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
김미월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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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월 소설집,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 문학동네, 2019




​소설의 대세는 계속해서 젠더이슈에 관한 작품들이다. 여성 작가들의 페미니즘, 남성 작가들의 퀴어. 성별이나 성 정체성에 관한 차별이 사라질 떄까지 소설가의 말과 작품은 끊어져서는 안 된다.
한편, 김미월의 소설은 첫 작품집부터 최근까지도 여전히 세대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는 것 같다.
20대의 여성으로서 작가가 20대의 주제인 젊음과 사랑, 취업, 결혼으로 이어지는 세계 이전 작품들에서 그려냈다면 이번 작품집은 30대의 독신 여성으로서의 삶의 채취가 짙다. 물론 그 속에는 여성으로서 한국사회에서 느끼는 감정이 담겨 있는, 페미니즘적 시각이 담긴 작품도 있다('선생님, 저예요' '연말특집')



20대인 작가는 30대가 되었으므로 자연히 30대의 삶에 대해 생각하면서 작가 자신과 소설 속 화자 간의 거리가 너무 멀지 않은 세계를 그려낸다. 30대의 삶은 10대나 20대의 삶과 섬처럼 분리된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다리로 연결된 연속적 세계이므로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를 되돌아보고 내다볼 수 밖에 없는 시기다. 작가나 소설 속 인물만이 아닌 그 시기를 거쳤거나 헤쳐나갈 사람들의 기억과 예상의 감각을 자극하면서 이 소설들은 묘한 쾌감을 준다.



사랑과 죄책감, 자존감에 대한 성찰을 원한다면 당장 이 책을 펼쳐야 한다. '아무도 펼쳐 보지 않는 책'이라면 당신이 최초로 열어보아야 할 때다.





* 가장 아름다운 마을까지 세 시간


- 이튿날이 귀국일이었다. 그녀는 공항으로 가는 길 지하철역에서 즉석사진 부스를 보았다. 새해를 맞아 서른아홉 살이 된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평소 피사체의 진짜 모습에 가장 가깝다고 믿어온 전형적인 지하철역표 증명사진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있는데 새삼 자신이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곁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인파 속에 그녀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겠지. 계속 혼자겠지. 혼자 아무도 모르게 늙어가겠지. 27쪽


- 양희는 아까보다 더 빨리 대답했다. 사진이야 지금 이 자리에서 휴대폰으로 찍어도 될 텐데 노인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시 이어진 침묵 속에서 나는 양희희 가방에 있는 사진을 떠올렸다. 양희가 그것을 노인에게 준다면 어떨까. 두 사람은 어떤 대화를 나눌까.

이게 저예요./ 그래./ 이 사진을 찍고 나서 문득 깨달았어요, 제가 혼자라는 것을요./ 그랬구나./ 앞으로도 혼자일 거라는 생각을 하니 막막했어요./ 그래./ 내일이 시험이고 공부는 하나도 안했는데 벌써 밤이 된 것처럼 말이에요./ 그랬구나./ 그래서 이렇게 온 거예요. 아버지도 저처럼 혼자인지 알고 싶어서요./ ······ 33쪽


*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 그러니까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내일 죽는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죽기 전까지 매 순간 모든 생각 모든 행동이 부질없어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직 살아 있는데도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게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55쪽


*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


- 어쨌거나 담임선생의 중재로, 만약 그런 것도 중재라고 할 수 있다면, 친구는 상장을 가졌고 남자는 크레파스를 가졌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 안 있어 중학교에 입학했고 다시 얼마 안 있어 친구는 죽었다.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물론 남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서랍 속의 크레파스를 볼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그것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쓰레기통에 버리지도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스스로 그것을 보면서 매번 죄책감을 느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90쪽


-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졌다가 새카매졌다가 알 수 없는 색으로 덧칠되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일인칭으로 쓸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97쪽) 오래전 마주앉은 여자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날처럼 그는 이번에도 삼인칭을 택해야 할 것이었다.

그는······ 어쩌면 그는······ 하고 말이다. 98쪽



* 2월 29일



- 그가 벽에 걸린 달력을 가리켰다. 아, 하고 나는 입을 벌렸다.

2월 29일이었다. 사 년에 한 번씩 윤년에만 찾아오는, 평년에는 2월 28일 밤과 3월 1일 새벽 사이에 슬그머니 사라져버리는. 오늘이 그날이었나. 등줄기가 서늘했다.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특별하고 유일하며 절대적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나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119쪽


* 오늘의 운세


- 아, 정말이었다. 이윽고 세 종류의 알람 소리를 넘어, 먼 곳에서 희미하게 다른 알람 소리가, 곧이어 또다른 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점점 더 크게 열렸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수십 개의 알람이 동시에 울리고 있었다. 어쩌면 수백 개, 수천수만 개일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아침이란 알람의 시간이었다. 누군가가 끄지 않는다면 영원히 울릴지도 모르는 세상 모든 알람들의 시간. 154쪽


* 질문들


* 선생님, 저예요



* 도망가지 않아요



-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는데(237쪽) 그게 실패할 수도 있나. 그러니까 베트남 처녀에게도 거절할 권리가 있었단 말인가. 정말이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생각할수록 기가 차고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238쪽


* 연말특집


- 그가 천천히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아 어찌된 일인가 했더니 그녀는 윌리엄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불과 목덜미를 지나 가슴까지 내려왔다. 그가 눈으로 선의 뒤쪽 어딘가를 가리켰다. 돌아보니 방문이 있었다. 열린 문 안쪽으로 연분홍 시트가 깔린 침대가 보였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선은 윌리엄을 밀치며 일어났다. 언니를 흔들어 깨웠다. 깨기는커녕 언니는 코까지 골기 시작했다. 더 세게 흔들려고 하는데 윌리엄이 막았다. 그는 언니의 남자친구였다. 267쪽


* 만 보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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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만든 공간 -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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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현준, 공간이 만든 공간(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을유문화사, 2020


빅히스토리적 접근방식으로 건축의 발전사와 융합의 역사를 기술한 책이다. 거칠게 말하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의 얼굴 윤곽을 가졌고,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균,쇠"의 이목구비에서 나오는 건축적 표정이랄까. 물론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카를로 로벨리).



이 세 권의 책을 읽어 본 독자라면 저자가 이책에서 깊은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집필했겠구나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특별한 것은 동서양의 지리적, 기후적 특성이 농업과 미술과 사람들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고, 동서양의 차이점이 건축에 반영되어 각기 다른 건축적 역사를 일구어 왔다는 점, 그리고 최근의 융합 현상과 미래의 전망까지 일관된 흐름으로 꿰어 내었다는 점이다. 건축이라는 한정된 분야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을 넘어 뇌의 지도가 한껏 넓어진 느낌을 받는다.





- 전작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와 『어디서 살 것인가』는 각각 15장과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책들에서 각 장들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는 글 모음이었다. (···) 각각의 층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반면 이 책은 건물을 세로로 길게 자른 단면도라 할 수 있다. 시간이라는 투명 엘리베이터를 타고 각 층을 통과하면서 1층부터 27층 그리고 옥상까지 올라가 보는 책이다. 15쪽


- 마치 빛을 느끼기 위해서 그림자가 필요하듯, 빈 공간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물체가 필요하다. 역으로 추론해 보면, 물체가 만들어지면 동시에 빈 공간도 부산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건축 행위는 일차적으로 물체를 만드는 것이지만, 최종 목적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32쪽


- 그 빈 공간이 구축되는 형식과 모양을 보면 만든 사람의 생각과 문화를 비추어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공간을 분석하고 이해하면 사람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발생하고, 서로 다른 생각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융합되고 어떻게 생각의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는지 추리해 보는 책이다. 이 추리의 과정에서 건축의 빈 공간의 특징은 중요한 물질적 단서와 증거가 된다. 34쪽


- 강수량의 차이는 농업 품종의 차이를 만들고, 품종의 차이는 농사 방식의 차이를 만들고, 농사 방식의 차이는 가치관의 차이를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건축에서 동서양의 강수량 차이는 건축 디자인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발전시켰고, 건축 공간은 행동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서양은 밀 농사의 혼자 농사하는 방식에 따라 개인주의 성향이 커졌고, 외부와 단절된 창문 없는 벽 중심의 건축으로 바깥과 교류가 적은 성격의 공간으로 발전했다. 건축물 역시 독립된 개별적인 건축물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건축적 개인주의’가 발전했다. 반면 벼농사는 집단 농사 방식으로 사람 간의 관계가 중요한 가치였으며, 많은 강수량 때문에 사용하게 된 재료인 목재를 이용한 기둥 중심의 건축 양식은 외부 자연 환경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활양식으로 발전되었다. 80쪽


- 건축은 언제나 주변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한다. 그러면서 만들어진 ‘문화 유전자’는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주변으로 퍼져 나가고 그 지역 고유의 문화 유전자와 섞이게 된다. 15세기에 삼각돛을 단 범선의 등장으로 공간이 더 압축되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양 극단에 위치했던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유전적으로 섞이기 시작했다. 16세기 중국산 도자기가 유럽에 대량으로 수입되었고, 17세기에는 동양 철학 책들(208쪽)이 유럽에서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18세기에는 조경 디자인이 바뀌었고, 19세기에는 이 변화가 미술로 전파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는 건축에서 문화적 이종 교배의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08쪽


- 그의 건축은 한마디로 ‘나무 기둥을 철골 기둥으로, 창호지를 유리창으로’ 바꾼 건축 공간이었다. 기본 구성은 수천 년 동안 내려온 동양의 구법을 따르면서 20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철과 유리라는 재료를 적극 도입하여 새로운 문화적 변종을 만든 사람이 미스 반 데어 로에다. 239쪽


- 미스와 코르뷔지에가 신기술과 동양의 문화 유전자를 섞었다면 다음에 소개할 건축가 두 명은 콘크리트 기술 위에 동양의 문화 유전자와 서양의 기하학적 성격의 문화 유전자를 섞은 건축가들이다. 한 명은 20세기 후반 최고의 건축가로 일컬어지는 루이스 칸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안도 다다오다. 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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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아틀리에 - 과학과 예술, 두 시선의 다양한 관계 맺기
김상욱.유지원 지음 / 민음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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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욱·유지원, 뉴턴의 아틀리에, 민음사, 2020

 

물리학자 김상욱과 타이포그래퍼 유지원의 콜라보 작업을 묶은 책이다. 관계(이야기, 소통, 유머, 편지, 시), 관찰과 사색(결, 자연스러움, 죽음, 감각, 보다, 가치), 공동체(두 문명, 언어, 꿈, 이름, 평균), 수학적 사고(점, 구, 스케일), 물질(검정, 소리, 재료, 도구, 인공지능, 상전이, 복잡함)이라는 기계 속에서 하나씩 튀어나오는 복권당첨번호 확인용 공처럼 두 사람은 제시어에 대해 물리학자가 바라보는 미술을, 타이포그래퍼가 주목하는 과학에 대해 각자의 언어로 짧은 에세이를 썼다. 김상욱 교수가 쓴 “김상욱의 물리공부” “양자역학 콕 찔러보기” 그가 출연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알쓸신잡” 덕분에 그의 미술에 대한 서술이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친숙하게 느껴진다. 개별 분야의 전문가가 협업하는 방식, 각 분야의 전문가가 타 분야를 어떻게 자신을 전문 분야에 녹여내어 서술할 수 있는지에 대해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 자연스러움이 일으키는 아이러니(유지원)

 

‘자연스러움’이란 ‘자연 그대로의 상태’라기보다는 인간이 받아들이는 관념이다. (···) 인간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때, 인간 바깥에서 바라보면 인간은 다른 시각으로 보인다. 비물질이나 무생물을 제외하면, 인간의 반대 개념으로는 네 가지가 떠오른다. 우선 초월적 영역에 존재하는 ‘신’, 그리고 지구 밖에 존재하는 지능이 높거나 낮은 ‘외계 생명체’. 우리의 지구로 돌아오면 인간 아닌 ‘다른 생물들’이 있고, 마지막으로 ‘인간이 제조한 기계’가 있다.

‘기계’에 대비해서 우리는 인간에게 ‘인간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인간적’은 놀랍게도 ‘인위’보다는 ‘자연’에 가깝다. ‘다른 생물’, 특히 ‘동물’에 대비해서는 ‘인간답다’라는 표현을 쓴다. ‘인간다움’은 ‘야만’ 아닌 ‘문명적’이라는 뜻이다. 118쪽

 

- 점, 마침표는 쉼표를 낳고··· (유지원)

 

문장부호들은 지금은 한글에도 사용하지만 로마자에서 유래했다. 소문자 i의 점 모양에서 미세하게 크기를 키운 것이 마침표다. (···) 마침표는 i의 점에서 나오고, 쉼표는 마침표에서 나온다. 마침표 두 개를 위아래로 붙인 것보다 약간 길게 꼬리를 그리면 쉼표가 된다. 275쪽 (···) 쉼표를 돌려서 올리면 작은 따옴표 275쪽 가, 작은따옴표 두 개를 나란히 놓으면 큰따옴표가 된다. 워싱턴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의 카렌 쳉 교수에 따르면, 물음표는 라틴어로 ‘묻다’의 뜻인 ‘questio'에서 와서 Q와 점을 위아래로, 느낌표는 라틴어로 ’기쁨의 탄성‘이라는 뜻인 ’io'에서 와서 I와 점을 위아래로 배열한 형태이다. 276쪽

 

- 점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김상욱)

 

점은 부분이 없는 것이다. 뉴턴의 운동방정식은 미분이라는 수학으로 기술된다. ‘미분’은 말 그대로 미세하게 나눈다는 뜻이다. 부분이 없는 점에 도달하기 위해 실제 해야 할 일은 무한히 미세하게 나누는 것이다. 0은 아니지만 0에 무한히 가까이 접근하는 과정이 미분인 것이다. (···) 점은 물체가 아니라 과정이다. 점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2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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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김사인 엮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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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엮음,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문학동네, 2019

- 2017년 초부터 그해 4월말 사이에 중앙일보에 연재된 글 모음이다. 하루 한편 시를 소개하고 간단한 평을 붙였다. 신문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신동엽의 ‘산문시 1’ 같은 긴 작품은 드물다. 2017년 초를 되돌아보면 2016년 후반의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촉발된 혼란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선고(2017년 3월 10일)로 이어졌고, 북한과 미국의 지도자가 네 것보다 내 것이 더 크다는 식의 협박을 일삼았고, 세월호 선체가 마침내 인양되었다(2017년 4월 11일). 역사책 한켠에서 읽은 구한말과 해방 전후의 혼란이 떠올랐다. 몇 십 년이 지나면 이 시기도 분명히 역사책 속에 자리잡을 것이리라.

“무엇보다 그날그날의 상황에 의미 있고 생생하게 부응할 법한 목소리를 찾으려 했다. 그리고 작고 시인들의 글과 시만을 대상으로 삼기로 정했다. 우리의 시 읽기가 대체로 온고지신에 소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그 좋음에 비해 독자들에게 덜 알려져 있거나 오해된 시인과 시를 우선했고, ‘참여’를 표방했던 쪽보다는 전통 서정시 쪽을, 중심부보다 주변부, 서울보다는 지역에서 활동했던 시인들을 좀더 앞세우려했다. 익히 알려진 시인일수록 가능하면 그의 또다른 면모를 소개하려 애썼다. 부족한대로 예와 오늘, 동양과 서양에 두루 눈을 주고자 했고, 외국 시들은 기존의 번역을 참고하되 내 나름의 이해에 따라 고치거나 다시 번역했다.” 12쪽

좁은 의미의 시(詩)가 대부분이지만 시조, 편지, 일기, 민요, 대한민국 헌법전문도 있다. 서정시를 주로 소개했다는 설명이 있지만 엮은이가 말하고 싶은 세계관과 비판의식이 일차적으로 작품선택으로 이차적으로 시에 대한 단평의 형태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이 어쩌면 보수 신문의 독자를 불편케 했을 수도 있겠다.

유사한 형식으로 펴낸 저자의〈시를 어루만지다〉(도서출판 b)도 다시 읽어봐야겠다.

* 메모


- 공원, 자크 프레베르(1900-1917)
수천 년에 또 수천 년도/ 부족하리/ 우주의 한 별 지구/ 지구 위의/ 파리/ 그 파리의 몽수리 공원에서/ 겨울 햇빛 아래 어느 날 아침/ 나와 그대/ 그대와 내가 입맞춤한/ 영원의 한순간을/ 다 얘기하기엔. 66쪽

- 일본놈 일어서니, 해방기 민요

소련에 속지 말고// 미국 사람 믿지 마라// 일본놈 일어서니// 조선 사람 조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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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의 끝과 시작 - 책읽기가 지식이 되기까지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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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 책 읽기의 끝과 시작, 라티오, 2020


단어나 문장을 채집하는 것에서 그것들을 나를 비롯한 가족,

마을 구성원까지 먹을 수 있도록 요리하는 것이 서평이라 생각한다.



어떤 이는 맛있게 먹어줄 것이고, 다른 이는 맛이 없다고,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거부하기도 할 것이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허겁지겁 목구멍에

욱여 넣을 것이 아니라면 우선 나부터 간을 보고 주관적이라 해도 적어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정도의 요리를 내어 남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픈 욕망이 있다.



이 책을 그런 목표를 갖고 선택적으로 읽었다.

총 3부와 부록이 포함되어 있는데, 제1부와 2부를 꼼꼼히 읽었다.

책의 선택에서부터 저자 파악, 차례 분석, 서로 읽기, 발췌독, 조망하기,

관계적 독서, 다시 읽기의 책을 읽는 방식에서 시작해 실제적으로 서평을

작성하는 설명으로 나아가는 방식을 취한다. 이 책이 특별한 것은 이론적인

설명이나 단편적인 문단 정도의 예를 제시하는 대신 설명에 연이어 실제 저자

가 작성한 서평을 나란히 제시해 바로 그 적용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제3부에서는 '근대와 정치, 그리고 인간'이라는 주제로

철학, 사회학, 종교 등의 저작들을 개념과 역사에서 시작해 개별 논점으로 나아가는

방식의 큰 흐름에 따라 배열하고 있다. 다만 내용이 가볍지는 않아 나처럼 단지

독서의 목적이 서평의 내용과 작성에 방점을 둔 독자라면 관심 있는 주제만 골라

읽어도 될 것 같다.



다음은 저자의 인문, 역사, 철학, 문학 고전 강의 책으로 넘어갈 생각이다.







-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에 제시된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전체를 눈으로 살펴보기만 해도 괜찮다. 그렇지만 저자가 쓴 서문과 서론은 반드시 읽어 두어야 한다. (···) 번역본의 경우에는 옮긴이의 후기나 서문도 반드시 읽고 따로 정리를 해 두는 것이 좋다. 차례와 대조해 가면서 서론을 읽는 것은 책읽기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32쪽

- 서평은 ‘책에 대한 평가’이다. 평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책에 관한 서술이 전제되어야 하므로 엄밀하게는 ‘책에 관한 서술과 평가’를 말한다.

먼저 책에 관한 서술이 있어야 한다. (···) 정리를 위해서는 문단 단위로 요약할 것이 요구되며, 요약을 마친 다음에는 한 문장으로 전체의 내용을 집약해야만 한다. 서평 작성은 이 요약이 거의 전부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해제’라고도 한다.


초급자는 책 한 권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기에 핵심이라 할 만한 하나의 장(章)을 요약하는 것부터 시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것이 초급 서평이다. ‘나는 이 책을 읽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의 핵심은 여기에 담겨 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 부분을 요약 정리하고 그것에 대한 내 생각이나 평가를 간략하게 덧붙인다.’ 이런 식으로 작성한 것이 초급 서평인 것이다. 78쪽


중급 서평의 첫 단계는 책 한 권을 대상으로 한다. 이는 책 전체의 내용을 재구성하여 서술하고 그것에 대한 평가를 덧붙인 것이다. 중급 서평의 둘째 단계는 비판적 평가를 덧붙인 것이다. ‘비판’을 위해서는 사실상 해당 책의 내용을 벗어날 것이 요구되므로 이 단계에 이른 서평은 고급 서평의 초입에 들어선 것이라 할 수 있다. 고급 서평은 한 저자의 여러 책을 대상으로 하거나 하나의 주제에 관한 여러 책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이는 ‘주제 서평’이라 부를 수 있다.

고급 서평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저자나 책의 배경에 관한 설명, 주제가 가지는 연구사적 또는 당대적 의의 등이 함꼐 검토되어야만 하므로 해당 영역에 관한 집중적이면서도 포괄적인 지식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작성한 서평은 논문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논문은 여러 책을 참조하여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논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78쪽



- 서평을 쓰고자 할 때 어떤 형식을 갖추어 쓸지는 글을 쓰는 이의 뜻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일정한 형식에 따라 쓴다면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서평에 담을 수 있다. 서평은 물론이고 보고서나 정보를 알리는 글을 쓰고자 할 때에도 활용할 수 있는 적절한 형식은 다섯 단락으로 쓰는 것이다.

책을 읽은 후 자신이 서평으로 쓰고자 하는 바를 세 문장으로 정리한다. 이때 세 문장 안에 책 내용 전체를 담으려 해서는 안 된다. (···) 정리된 세 문장은 가장 넓은 범위에서 차례로 좁은 범위로 좁혀지게 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만들어진 세 문장을 첫 단락에 적는다. 그런 다음, 둘째 단락에는 첫 문장의 내용을, 쳇째 단락에는 둘째 문장의 내용을, 넷째 단락에는 셋째 문장의 내용을 설명하여 적는다. 79쪽 (···) 마지막 다섯째 단락은 첫째 단락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같은 분량으로 세 문장으로 쓰는 것이 좋다. 첫 문장은 자신이 앞에 쓴 내용 전체를 집약한다. 이는 첫째 단락에 세 문장으로 적은 것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는 것이다. 둘째 문장은 책을 읽으면서 가지게 된 생각이나 저자의 주장에 대한 자신의 반대 의견 등을, 마지막 문장은 이 책을 읽은 다음에 어떤 주제로 확장된 읽기를 할 것인지, 남은 문제는 무엇인지 등을 적는다.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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