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
김미월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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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월 소설집,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 문학동네, 2019




​소설의 대세는 계속해서 젠더이슈에 관한 작품들이다. 여성 작가들의 페미니즘, 남성 작가들의 퀴어. 성별이나 성 정체성에 관한 차별이 사라질 떄까지 소설가의 말과 작품은 끊어져서는 안 된다.
한편, 김미월의 소설은 첫 작품집부터 최근까지도 여전히 세대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는 것 같다.
20대의 여성으로서 작가가 20대의 주제인 젊음과 사랑, 취업, 결혼으로 이어지는 세계 이전 작품들에서 그려냈다면 이번 작품집은 30대의 독신 여성으로서의 삶의 채취가 짙다. 물론 그 속에는 여성으로서 한국사회에서 느끼는 감정이 담겨 있는, 페미니즘적 시각이 담긴 작품도 있다('선생님, 저예요' '연말특집')



20대인 작가는 30대가 되었으므로 자연히 30대의 삶에 대해 생각하면서 작가 자신과 소설 속 화자 간의 거리가 너무 멀지 않은 세계를 그려낸다. 30대의 삶은 10대나 20대의 삶과 섬처럼 분리된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다리로 연결된 연속적 세계이므로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를 되돌아보고 내다볼 수 밖에 없는 시기다. 작가나 소설 속 인물만이 아닌 그 시기를 거쳤거나 헤쳐나갈 사람들의 기억과 예상의 감각을 자극하면서 이 소설들은 묘한 쾌감을 준다.



사랑과 죄책감, 자존감에 대한 성찰을 원한다면 당장 이 책을 펼쳐야 한다. '아무도 펼쳐 보지 않는 책'이라면 당신이 최초로 열어보아야 할 때다.





* 가장 아름다운 마을까지 세 시간


- 이튿날이 귀국일이었다. 그녀는 공항으로 가는 길 지하철역에서 즉석사진 부스를 보았다. 새해를 맞아 서른아홉 살이 된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평소 피사체의 진짜 모습에 가장 가깝다고 믿어온 전형적인 지하철역표 증명사진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있는데 새삼 자신이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곁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인파 속에 그녀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겠지. 계속 혼자겠지. 혼자 아무도 모르게 늙어가겠지. 27쪽


- 양희는 아까보다 더 빨리 대답했다. 사진이야 지금 이 자리에서 휴대폰으로 찍어도 될 텐데 노인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시 이어진 침묵 속에서 나는 양희희 가방에 있는 사진을 떠올렸다. 양희가 그것을 노인에게 준다면 어떨까. 두 사람은 어떤 대화를 나눌까.

이게 저예요./ 그래./ 이 사진을 찍고 나서 문득 깨달았어요, 제가 혼자라는 것을요./ 그랬구나./ 앞으로도 혼자일 거라는 생각을 하니 막막했어요./ 그래./ 내일이 시험이고 공부는 하나도 안했는데 벌써 밤이 된 것처럼 말이에요./ 그랬구나./ 그래서 이렇게 온 거예요. 아버지도 저처럼 혼자인지 알고 싶어서요./ ······ 33쪽


*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 그러니까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내일 죽는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죽기 전까지 매 순간 모든 생각 모든 행동이 부질없어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직 살아 있는데도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게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55쪽


*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


- 어쨌거나 담임선생의 중재로, 만약 그런 것도 중재라고 할 수 있다면, 친구는 상장을 가졌고 남자는 크레파스를 가졌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 안 있어 중학교에 입학했고 다시 얼마 안 있어 친구는 죽었다.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물론 남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서랍 속의 크레파스를 볼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그것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쓰레기통에 버리지도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스스로 그것을 보면서 매번 죄책감을 느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90쪽


-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졌다가 새카매졌다가 알 수 없는 색으로 덧칠되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일인칭으로 쓸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97쪽) 오래전 마주앉은 여자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날처럼 그는 이번에도 삼인칭을 택해야 할 것이었다.

그는······ 어쩌면 그는······ 하고 말이다. 98쪽



* 2월 29일



- 그가 벽에 걸린 달력을 가리켰다. 아, 하고 나는 입을 벌렸다.

2월 29일이었다. 사 년에 한 번씩 윤년에만 찾아오는, 평년에는 2월 28일 밤과 3월 1일 새벽 사이에 슬그머니 사라져버리는. 오늘이 그날이었나. 등줄기가 서늘했다.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특별하고 유일하며 절대적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나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119쪽


* 오늘의 운세


- 아, 정말이었다. 이윽고 세 종류의 알람 소리를 넘어, 먼 곳에서 희미하게 다른 알람 소리가, 곧이어 또다른 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점점 더 크게 열렸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수십 개의 알람이 동시에 울리고 있었다. 어쩌면 수백 개, 수천수만 개일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아침이란 알람의 시간이었다. 누군가가 끄지 않는다면 영원히 울릴지도 모르는 세상 모든 알람들의 시간. 154쪽


* 질문들


* 선생님, 저예요



* 도망가지 않아요



-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는데(237쪽) 그게 실패할 수도 있나. 그러니까 베트남 처녀에게도 거절할 권리가 있었단 말인가. 정말이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생각할수록 기가 차고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238쪽


* 연말특집


- 그가 천천히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아 어찌된 일인가 했더니 그녀는 윌리엄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불과 목덜미를 지나 가슴까지 내려왔다. 그가 눈으로 선의 뒤쪽 어딘가를 가리켰다. 돌아보니 방문이 있었다. 열린 문 안쪽으로 연분홍 시트가 깔린 침대가 보였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선은 윌리엄을 밀치며 일어났다. 언니를 흔들어 깨웠다. 깨기는커녕 언니는 코까지 골기 시작했다. 더 세게 흔들려고 하는데 윌리엄이 막았다. 그는 언니의 남자친구였다. 267쪽


* 만 보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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