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간힘
유병록 지음 / 미디어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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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한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이 남긴 수많은 예술작품을 읽으며

그가 좀 더 이승에 발 붙이고 살았더라면 얼마나 더 아름다운 창조물을

남겼을까 생각했다.



삶과 죽음이 한 묶음이라면,

요절한 이의 삶의 시간은 짧았지만

그는 이미 죽음의 세상에서 태어나

죽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무병장수할 것이므로


이곳에 남은 사람들이 삶의 시간을 살아내느라

죽음의 시각을 넘겨 지각하더라도

요절한 이들이 잘 살아낸 그곳에 도착해

그들이 겪지 않은 삶의 시간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삶과 죽음이 아름답게 갈마드는 순간이 있음을



믿고,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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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문학동네 시인선 132
최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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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우 시집,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문학동네, 2020




최현우라는 시인은 오래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등단작에서부터 그런 기미가 보였지만 시집에서 접어둔 시들은 한결같이 대상의 시간을 살아가는 인물의 시선이 담긴 작품들이었다. 예를 들어, '물구나무'에서 그릇이라는 대상에 대해 몸의 확장(원효의 해골도 연상되고)이 되었다가 시장의 야바위 판에서 조그마한 사발들이 바삐 움직이며 사람의 시선을 현혹하는 장면들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장면들. 기발하고 엉뚱한 공상과 상상 대신 오랜 관찰과 그 견딤에 신뢰가 간다.





- 시인의 말

슬프고 끔찍한 일들은/ 꼭 내가 만든 소원 같아서/ 누군가 다정할 때면 도망치고 싶었다.// 망가지지 않은 것들을 주고 싶었는데,// 스물의 나를/ 서른의 내가 닫고서// 턱까지 숨이 차서 돌아가면/ 당신이 늘 없었다.





- 남다, 담다 32-33쪽


남겨진 것에 뚜껑을 덮으면/ 담겨진다// 시간을 나룰 줄 몰랐던 때에/ 밤은 하루를 닫기 위해 덮어버린 절대적인 손바닥이었다/ 주술을 하는 사람들은 불을 지펴 어둠을 밀어내며 신의 일부를 연다고 믿었다// (···)// 건드리지 않았는데 컵이 떨어져 깨지면/ 눈물을 닫아야 할 때/ 액체가 된 날과/ 고체가 된 날// 아무리 주문을 외고 제사를 치러도/ 나는 나에게서 불현 듯 쏟아진다// 영혼에 홈이 가득 패어 있는 사람은/ 매일 밤 마음과 시간을 반대로 돌려 끼우려 했던 사람이다




- 물구나무 36-37쪽


오래전부터 두개골은 완벽한 그릇이었다/ 처음 죽은 인류의 머리를 받아들고/ 물가에서 장례를 치르던 자의 생각/ 이것으로 물을 떠 마실 수 있겠다,/ 두 손보다 많은 음식을 쥐고 먹을 수 있겠다,/ 그렇게 그릇을 발견한 자는/ 짐승을 죽일 때 머리를 때리지 않았다// 설계자의 심중은 모르더라도/ 그는 야바위꾼/ 그릇들의 춤이 보고 싶었을 것/ 머리를 땅에 박아대는/ 인간들, 인간들 보며/ 한바탕 웃고 싶었을 것// 휘젓는 손을 시간이라 부를까/ 이리저리 엎어져 있게 하다가/ 내내 감추고 있게 하다가/ 딱 한 번 뒤집어버리는// (···)




- 목각 인형 48-49쪽


죽은 다음에도 살에 살을 끼워 물고 놓지 않는다면/ 빛과 잠을 섞는 저녁의 흔들의자/ 팔꿈치를 받쳐놓아도 차갑지 않은 티 테이블/ 숨어 놀다 잠든 아이의 이불 장롱처럼/ 조금 더 너랑 살겠지만,// (···)// 어디로도 가지 않았는데 돌아가고 싶은/ 돌아갈 수 없는 사람처럼/ 물기 없이 말라붙은 얼굴에는/ 영혼 대신 페인트를 바른/ 하나의 표정/ 하나의 표면// 이 넓은 밤은 누구의 빈집일까/ 발견되고 싶어서/ 뛰어내린 바닥에는 어째서 아직 닿지 않는 걸까// 그러니까 내가 나를 물고 놓지 않는다면/ 조금은 더 / 너랑 살 수 있겠지만


- 어쩌면 너무 분명한 50-51쪽


나 만지며 너 생각하면/ 아무래도 몸은 몸이 아닌 거 같아서// 기억의 주형 속으로 부어넣은 것들 세워놓으면/ 새벽의 공원/ 비를 맞고 온몸이 어두워지는 청동의 사람/ 금속으로 만든 주름, 백 년을 늙지 않는/ 어쩌면 너무 분명한/ 아, 그러니까 어쩌면// 멀리서 빛나는 창문이 있었다/ 그림자가 춤을 추며 불빛을 흔들 때/ 내게도 움직이는 음악을 따라/ 어설프게 흉내하는 사람의 동작이 있었다// 나를 잘라 팔면 돼/ 울지 마// (···)// 발치에 꽃을 두고 사라지는 누군가/ 그 뒷면을 오래 보면/ 길고 어두운 모양이 눈동자로 옮겨 붙는다/ 이제 마음도 구체적으로 사라질 차례// 팔을 떼어 녹였다/ 귀와 코를 잘라주었다/ 왼발은 왼발 없는 자에게 건네고/ 피부를 빵으로 바꾸어 먹였다// 울지마, 라는 말을/ 몸을 잘라 해야 하는 사람// 너를 생각혀면/ 나를 만질 때마다/ 아무래도 살았다는 게 살 수가 없어서




- 최현우, 발레리나, 91쪽(201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부슬비는 계절이 체중을 줄인 흔적이다

비가 온다, 길바닥을 보고 알았다

당신의 발목을 보고 알았다

부서지고 있었다

사람이 넘어졌다 일어나는 몸짓이 처음 춤이라 불렸고

바람을 따라한 모양새였다

날씨는 가벼워지고 싶을 때 슬쩍 발목을 내민다

당신도 몰래 발 내밀고 잔다

이불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듯이

길이 반짝거리고 있다

아침에 보니 당신의 맨발이 반짝거린다

간밤에 어딘가 걸어간 것 같은데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돌았다고 한다

맨발로 춤을 췄다고 한다

발롱*! 더 놓게 발롱!

한 번의 착지를 위해 수많은 추락을!

당신이 자꾸만 가여워지고 있다


* 발레의 점프동작


심사평) 시에서 계절로부터 ‘부슬비’의 가는 발목을 발견하거나 바람으로부터 ‘사람이 넘어졌다 일어나는’ 원시의 무용을 발견하는 응시의 시선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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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위로 - 산책길 동식물에게서 찾은 자연의 항우울제
에마 미첼 지음, 신소희 옮김 / 심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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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 미첼, 야생의 위로(the wild remedy)(산책길 동식물에게서 찾은 자연의 항우울제), 심심, 2020

 


코로나19로 정상적인 야외활동이 위축될 수 밖에 없는 가운데, 이 책을 펼치면 의자에 앉아 혹은 가만히 서서 산책할 수 있다. 부제처럼 박물학자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한 저자는 우울증을 오래 앓아왔는데, 그때마다 건강을 위해 산책을 나간다(물론 직업적인 목적도 있겠지만). 거주하는 오두막집 산책로부터 멀리는 웨일즈의 초원과 습지까지, 반려견 애니와 때로는 친구와 동료 연구자들과 '자연의 항우울제'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풍부한 묘사와 꼼꼼한 일러스트, 순간의 사진 들로 일년 열두달의 생태계를 펼쳐볼 수 있다. 방구석에만 있으면 없는 우울증도 생길 것 같은 이 시절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

 

- 메모 


이렇게 야생식물에 평소보다 많은 열매가 열려 가지가 묵직해지는 해를 열매의 해혹은 도토리의 해라고 한다. 40


영국 민담에 따르면 숲에 열매가 많이 열리는 것은 매서운 겨울의 예고다. 왠지 마음에 드는 이야기다. 나무들이 다가올 날씨를 감지하고 비축할 식량을 더 많이 제공해서 새들이 겨울에 살아남을 가능성을 높여준다니. 하지만 사실 숲에 풍년이 드는 이유는 그해 봄 날씨가 따뜻하고 건조하여 꽃가루 수분이 늘어난 데다 7, 8월에 비가 내려 배아가 충분히 맺히고 익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덜 낭만적인 설명도 날씨가 추워질 때 찌르레기, 지빠귀, 산비둘기를 위해 준비되어 있을 풍성한 자연의 저장고를 생각하며 내가 흐뭇해하는 걸 막지는 못한다. 41- 10

 

검은수레국화 이삭을 들여다보는데 눈에 무언가 작고 붉은 것이 어른거린다. 처음에는 너무 빨리 몸을 굽힌 나머지 망막에 섬광이 들어온 줄 알았지만, 어른거림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서 가까이 들여다보니 로제트 여려 개의 중심부에 무당벌레가 들어가 있다. 그중 하나에는 무려 다섯 마리가 겨울잠에 취해 꼼짝 않고 웅크려 있다. 이삭 중심부의 부숭부숭한 털은 공기를 가두어 단열층을 형성하며, 기온이 급락하는 맑은 겨울밤에 서리가 침투하는 것을 막아 무당벌레들을 보호해준다.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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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2020.4 - 창간50주년 기념호
샘터 편집부 지음 / 샘터사(잡지)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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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자발적 자가격리를 하는 요즘 

언제 끝날지 모르는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가 느슨해지면 

햇살이 좋은 날 한 반나절 걸으며 보이지 않는 흔적을 남기는 상상을 한다.


4월호에 소개된 명륜동 장면가옥,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 일대(문화비축기지, 하늘공원)

초기 아파트의 모습과 최근 까페가 공존하는 서요셉아파트, 충정아파트, 서소문아파트가 있는 중림동


발저, 벤야민, 소설가 구보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한 때를 나중에 보고 싶을 때면 포스트잇처럼 꺼내서 책상 앞에 붙여놓고 싶다. 


여행의 시작은 계획은 것처럼, 나는 샘터에서 상상을 길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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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임 - 오은 산문집
오은 지음 / 난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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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 연재했던 '청춘직설' 코너의 짧은 글을 챙겨보던 시절이 있었다.

몇 년이 지나 책으로 그때의 글을 읽으니 그때의 내가 소환되었다.

세월호 사건이 있었고, 반대로 나는 지금의 아내와 연애를 시작했었다.

그때의 슬픔, 그곳의 애틋함



저자 특유의 단어와 문장에 대한 관심과 시와 글을 촉발케하는 지점을 엿보게

하는 순간을 읽는 동시에

나는 병과 죽음에 관한 에피소드에 오래 머물렀다.



저자의 아빠, 고 황현산 선생, 허수경 시인



지금 살아있는, 당장 달려갈 수는 없는 곳에 사는

소중한 사람들을 내일은 못 본다고 한다면

나는 마음이 급해진다.



- 기대는 간헐적으로, 걱정은 매일


기대는 막연하고 걱정은 구체적이다. 기대가 머릿속의 뜬구름 같은 것이라면 걱정은

새털구름이나 양떼구름처럼 형체가 분명히 그려지는 것이다.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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