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안드레아스 J. 쾨스텐버거.저스틴 테일러 지음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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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인생에 있어서 삶의 마지막 일주일이 주어진다면 가장 가치있고 의미있게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고 마무리하기 위해서 애쓸 것이다. 그러나 여기 자신의 마지막 일주일을 자신이 아닌 오로지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내어준 한 위대한 인물의 이야기가 기록된 책이 있다. 그 책은 바로 성경이며 그중에서도 신약성경 첫 네 권의 책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다. 그리고 오늘 리뷰하게 되는 본서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은 바로 이 네 권의 복음서를 통해 드러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자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마지막 일주일을 조명한다. 절대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 속에서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역사적 예수로서 그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단지 그는 역사적으로 한 시대를 살다간 선구자나 성인 정도로 이해되는 것이 요즘 시대의 기독교와 예수를 바라보는 지배적인 관점이기에 어찌보면 본서가 말하는 주제는 불신자들에게는 관심 밖일 수 있다.

그러나 신자들에게조차 1년에 한번 사순절과 고난주간, 부활절을 맞이할 때 되새겨보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주일에 대한 내용은 알듯하면서도 정확한 팩트를 인지하고 있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책은 고난주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수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 당한 후 3일만에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보이시며 승천하시기까지의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을 따라 간략하면서도 요점을 놓치지 않고 설명한다. 특별히 책이 가지는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주일을 조명하는 데 있어서 저자들이 어느 하나의 복음서만을 자신들의 집필을 위한 텍스트로 선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공관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물론이거니와 기술의 관점이 다른 요한복음까지 4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주일의 행적을 보다 더 정확하고 객관적인 차원에서 다루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돋보인다. 또한 신학적인 난해한 내용이 없기에 일반적인 신자들 누구나가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주간의 행적을 손쉽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편집된 점 또한 책이 가지는 장점 중 하나다.

특별히 예루살렘 입성 후 예수께서 유월절을 준비하시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행하시는 목요일과 유대 지도자들에게 체포된 후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 당하는 금요일의 기록은 지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내용의 구성이 광범위하면서도 집약적이다. 저자들은 복음서에서 증거하는 사건의 내용을 본문 그대로 가지고 와서 각 챕터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본문에 대해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해설을 싣는다. 동일한 한 사건에 대해 4복음서의 각기 다른 저자들이 바라본 4개의 관점에 의해 기록된 사건은 서로간 서술상의 차이로 인해 오류가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오류라기보다는 다양한 관점의 저자가 한 사건을 다각도로 관찰하고 기술함으로서 빚어진 서술기법 상의 차이이며 오히려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해주는 효과적인 장치이다.

책의 마지막 챕터인 '뒷이야기'를 통해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의심 많은 제자 도마에게 찾아가셔서 자신을 증명하시는 장면은 이 책의 백미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첫날 일요일에 도마를 제외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후 도마는 자신이 직접 예수님의 못자국난 손과 창으로 찔린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을 드러낸다. 저자들은 이러한 그의 회의주의는 역사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공유되어 왔다고 말한다. 사실 역사적으로 모든 세대는 예수의 부활을 진정으로 믿기보다는 허황된 유대인들의 신화이자 옛날 이야기라고 치부하며 불신하는 시대정신의 지배를 받았다. 그렇기에 어쩌면 인류가 은하계를 정복하는 지금의 최첨단 과학 문명의 시대를 향유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부활과 기독교 복음은 가장 미개하고 천박한 사상 가운데 하나다.

요한복음을 통해 사도 요한은 이미 사람들 안에 이러한 불신과 회의가 도사리고 있음을 보았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은 3년반 동안 스승인 예수의 곁에서 그와 함께 먹고 마셨던 제자 도마에 의해 극대화된다. 그런데 나를 더 놀라게 한 사실은 바로 이 도마의 불신까지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과 섭리이다. 예수의 사명은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서 철저하고 잔인하게 죽임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완벽하게 살해당하고 무덤에 묻힌 후 3일만에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셔야만 하는 것이 예수께서 이 지상에서 마지막 일주일을 사시는 것의 유일한 목적이자 하나님의 계획이었기에 그분의 의심할 수 없는 철저한 죽음은 그분의 부활의 사실성을 입증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선행조건이었다. 그렇기에 도마의 날 선 의심은 저자들이 말하듯 로마의 십자가 처형이 철저하고 치명적이며 따라서 못 박힌 흔적을 가진 사람이 살아있을 수 없다는 예수 죽음의 확실성을 굳게하는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도구였고 장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도마의 의심을 통해서도 증명되듯이 확실하고 철저하게 죽임당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명확하게 한치의 오차와 오류도 없이 죽임 당한지 3일만에 부활하셨다!

저자들은 책의 말미에 독자들에게 묻는다. 그럼 "당신은 그를 누구라하는가?" 신화적 예수, 역사적 예수의 주장이 판을 치는 이 세대 속에서 참된 신자의 믿음의 대상이자 구원의 절대성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성에 대한 물음은 신자라면 누구나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중대한 물음이다. 참된 신자들에게는 모든 날이 부활절이다. 그렇기에 때만되면 요란스럽게 지키려는 사순절, 고난주간, 부활절 안에 갇혀있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매일의 일상과 삶의 지평 속에서 그분의 부활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이땅에서 신자로서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는 진정한 경건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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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심리학 콘서트 - 독자들이 선택한 대중심리학의 텍스트 심리학 콘서트
공공인문학포럼 지음 / 스타북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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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즐겨 찾는 맥도날드나 버거킹과 같은 패스트푸드 매장 인테리어에 우리가 모르는 숨겨진 비밀이 있음을 아는가? 이러한 매장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비용을 계산하기 위해 우리는 무심코 계산대 앞에 선다. 그런데 이 매장 계산대의 높이는 약 72cm인데 이 높이가 사람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기 가장 편한 높이라고 한다. 또한 점원은 손님이 주문을 하면 감사의 인사를 하고, 3초 후에 곧장 다른 메뉴 중 필요한 것이 없냐고 다그치듯이 그러나 친절하게 묻도록 훈련받는다. 그러면 손님은 뭔가 더 주문을 해야할 것 같은 심리적 압박 속에 추가주문을 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위의 일화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한 마케팅 심리 기법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렇듯 물건 하나 팔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인간을 이해하고, 사람의 심리를 잘 이용해야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와같이 사람의 심리에 대해서 깊이 있게는 아니지만 우리의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생활 속 심리학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기술된 책이 오늘 리뷰하게 되는 본서이다. 초판 발행 후 50만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이후 10주년 기념 리커버 에디션으로 출간된 본서는 전문적인 학술 심리학책은 아니고 말그대로 교양 심리학책이다. 우리가 풍문으로 알고 있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칼 융과 같은 유명한 심리학자들의 복잡한 이론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실생활 속에서 만나게 되는 흥미로운 심리학적 주제들이 책의 내용 대부분을 채운다. 그래서 누구나 부담없이 즐겁게 심리학에 관한 기본적인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책은 총 3파트로 나뉘어진다. 사람의 속마음 들여다보기, 숨겨진 속마음 꺼내기, 상황을 역전 시키기로 구성되어 인간의 마음과 그 마음의 상태 그리고 상대방의 마음을 어떻게 나에게 유리하게 이끌 수 있을 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제법 흥미롭다. 읽으면서 나에게 해당되는 내용들이 너무나 많아서 흠찟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듯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무수한 인간관계를 통해 소기의 목적한 바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매우 필요한 기술 중 하나다. 그것이 비단 재화를 얻는 일이 아닐지라도...그렇기에 사람의 심리를 아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몸짓으로 상대의 속마음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인사라는 매우 일상적이고 어찌보면 큰 의미 없는 행동 하나를 통해서도 우리는 상대의 심리와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처음 만나는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보고 인사를 할 때 한 사람은 허리를 살짝 구부리며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반면 맞은편 사람은 몸을 깊이 숙인 채 눈을 내리 뜨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전자의 사람이 둘의 관계 안에서 상대에게 위압감을 줌으로서 향후 관계의 우위를 차지하게 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몸을 깊이 숙인 채 눈을 내리 뜬 사람은 충성된 개가 주인 앞에서 얌전하게 구는 것과 같이 이 관계 안에서 '을' 의 위치에 서게 될 수도 있음을 조심스럽게 짐작할 수 있다.

또 한가지 모든 이들이 공감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지하철에서 앉는 위치로서 파악되는 사람의 심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 종착역에서 출발하는 열차를 타 보았을 것이다. 텅 빈 자리가 펼쳐진 종착역 출발 지하철에서 우리는 보통 어느 자리에 앉는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좌석의 양 끝부터 자리를 채워가기 시작한다. 나 또한 지하철 빈자리가 생기면 양 끝 자리부터 앉기에 너무나 공감하게 된 내용이었다. 책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보디 존' 심리라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신체가 주변으로부터 침범받지 않기를 원하는 일정한 무형의 거리를 원한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지하철의 텅 빈 자리에서 가장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누릴 수 있는 구석의 양 끝자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 그래서 이 보디 존 심리를 잘 이용하면 상대방에게 친근감있게 비춰질 수도 있지만 반면 보디 존 심리를 무시하게 될 때는 무례한 사람, 공격적인 사람으로 여겨질 수도 있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더불어 인간관계의 심리가 가장 잘 나타나는 말씨는 경어와 같은 '인간관계어' 라는 사실 또한 내게 매우 깊은 통찰을 허락했다. 사회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경어를 사용하는 것은 예의바른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매우 효과적이고 필요한 화술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부자연스러운 경어를 사용한다거나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낸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어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무의식 속에 내재된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음을 의심해봐야 한다. 말은 의사 소통을 하는 두 사람간의 심리적 거리를 재는 척도라고 한다. 그렇기에 오래 알고 지낸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극도의 존칭과 경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보통 상대방이 자신의 바운더리를 침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내면의 방어기제가 작동 중인 사람인 경우가 많다. "나는 당신과 친해지고 싶지 않기에 내가 먼저 당신께 선을 긋고 정중하게 대해드릴테니 당신도 선을 넘지 마시고 나에게 정중하게 대해주세요!" 와 같은 무언의 메시지가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을 대하는 경어 속에 숨어 있는 의도로 비춰질 수 있다.

이 외에도 흥미로운 주제들이 독자들의 지적 욕구를 만족시켜주기에 충분하다. 어차피 은둔형 외토리로 살 수 없다면 인간은 누구나 사회적 동물로서 다른 이들과 평생을 관계하며 살아야한다. 다른 이의 표정과 말투, 행동의 작은 하나까지 정확하고 지혜롭게 간파해 낼 수 있다면야 우리는 사회 속에서 맺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행하는 시행착오와 오류의 상당 부분을 미연에 방지하고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심리학에 관련된 용어들을 알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풀이해서 우리의 일상의 지평 속에서 일어나는 관계의 문제에 대입하여 흥미롭게 서술한 책 <New 심리학 콘서트>를 통해 유난히도 일찍 찾아온 여름밤의 더위를 날려보는 것도 좋은 피서법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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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한중록 (패브릭 양장) - 1795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혜경궁 홍씨 지음, 박병성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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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후기 왕실 속 비극의 역사로 회자되는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죽음이 아닐 수 없다. 본서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 싼 이야기를 그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직접 기록한 자전적 회고록으로서 18세기 조선시대의 문화와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사료적이며 동시에 문학적인 가치를 인정받는 궁중문학의 정수라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책은 필사본 총 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저자의 친정 조카 홍수영의 청에 의해 회고록의 형태로 자신의 출생과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한 이야기 등이 기술된다. 이후 기록들은 혜경궁 홍씨가 남편 사도세자가 시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가슴 아프고 억울한 사실을 자신의 손자인 순조에게 알리기 위해서 쓰여졌다.

어린 나이에 부모의 품을 떠나야만 했던 사뭇치는 비애와 친정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읽는 이의 마음을 아릿하게 저며온다. 입궁 후 왕실의 일가로서 엄격한 왕실의 법도를 준수하며 세자빈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지켜나가는 모습이 대견스럽기도 했지만 안쓰러움으로 다가온다. 시아버지 영조와 남편 사도세자 사이의 숨막히는 관계는 발 한 번 잘못 내딛으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되는 위험스런 외줄타기와 같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묘사된다. 모든 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조선시대 그것도 궁중 여인의 그 말못할 사연이 오죽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하다.

이후 남편이 아버지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죽게 되는 충격적인 사건을 아녀자의 몸으로 오롯히 받아내야만 했던 슬픔이야말로 죽음보다 더 큰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안타까움은 그러한 슬픔조차 마음대로 내비칠 수 없는 서릿발과 같은 당시의 상황에 대한 원망이다. "모자(母子)를 보전함이 다 임금의 은혜 덕분입니다" 남편을 죽인 시아버지 앞에서 소위 표정관리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기막힌 사연이 또 있을까?

사도세자가 죽고 난 이후의 이야기는 대체로 자신의 친정 가문에 대한 정적들의 모함과 음해에 대한 기록들이다. 화완옹주와 그녀의 양아들 정후겸, 홍국영과 김종수 등 정적들은 아버지 홍봉한, 남동생 홍낙임 등을 역적으로 몰았고, 혜경궁 홍씨의 집안을 역적으로 몰아 폐가멸문 시키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다. 이러한 풍전등화와 같은 친정을 살리기 위해서 온갖 수모와 수치를 견뎌낸 이야기들이 슬픔과 분노의 감정과 적절히 혼합된 채 매우 절제된 필치로 기록된다. 그리고 마지막권에서는 남편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한권 전체의 지면을 할애하여 상세하게 기록함으로서 손자인 순조에게 할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여과없이 남기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사도세자의 아내로서 혜경궁 홍씨가 곁에서 남편을 지켜보며 모든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본서의 내용을 통해 후대의 독자들은 당시 사건의 정황을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는 유익함이 있다. 저자는 책을 통해 당시 인물들의 성품과 성향을 너무나 상세하게 기술한다. 영조의 인품과 사도세자의 사람 됨됨이 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 싼 왕실 인물들인 정성왕후, 정순왕후, 선희궁, 화완옹주, 친아버지 홍봉한 등등 인물들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본서의 1차적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게끔 만든다. 책은 아버지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를 축으로 하는 일종의 가족 비극사라고 보아도 무방하지만 이는 작품 감상에 있어 한 단면만을 바라보는 너무나 단순한 관점이 아닐 수 없다.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에 있어서 가장 큰 관심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이야기의 백미는 다름아닌 임오화변, 즉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게 되는 사건이다. 이 사건을 두고 다양한 관측과 해석이 분분하다. 그중 하나는 아버지 영조가 아들 세자에게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사랑 대신 매사에 비난과 비판을 쏟아부었고 이로인해 어린 심성에 쌓인 그 네거티브적인 영향이 세자를 비뚤어지게 만들었으며 그것이 세자를 정신적으로 병들게하고 마침내는 죽임 당하게 했다는 가족 비극사적 관점에서의 해석이다. 세자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그 홀대와 냉대로 인해 자신의 화를 못이겨 궁중 내인의 목을 쳐 살해하고,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는 일종의 정신분열 행동을 보이는 모습 또한 세자의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을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결국 그를 뒤주 속에 갇혀 죽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었을까는 재고해볼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또 하나의 관점은 사도 세자가 당시 노론과 소론이라는 당쟁의 희생양이라는 견해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당시 영조와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 싼 복잡한 정치적 지형과 주변인들의 암투와 계략 속에서 얼키고 설킨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당쟁의 과정 가운데 아버지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의 부자지간 이루어져야 할 건강한 관계의 결핍 등이 어우러지며 급기야는 이 모든 것이 복합적 원인이 되어 사도세자를 죽음이라는 비극의 장으로 내몰게 된 것은 아닐까 자문해본다.

영조 또한 자신의 이복형 경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지만 본인이 정실 법통의 문제에 있어서 무수리 출신 어머니의 아들로서 핸디캡이 있었을 것이고, 자신을 지지하는 노론파 세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소론을 지지했던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와는 보이지 않는 감정적 반목이 있지 않았을까도 생각해본다. 또한 한중록을 보면 종묘사직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분 하에 사도세자를 죽이라는 '대처분'의 의견을 제안한 사람이 다름아닌 노론파 사람으로서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이었다는 사실도 어찌보면 사도 세자가 당쟁의 희생양이 아니었을까하는 충분한 개연성을 내포한다. "소조의 병이 점점 깊어 바라는 것이 없으니, 소인이 차마 이 말씀은 모자지간의 도리로 보아 못할 일이지만, 옥체를 보호하고 세손을 건져 종사를 평안히 하는 일이 옳으니 대처분을 하소서"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사도세자의 아내로서 본서의 저자인 혜경궁 홍씨 또한 노론파 사람이었다는점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남편의 죽음 앞에서 한낱 세자비가 무슨 힘이 있었겠는가 싶지만 자신의 아들 세손(정조)과 자신의 목숨과 친정의 안위를 위해서 태연하게 몸가짐을 바로했던 혜경궁 홍씨의 모습이 괜시리 무섭기도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이렇듯 영조와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견해와 주장은 너무나 분분하다. 역사에 만약과 추측은 있을 수 없다고 하기에 나의 견해 또한 추측일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이 가진 역사적 가치와 국문 여류 문학으로서의 가치는 탁월하다. 세자빈이라는 상류층 여성의 수려하고 아름다운 문장과 극도로 절제된 필치는 여느 문학 작품과는 결이 다르다. '뒤주대왕',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팩트는 옆으로 잠시 밀어놓고, 한중록이라는 저작이 가진 문학적 깊이감에 침잠해볼 수 있다면야 그것으로 이미 행복한 독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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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하루 24시간 어떻게 살 것인가 - 1910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아널드 베넷 지음, 이미숙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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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과중한 업무로 인해 지친 몸을 이끌고 늦은 시간 귀가할 때가 생각난다. 매일 지나치는 동네 '0025 편의점' 간판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혼자 이런 말을 되뇌인적이 있다. "아! 하루 24시간도 모자라네. 저 편의점 이름처럼 나한테만이라도 하루가 25시간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할일은 많은데 시간은 없고, 몸은 지치는 울고 싶은 상황 속에서 내밷은 시간에 대한 푸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보면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이 24시간 조차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뜰하게 살아내지 못한다는 것이 보편적인 사실이다. 이러한 단상 속에 만나게 된 <하루 24시간 어떻게 살 것인가>는 시간과 자기 계발 분야의 고전이라 불리는 저작이다. 저자인 '아놀드 베넷' 은 영국의 가난한 시골집에서 태어나 특유의 성실함으로 작가로서의 명성과 동시에 엄청난 부를 걸머쥔 입지전적 인물이다. 너무나 유명한 '데일 카네기'가 극찬하고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고 하니 더 이상의 미사여구는 사족이다.

 

 

책은 총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부터 6장까지는 우리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의 중요성, 구체적인 실천지침과 더불어 세부적인 방법론을 기술한다. 이어 7장부터 12장까지는 그럼 우리가 어렵게 확보한 이 귀중한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밝힌다.

 

 

저자는 아침마다 우리의 지갑에 24시간이라는 시간이 새롭게 충전된다고 말한다. 시간은 그의 표현대로 누구에게나 동일하고 공평하게 주어지는 삶이 선사한 선물이자 비매품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간을 어떻게 선용할 것인가이다. 저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흘려보낸다고 지적한다. 우선 저자는 밤에 일찍 잠자리에 들고 대신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고 조언한다. 마치 아이들에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는 부모의 잔소리와 같지만 그렇지 않다. 능률상 아침 1시간은 저녁의 2시간보다 더 효과가 있다. 중요한 진리 중 하나는 우리가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있는가? 의 차이다. 얼핏 큰 차이가 없어보이지만 살아내고 있는가와 그냥 있는가는 천지차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내게 주어진 시간을 적극적으로 살아내겠다는 의지의 외적 표명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멍한 머리로 아침을 맞이함으로서 그냥 존재 자체로서 '있는 삶' 으로 전락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또한 저자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가 어렵다.", "저녁 퇴근 후의 시간은 직장에서 에너지가 고갈 된 채로 귀가했기에 단지 식사를 하고 고난한 몸을 쉬는 시간으로밖에 활용할 수 없다." 고 투덜대는 사람들에 대해서 일침을 놓는다. 즉 "가치있는 일을 실천하려면 먼저 의지를 단단히 다져야한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한다. 마법 같은 시작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고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지만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책의 내용과 같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머리에만 머물 뿐 그것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져서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자 아놀드는 이 부분을 정확하게 일갈한 것이다.

직장에서의 8시간 외에 퇴근 후 저녁부터 다음날 출근하기 전까지의 16시간의 작은 하루를 되찾는 것의 중요성 또한 새롭다. 어쩌면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일 수도 있지만 의외로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은 퇴근 후의 시간 사용! 그리고 구체적으로 퇴근 후 매일 최저 1시간 30분을 확보하여 잠재력 계발을 위해서 투자하는 것은 습관의 문제라는 사실! 습관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변화에는 장애와 불편이 따른다.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책에서 말하듯 어느 정도의 희생(포기)과 엄청난 의지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시간을 아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잠재력 계발, 자기 계발이라고 표현하면 너무 광의적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시간을 아껴서 두뇌를 훈련하라는 저자의 조언이 신선했다. 무엇인가 우리가 관심 가지고 있는 분야에 대해서 사색하고 성찰하고 집중력을 발휘하라는 것! 특별히 출근길에 허망한 생각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두뇌의 근력을 키울 수 있는 고전이나 운문과 같은 분야의 내용들을 되씹고 새기면서 집중력을 키울 때 허투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매사에 정신을 지배하며 주어진 시간을 임팩트있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127페이지 밖에 안되는 작은 책 한권이 가지는 여운이 대단하다. 일단 책을 덮으며 느끼는 것은 군더더기가 없다는 점이다. 저자인 아놀드 베넷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간 사용과 자기 계발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액기스만 추출한 지식의 원액을 독자들에게 아낌없이 베푼다. 어쩌면 일부 독자들은 본서의 내용 중 많은 부분을 서점가에 출간된 다양한 자기 계발 도서들로 인해 이미 섭렵하고 있을수도 있다. 그만큼 책의 내용이 아주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사실 이 작은 책이 데일 카네기가 극찬할 정도의 자기 계발 분야의 고전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책이 이야기하는 대다수의 메시지가 현대의 다양한 자기 계발 도서들의 원류이기에 그렇다.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주어진 업무, 각종 요구들과 기대하는 시선들의 부담을 느끼며 항상 시간의 부족함을 못다한 일들에 대한 핑계로 돌리기 바쁜 나 자신의 모습을 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만난 아놀드 베넷의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제시하는 특별한 시간 사용의 철학들이 내게 너무나 큰 유익함으로 다가온다. 일단 저녁 시간은 육아로 인해서 당분간 나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빼놓을 수 없지만 저녁에 일찍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과 같은 실현 가능한 삶을 계획해본다. 마법과 같이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우리네 인생의 지갑에 24시간이라는 삶이 주는 선물이 두둑하게 들어있음을 보며 만족하는데에 그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공평하게 주어진 삶의 선물을 어떻게 하면 빛나는 인생으로 열매맺히게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고민하며 실행에 옮긴다면 서평의 서두에서 언급한 '0025 편의점' 의 간판을 보며 허망함을 곱씹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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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결정적 리더십의 교과서, 책 읽어드립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신동운 옮김 / 스타북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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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의 심연을 냉철하면서도 정확하게 꿰뚫어 본 일종의 정치철학서로 꼽히는 책은 단연코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다. 이번에 기회가 되어 서울대 필독 인문고전서로도 뽑힌 본서를 펼치고 그 안의 내용들을 살필 수 있었다. 내용이 방대하거나 고전이기에 소화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무겁지 않을까 염려한다면 그것은 모두 기우에 불과할 정도로 책 자체는 매우 라이트하다. 어떻게 보면 인간사에 있어서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어디에서나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 문제의 화두를 정치판에 집약시킨 책이 아닐까 생각된다. "군주는 이러해야하고, 국가는 저러해야한다!" 라는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다소 평이한 내용들이 책의 전면을 채운다. 마치 삼국지 유비의 책사인 제갈공명이 곁에서 군주의 도리와 역할, 책임을 간언하듯 저자인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의 군주인 '위대한 로렌조 메디치'에게 행하는 깨알조언이 흥미롭다.

그러나 고전이 달리 고전이 될 수 있었겠는가? 누구나가 평범하게 이해하고 생각해 낼 수 있는 지적 결과물 그 이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대다수 범인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인간 내면과 본성의 특성에 주목하여 그것을 현실 정치의 무대위로 소환해냈음에 있다. 국가와 군주, 신민의 관계가 어차피 모두 인간사의 문제이기에 얼키고 설켜 복잡하게 여겨질법한 정치 메카니즘을 가장 기본적인 인간 본성의 문제로 단순화시켜서 제시했기에 지금까지도 세대를 넘어 모든 독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책은 총 2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가의 종류와 형태, 주권과 군대에 대한 이야기, 군주가 갖추어야 할 인품과 선택해야 할 도덕적 가치들, 군주의 명성, 군신간의 올바른 관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탈리아를 해방하기 위한 호소까지 한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서 군주가 섭렵하고 있어야 할 중요하면서도 핵심이 되는 내용들을 잘 요약하고 정리해서 한권의 책으로 설명한다. 본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악에 대한 독특한 직관 또한 새롭다. 마키아벨리는 악행을 사용하여 군주가 된 자들에 대한 챕터에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잔인한 수단의 사용을 두둔한다. 그러나 이러한 잔인하고 폭력적인 수단은 결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되고 단회적으로 그쳐야 함을 주지시킨다. 즉 권력을 쟁탈해야하는 순간에는 잔혹하면서도 냉철하게 반대파의 숨통을 확실히 끊어버리는 과감함과 결단이 필요하며 그러한 악행들이 단회적으로만 그친다면 그 악행도 유용하다는 악의 선용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또한 저자는 백성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과 두려움을 받는 것의 선택 속에서 두려움 받는 것을 선택하라고 말한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므로 경우에 따라서 언제든 신의를 저버릴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전제 속에서 두려움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형벌이라는 공포에 의하여 지탱되므로 권력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즉 마키아벨리는 백성들이 군주를 향한 어느 정도의 경외와 두려움을 가질 때 군신의 관계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음을 인간 내면의 속성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덧붙이는 것은 백성들에게 두려운 대상이 되는 것은 좋지만 미움을 받는 대상은 되지 말라는 매우 중요한 키포인트이다. 두려움과 미움은 개별적이며 양립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독자들에게 있어서는 본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인생의 지혜다.

더불어 군주의 신의에 대한 화두 또한 주목할만하다. 군주론을 읽기 전 누군가에게 이 책이 차갑고 냉혹한 담론이 기술된 저작이라는 평을 들은 적이 있다. 책에 대한 이와같은 사견이 아마 군주의 신의를 다루는 부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마키아벨리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군주들 대부분은 신의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음을 밝힌다. 즉 신의를 지키는 일이 해롭거나 굳이 지킬 이유가 없을 때에는 단호하게 약속을 파기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도 인간 본성의 문제가 등장하기에 그렇다. 인간은 본래 선하지도 않고 군주에게 맹세한 언약도 지키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기에 군주 또한 위험을 무릎쓰고 신의와 약속을 지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되도록 선을 행하려고 해야하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악의 편을 드는 법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시대의 흐름과 정황의 변화를 주의깊고 면밀하게 관찰하여 처신을 그때그때 바꿀 수 있는 유연한 삶의 태도와 자세를 갖추라는 의미다.

메디치 가문을 통해서 고문과 내쫓김을 당하는 치욕을 경험했으면서도 자신의 조국 이탈리아 피렌체에 대한 연민과 융합된 자신의 정치 이상의 실현을 위해 써내려간 <군주론>을 메디치 가문의 군주에게 헌정한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참으로 역설적이면서도 비범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후 그의 인생 말년에 그가 현실 정치의 무대에 복귀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저작이 가진 영향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책의 마지막 뚜껑을 덮으며 떠오르는 상념은 본서가 비단 15~16세기 중세 유럽이라는 한정된 시공간에 갇혀있는 지협적 통찰이 아니라 세대를 관통하는 보편적 인간 사회가 가진 진리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 정치판의 생리는 차치하고 당장 우리네 평범한 민초들의 삶의 현장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 자체가 바로 군주론의 현대판 버전 아니겠는가? 기업(국가)의 오너(군주)가 있고 측근 임원(귀족)들과 일반 직원(백성)들이 존재한다. 오너는 임원들과 직원들과의 관계, 경쟁 기업(적국)들과의 관계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행하며 마키아벨리의 조언을 자신의 일상에 적용하고 접목시킨다. 시대 간극의 오류가 있기에 100%의 씽크는 불가능하지만 분명 이 책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결코 새롭지 않으면서도 중요한 안목을 선사하기에 충분한 저작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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