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너머로 달리는 말
김훈 지음 / 파람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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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롭고 정제된 문장이 마치 하얗고 파르스름하게 날 선 식도의 그것과 같이 문단과 문단을 넘나들며 글이 가진 그 원초적 기운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몇 안되는 작가로 꼽히는 '김훈'이 산문집 <연필로 쓰기> 이후 근 1년만에 장편소설로 독자들을 만났다. 김훈 작가의 글을 사랑하는 평범한 독자로서 항상 느끼는 것은 그의 글을 보고 있노라면 글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동경이 나의 심연에 정동으로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유난히도 빨리 찾아온 초여름의 어느날, 김훈의 신간 출판 소식을 접하고 내가 느낀 솔직한 감정이다. <칼의 노래>를 통해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접했기에 2017년 소설로서는 <남한산성> 이후 뜸했던 그의 행보가 무척이나 궁금했던차였다.

그렇기에 코로나로 한참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이 때 그의 출간 소식은 내게 가뭄 속 단비와 같은 작은 희열을 가져왔다. 책을 받고 속지에 인쇄된 저자의 친밀 서명을 응시하며 책내음을 들이킨다. 인쇄지에서 전해져오는 야릇하고 진한 잉크 냄새를 변태스럽게 흠향함과 동시에 그가 그려갈 이야기의 향연을 기대하며 첫 페이지를 연다. 책장을 넘길때 전혀 예상치 못한 내러티브가 펼쳐진다는 사실은 독자에게 있어서 행운이자 한편으로는 상당한 모험일 수도 있는 경험이다. 문장은 여전히 살아서 치근덕대듯 꿈틀대고 있지만 지금까지 느껴왔던 김훈이 보인 집필의 전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초입부에서 강하게 느끼는 순간 기대감과 함께 출처를 알 수 없는 염려가 엄습했다.

어차피 픽션인 소설은 팩트보다는 글쓴이의 생각의 곡선을 따라가는 것이 더 매력적인 장르라는것을 알고 있지만 김훈이 이러한 작품을 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역사와 공상이 만나서 탄생된 이름하여 '역사판타지' 소설이라고 표현한들 그의 작품에 대한 경의를 잃는 것은 아니리라. 역사적 배경을 깔았지만 실제로 없는 무형의 역사를 지면으로 소환해내어 육필로 꾹꾹 눌러 쓴 저자의 문학적 저력이 엿보인다. 더군다나 책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닌 짐승이다. 옛부터 영특하다 여겨진 영물로서의 말(馬)을 전면에 내세워 말의 눈으로 본 인간 사회의 대소사를 지극히 절제되고 담담한 필치로 그려냈다.

저자는 책의 전반 지면을 할애하여 소설의 배경을 멍석깐다.'나하' 라는 강을 사이에 두고 태고의 국가로서 북쪽 초나라와 남쪽 단나라가 존재했다.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초나라와 땅에 정착하여 흙을 먹고 살아가는 단나라는 분명 인류 문명의 이질성을 드러낸다. 각기 다른 문명이 서로의 다름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은 피가 당기는 것과 같이 참을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본성에 기인한다. 저자는 두 문명의 충돌을 이야기의 근간으로 삼지만 거기에는 전중반부터 시작되는 인류 문명 속에 깊이 관여했지만 그 태동은 알 수 없는 말(馬)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말(馬)이라는 짐승이 언제부터 인간에게 자신의 잔등을 허락했고, 인간은 어떻게 말(馬)을 문명의 중심축으로 끌어들였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말(馬)이 인간사의 굴곡진 일상 속에 깊이 관여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말의 역사를 찢고 침범한 것인지 그 진위를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저자가 본서를 통해서 드러내는 것은 인간과 말의 서사를 통한 문명과 야만의 민낯을 독자들에게 가감없이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초나라의 신월마 토하와 단나라의 비혈마 야백은 순수 혈통의 우수한 명마들이며 이야기의 중심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이질성을 극복하지 못한 인간들은 죽고 죽이는 전쟁을 통해 야만과 광기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리고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인간의 폭력을 여과없이 목격한 말의 관점을 빌려 물고 물리는 아수라장 같은 인간사 각축장의 혼돈을 다소 거칠게 그러나 때로는 한없이 세밀하면서도 절제된 저자만의 명문으로 토해낸다. 문명은 길들여진 것이며 야만은 날 것 그대로의 비릿함을 전한다. 인간에게 자신의 등을 허락하지 않았을 때의 말은 야만 자체였으며 자신의 등에 인간을 태우고 달리기 시작하면서 말은 문명의 일원이 되었다. 그렇기에 저자는 문명과 야만의 충돌을 모두 다 지켜본 말(馬)을 이야기의 전면에 내세운다.

신화적 상상력으로 써내려간 저자의 신작은 분명 또 하나의 한국 문학계에 일획을 긋는 소설로서 기억될 것이다. 본서는 <칼의 노래>와 같은 벼락같고 날카로우면서도 무섭게 절제된 명문보다는 시원의 그 알지 못하는 언어의 태고적 신비스러움이 더 많이 묻어나오는 저작이다. 저자는 간격과 공간마다 어휘와 문장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서 읽는 이로 하여금 쉽사리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여리면서도 동시에 매몰찬 긴장감을 책의 말미까지 끈질기게 끌고간다. 이렇듯 작은 틈새 하나도 허투루 날려버리지 않는 진득한 저력이 바로 작가 김훈만이 가진 그 무엇이다.

스러져가는 공상 속 두 나라의 저물어가는 운명의 끝단을 지켜보는 신월마 토하와 비혈마 야백의 관점을 통해 저자가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진의는 무엇일까? 흩어진 역사의 파편들을 마치 깨진 토판 조각을 줏어모아 엇댄듯한 이야기의 편린들은 지금의 문명에 대한 조소이며 경계이다. 저자 김훈은 책의 '뒤에' 서 3호선 전동차를 타고 창밖의 일상을 바라보며 느낀 자신의 회상을 이렇게 적는다. "세상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서식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 책은 그 답답함의 소산이다. 세상을 지우면 빈자리가 드러날 테지만, 지우개로 뭉갤 수 없어서 나는 갈팡질팡하였다."

부정하고 싶고 지워버리고 싶은 세상에 대한 절절한 바람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공상의 나라 속으로 그를 침잠케했고, 한바탕 세차게 불어닥치는 비바람과 같이 흥망성쇠 문명의 한장면을 말(馬)이라는 영물의 관점으로 마음껏 비웃었다. 약육강식의 야만적 습성이 여전히 정상으로 여겨지는 이 비정상적인 세상에 대한 부정을 저자는 그나마 소설 속 두 문명의 대립과 스러짐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하여 훌륭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그 숨겨진 진의를 고발하는 주된 장치로서 말(馬)은 그에게 더할나위없이 중요한 도구다. 부인하고 부정하고 싶은 우리네 일상에 대한 애증이 들끓는다면 김훈 작가의 역사판타지 한편으로 이번 여름 우리네 삶의 틀어진 추를 의미있게 재정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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