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 개정판
김훈 지음 / 푸른숲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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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없이 비루한 인간을 가리켜 시쳇말로 개만도 못하다고 말한다. 그만큼 인간이 인간 답지 못하기에 오히려 개가 더 낫다는 속 쓰리는 관용어다. 그런데 살다 보면 진짜 개만도 못한 인간들을 보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럴 때마다 조상들의 지혜에 탄복한다. 역시 세상에는 개만도 못한 인간들이 많다. 이런 상념 속 이 시대의 진정한 글쟁이라고 여기는 존경하는 '김 훈' 작가님의 오래전 저작 <개>를 개정판으로 만나는 행운을 갖었다. 2005년작이니 벌써 16년 전에 쓰인 책이지만 이번에 글을 새롭게 다듬어서 출간했다. 저자는 서문에서 "들뜬 기운을 걷어내고, 거칠게 몰아가는 흐름을 가라앉혔다"라고 말한다. 오래전 책을 읽다가 실제로 피부에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하게 만든 그의 저작 <칼의 노래>에서 느꼈던 아찔한 글 놀림의 향연이 서두에서부터 펼쳐진다.

본서는 독특하다. 지난해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이라는 말(馬)을 주인공으로 한 판타지 소설로서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던 저자가 이번에는 16년 전 육필로 눌러 쓴 자신의 원고지에서 개(犬)를 주인공으로 소환했다. 말 그대로 1인칭 전지적 개(犬)시점이다! 인간과 인간 세상을 주인공 '보리'라는 수캐의 눈으로 바라봤다. 인간이 아닌 개가 바라본 인간과 인간 세상의 모습이기에 필터가 없다. 이야기는 댐 건설로 인해서 수몰이 예정된 어느 작은 산간 마을로부터 시작된다. 보리는 다섯 마리 중 세 번째로 태어난 수놈 진돗개다. 출산 중 다리를 삔 채로 태어난 맏이는 장애로 인해 급기야는 더 이상 개로서 한 평생을 살아낼 수 없음을 직감한 제 어미에게 잡아먹힌다. 주인들은 제 새끼를 잡아먹은 몹쓸 개라고 매 타작을 한다. 하지만 보리의 눈에는 어미가 형을 잡아먹은 것이 아니라 제 자리로 돌려보낸 것이라고 말한다.

 

엄마의 뱃속으로 다시 들어간 맏형의 몸은 엄마의 영양분이 되고 엄마의 젖이 되어

눈도 못 뜬 우리의 목구멍 안으로 다시 들어왔을 거다. 우리는 그 젖을 빨아 먹었다. p27

 

새끼를 잡아먹었다고 흠씬 두들겨 맞은 어미를 보며 보리는 말한다. 사람들은 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눈치가 없다고 말이다. 그러고는 사람들은 그들끼리조차도 눈치가 없다고 일갈한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제멋대로 하는 사람이 잘난 사람으로 대접받는 요지경과 같은 인간 세상의 모순과 병폐를 한낱 미물인 개가 꼬집는다. 개가 인간보다 낫다. 어느 날은 보리가 주인 할머니의 어린 손자가 싸질러 놓은 똥을 먹는다.

 

똥을 먹는다고 똥개가 아니다. 도둑이 던져주는 고기를 먹는 개가 똥개다. p85

 

토막 토막 치고 빠지는 촌철살인의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인간 세상에 정말 똥개가 많다. 작가는 보리의 눈과 입을 빌려 지금의 시대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벼리고 벼려 시퍼렇게 날 선 식도(食刀)와 같은 김 훈 문장의 정수다!

이후 보리는 수몰된 고향집을 떠나 주인집 할머니의 둘째 아들이 살고 있는 어촌 마을로 터전을 옮긴다. 그리고 보리의 주인은 이제 할머니가 아닌 둘째 아들이다.

 

영원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인데, 개들의 나라에서 영원이라는 말은 한 주인 곁에 끝까지

눌어붙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현재의 주인을 향한 마음이 '영원'하다는 뜻이다. p65~66

 

사람들은 자신이 기르던 개를 잡아먹기도 하고 팔아 버리기도 하고 내다 버리기도 한다. 보리는 현재 자신에게 밥을 주고 재워주고 쓰다듬어 주는 지금의 주인이 영원한 주인이며 이런 주인을 향한 마음이 영원하다는 의미로 '영원'의 의미를 재해석한다. 개의 관점 속에 작가가 이 시대를 향해 던지는 금언이 제대로 녹아져 있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는 배신과 반목이 판을 치는 인간 세상 속에서 어쩌면 보리가 말한 대로 인간에게 있어서 '영원'은 무의미한 단어일 수 있다. 현재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는 그 사람이 내가 따를 수 있는 주인이며 그 사람을 향한 나의 마음이 영원하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은 인간 사회의 그 얄팍하고 가벼운 관계의 허상을 제대로 건드리는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개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 세상의 아름다움과 슬픔, 삶의 고단함이 애절하게 다가온다. 더불어 인간 세상의 모순과 어리석음, 고집스러움과 무지는 책을 펴는 독자의 마음을 깊은 비애 속으로 낚아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김훈 작가의 문장은 징그럽게 꿈틀대는 생명체와 같다. 글을 읽을 때마다 글 자체가 독자에게 엉겨 붙는다는 생각을 안 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렇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뚜껑을 덮고 나서는 나의 머리와 가슴에 달라붙은 문장의 생명력을 털어버리는 수고스러운 작업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순간 지적 농아인이 되어버리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기가 너무나 고달프다. 그만큼 김훈 작가의 문장에는 생명력이 있다. 16년 전에 쓴 글을 개정판을 위해 재소환하며 들뜬 기운을 걷어내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유려한 문장 사이사이 어휘와 어휘가 서로 치대며 작가의 관념을 뜨겁게 쏟아낸다.

개를 모티브로 했기에 때로는 낯선 익살스러움과 유머가 다소 까불듯이 문단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작가 특유의 진중함과 무게감이 자칫 날릴 수도 있는 문맥의 고삐를 단단히 붙잡아준다. 또한 이 책이 가지는 특징 중 하나는 개라는 미물의 심리를 너무나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의 심리와 작가의 언어가 서로 치열하게 치받으며 사람들의 힘겨운 삶을 제대로 채색해간다. 더불어 개의 눈으로 바라본 모순과 역설이 가득한 인간 세상에 대해 작가는 거침이 없다. 가난과 아픔이 있고 죽음이라는 현실의 무게가 모두를 짓누르지만 개의 눈으로 봐도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 그래서 작가는 보리의 눈과 입을 빌려 세상에 호소한다.

220여 페이지의 다소 짧은 산문이지만 거의 기예에 가까운 작가의 문장력에 현기증을 느끼며 완독했다. 책을 읽는 중간에 아무것도 못했다. 무심코 내뱉는 독자의 숨 고르기가 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느껴졌기에 그랬다. 그래서 책을 펼쳐들고 긴 호흡 속에서 단번에 읽어내려갔다. 책의 곳곳에 싸질러 놓은 듯한 보리의 똥 구린내와 오줌 지린내가 진동하는 듯한 문학적 판타지를 경험한다. 그만큼 작가가 벌려놓은 글 판이 무섭다. 개 한 마리를 가지고서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쥐락펴락하는 작가의 내공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렇기에 책이 가지는 무게감은 단순한 산문집의 수준을 벗어난다.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을 통해서는 역사적 비애를 가슴 사무치도록 전달했다. 오래전 절판되었기에 소위 '김 훈 마니아'들이 중고책방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았다는 전설적인 산문집 <밥벌이의 지겨움>에서는 소시민들의 텅 빈 위장을 자극하는 깊은 비애를 발견한다. 그리고 <달 너머로 달리는 말>과 본서 <개>를 통해서는 한낱 미물이라고 여긴 말과 개의 관점에서 철저하게 인간사의 구석구석을 핥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개의 눈으로 인간과 인간 세상을 보고 싶다면 이 책 한 권이면 된다.

명불허전! 김 훈! 이 시대의 진정한 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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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6-04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월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숨비북 2021-06-05 05:39   좋아요 0 | URL
생각지도 못했는데 연락받아서 깜짝놀랐네요..축하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