ㅣ 이것이 교회사다 시리즈
라은성 지음 / 페텔(PTL) / 2019년 1월
평점 :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이 있다. 명배우 '숀 코넬리' 가 주연으로 분하여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작품이기도 하다. 작품의 배경은 14세기 초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으로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살인사건을 토대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린 시절 TV에서 방영하는 영화를 얼핏 보고나서 적지 않은 충격과 두려움을 느꼈던 감정은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가지는 그 암울함의 색채에 기인한다. 지금 기억으로는 영화의 전체적인 배경이 되는 중세 수도원의 그 어둡고 음침하며 음산한 기운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마음 속에 불쾌함으로 엄습했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중세 시대의 종교적 색감과 분위기는 암울함의 네거티브적인 느낌으로 나의 내면 안에 각인되어 있다.
유럽 중세시대에 대한 이러한 느낌을 가지고서 펼쳐든 책은 지난번 내게 깊은 인사이트를 선사했던 <이것이 교회사다 : 진리의 보고> 초대교회사편에 이은 <이것이 교회사다 : 묻어둔 진리> 중세교회사편이다. 총신대학교에서 역사신학 교수로 교편을 잡고 있는 탁월한 개혁주의 신학자 라은성 교수가 집필한 저작으로서 중세 교회 역사를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이렇게 쉽고 흥미롭게 기술한 저작은 아마 드물 것이다.
본서는 로마제국에 의한 지난한 기독교 박해의 시대가 끝난 시점 이후로 대략 AD 5세기말부터 15세기말, 16세기 초까지 대략 1000년의 시간을 가리켜 중세시대로 명명한다. 초대 교회의 역사는 교회에 대한 로마제국의 길고도 잔인한 박해와 각종 이단들의 출현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진리를 변증하고 수호하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송두리채 던진 위대한 교부들의 삶으로 대변된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찬란한 보석과 같은 성경의 진리들은 마치 그 시대가 '진리의 보고' 로서 묘사될 정도로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와 교부들의 삶을 통해 빛났다. 이러한 진리의 보고와 같았던 초대 교회 시대가 끝나고 교회는 서평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어둡고 암울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과 같은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중세 교회 시대이다. 초대 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진리의 찬란한 영광을 잃어버린 채 중세 교회 역사 속에서 교황과 로마 카톨릭에 의해 대변되어지는 그야말로 진리의 빛이 사라진 기나긴 암흑의 시대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를 가리켜 저자는 빛된 진리들이 땅 속에 철저하게 묻혀져 버렸음을 통탄하며 '묻어둔 진리' 의 시대라고 표현한다.
중세 교회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독자는 먼저 핵심적인 주제를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교황제도'이다. 그리고 이 교황제도를 지지하는 3가지의 기둥으로서 수도원 운동, 십자군 운동, 스콜라주의를 꼽는다. 이들은 책의 전면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들로서 독자들이 완독을 위해서 필히 기억하고 있어야 할 요소들이다.
언젠가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니 카톨릭은 큰집 또는 형, 개신교는 작은집 또는 아우 같은 개념이 아니겠는가? 하는 이야기였다. 교회사를 모르기에 무식함의 극치를 드러내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본서의 초반부에 이에 대한 저자의 명확한 설명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반색하며 읽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에서 한 분파를 형성한 개혁이 아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추악한 부패상들을 지우거나 없애고자 한 것도 아니며 단지 그들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초대 교회의 정통신앙을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바로 종교개혁이었음을 일갈하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그렇다면 왜 우리가 개신교와는 상관 없어보이는 로마 카톨릭의 부패와 타락의 민낯을 보게 되는 중세교회사를 배워야 하는 지에 대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1000년의 암흑 시대 속에서도 초대 교회 정통 신앙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무명의 개혁자들과 신앙의 선배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저자는 이렇게 작은 믿음의 그루터기 같은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정통신앙의 빛을 이어오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은혜의 역사들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중세교회사를 간과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베드로가 로마의 감독이었다는 주장을 통해서 로마 감독이 지상 교회의 지상권을 갖는다는 얼토당토한 주장으로부터 출발한 교황제도는 정교 유착, 성직 매매, 성직 수임권 논쟁, 송장회의, 창부정치, 족벌제도, 각종 음모와 폭력과 살인, 암살, 성적타락과 재물에 대한 말할 수 없는 탐욕, 3명의 교황으로 인한 분열과 혼란 등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패와 타락의 극치를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교황제도를 지지했던 기둥 가운데 하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교회의 타락을 견제하고 정화하기 위해서 탄생한 '수도원 운동' 이었다. 교회의 부패상을 보며 바른 신앙과 경건을 진작하기 위해 탄생한 초기의 수도원 운동은 처음에는 나름 건전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이어져갔지만 시간이 흘러 몸의 훈련이라는 외식적인 주제에 대한 관심 속에 영적으로 급격히 타락해간다. 그리고 마침내 수도원의 수사들이 제도권 교회 안으로 들어가 사제가 되면서 수도원 운동이 가진 건강하지 못한 영적 영향력들은 교회를 더욱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아울러 외적인 운동과 인위적인 프로그램으로는 결코 타락한 인간의 죄성을 이겨내고 바른 교회의 개혁을 실천할 수 없음이 수도원 운동을 통해서 여실히 드러났다.
또 한가지 교황제도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두번째 기둥은 바로 '스콜라주의' 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스콜라주의는 한마디로 인간 이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인간 이성을 중시한 스콜라주의의 철학을 채택한 로마 카톨릭주의는 인간 이해를 위한 인본주의적 신학에 바탕을 둔다. 그러면서 나타나게 된 것이 바로 7성례, 교황무류성, 마리아 성모 몽천설 등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번째 기둥인 십자군 운동은 성지 탈환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출발했지만 결국 교황과 로마 카톨릭의 정치적 야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꼭두각시로 전락해버린 의미없고, 맹목적인 역사로서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중세시대 로마 카톨릭은 일반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금했다. 성경을 소유하는 것과 성경을 읽는 것이 죽음에 이를 정도로 매우 무거운 중죄였기에 일반적인 신자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을 뿐더라 소유할 수 조차 없었다. 또한 모든 성경은 일반인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라틴어 불가타역본이었으며 모든 미사는 자국어로 드려진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 행해졌기에 신자들은 결코 성경과 진리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았다. 진리는 로마 카톨릭 성직자 계급에 의해 철저하게 은폐되고 가려졌다. 마치 진리가 땅 속에 묻혀진 것 마냥 중세 1000년의 시대는 하나님의 성경과 그분의 말씀을 찾아 볼 수 없었던 암흑의 시대였다. 그렇기에 저자가 이 시대를 가리켜 '묻어둔 진리'의 시대라 명명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역사라는 반면 교사를 통해 지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된다. 한국 교회 또한 중세 로마 카톨릭이 자행했던 그 최악의 부패와 타락의 극치를 그대로 답습하며 그 전처를 밟는 안타까운 현실 속에 있다. 주변 상권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는 대형마트의 횡포와 같이 지역의 작은 교회들을 배려하지 않는 초대형 교회들의 횡포는 말할 것도 없고, 대형 교회들의 담임 목회직 세습과 연이어 터지는 목회자들의 재정 비리와 성적 비행은 이제 일상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탐욕으로 물들고 욕망으로 점철된 현대 한국 교회의 모습과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의 암울한 모습이 묘하게 오버랩되어 마음이 아리다. 이러한 혼탁함 속에 무지한 양떼들은 무엇이 진리이며 비진리인지도 모른채 그냥 물흐르듯 그렇게 적당히 자조하며 살아간다.
정말 진리가 땅에 묻혀진 것만 같은 시대가 지금 시대인 것 같다. 신자로서 살아 숨쉬는 것 자체가 고문인 이러한 시대 속에서 진리에 대한 간절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간다. 혹자는 한국 교회가 제 2의 중세 암흑시대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한다. 아니 어쩌면 벌써 암흑 시대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책 한권을 대략 6개월 동안 챕터별로 되새김질 하듯 곱씹으며 읽어내려갔다. 책을 읽다 믿겨지지 않는 역사적 사실 앞에 도저히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허공을 응시하며 한숨 지은 적이 몇번인지 모른다. 조국 교회의 암울하고 어두운 현실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의 모습이 초라하기만 하다. 그러나 본서의 끝 부분에서 나는 새로운 한가닥 희망의 빛을 보며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존 위클리프, 얀 후스와 같은 전종교개혁자들의 진리를 향한 작은 몸부림과 결연한 외침 속에서 작은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터널을 통과해 본 사람은 안다. 어둡고 긴 터널의 끝에는 반드시 찬란한 빛이 기다리고 있음을 말이다.
전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의 초라한 날개짓이 무슨 결과를 가져올 지 몰랐다. 그리고 후대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준비하고 계셨음을 본서의 마지막을 통해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새벽 어둠이 깊으면 곧 여명이 밝아올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칠흑과 같이 깊은 어두움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으나 한가닥 희망이 있다. 그리고 그 한가닥 희망은 묻어둔 진리를 꺼내어 흙먼지를 털어내고, 정통 초대교회가 전해주는 진리를 재발견할 수 있는 '종교개혁' 이라는 그 소망과 고대함의 시간으로 우리를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