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만든 공간 -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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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현준, 공간이 만든 공간(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을유문화사, 2020


빅히스토리적 접근방식으로 건축의 발전사와 융합의 역사를 기술한 책이다. 거칠게 말하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의 얼굴 윤곽을 가졌고,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균,쇠"의 이목구비에서 나오는 건축적 표정이랄까. 물론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카를로 로벨리).



이 세 권의 책을 읽어 본 독자라면 저자가 이책에서 깊은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집필했겠구나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특별한 것은 동서양의 지리적, 기후적 특성이 농업과 미술과 사람들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고, 동서양의 차이점이 건축에 반영되어 각기 다른 건축적 역사를 일구어 왔다는 점, 그리고 최근의 융합 현상과 미래의 전망까지 일관된 흐름으로 꿰어 내었다는 점이다. 건축이라는 한정된 분야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을 넘어 뇌의 지도가 한껏 넓어진 느낌을 받는다.





- 전작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와 『어디서 살 것인가』는 각각 15장과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책들에서 각 장들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는 글 모음이었다. (···) 각각의 층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반면 이 책은 건물을 세로로 길게 자른 단면도라 할 수 있다. 시간이라는 투명 엘리베이터를 타고 각 층을 통과하면서 1층부터 27층 그리고 옥상까지 올라가 보는 책이다. 15쪽


- 마치 빛을 느끼기 위해서 그림자가 필요하듯, 빈 공간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물체가 필요하다. 역으로 추론해 보면, 물체가 만들어지면 동시에 빈 공간도 부산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건축 행위는 일차적으로 물체를 만드는 것이지만, 최종 목적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32쪽


- 그 빈 공간이 구축되는 형식과 모양을 보면 만든 사람의 생각과 문화를 비추어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공간을 분석하고 이해하면 사람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발생하고, 서로 다른 생각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융합되고 어떻게 생각의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는지 추리해 보는 책이다. 이 추리의 과정에서 건축의 빈 공간의 특징은 중요한 물질적 단서와 증거가 된다. 34쪽


- 강수량의 차이는 농업 품종의 차이를 만들고, 품종의 차이는 농사 방식의 차이를 만들고, 농사 방식의 차이는 가치관의 차이를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건축에서 동서양의 강수량 차이는 건축 디자인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발전시켰고, 건축 공간은 행동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서양은 밀 농사의 혼자 농사하는 방식에 따라 개인주의 성향이 커졌고, 외부와 단절된 창문 없는 벽 중심의 건축으로 바깥과 교류가 적은 성격의 공간으로 발전했다. 건축물 역시 독립된 개별적인 건축물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건축적 개인주의’가 발전했다. 반면 벼농사는 집단 농사 방식으로 사람 간의 관계가 중요한 가치였으며, 많은 강수량 때문에 사용하게 된 재료인 목재를 이용한 기둥 중심의 건축 양식은 외부 자연 환경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활양식으로 발전되었다. 80쪽


- 건축은 언제나 주변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한다. 그러면서 만들어진 ‘문화 유전자’는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주변으로 퍼져 나가고 그 지역 고유의 문화 유전자와 섞이게 된다. 15세기에 삼각돛을 단 범선의 등장으로 공간이 더 압축되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양 극단에 위치했던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유전적으로 섞이기 시작했다. 16세기 중국산 도자기가 유럽에 대량으로 수입되었고, 17세기에는 동양 철학 책들(208쪽)이 유럽에서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18세기에는 조경 디자인이 바뀌었고, 19세기에는 이 변화가 미술로 전파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는 건축에서 문화적 이종 교배의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08쪽


- 그의 건축은 한마디로 ‘나무 기둥을 철골 기둥으로, 창호지를 유리창으로’ 바꾼 건축 공간이었다. 기본 구성은 수천 년 동안 내려온 동양의 구법을 따르면서 20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철과 유리라는 재료를 적극 도입하여 새로운 문화적 변종을 만든 사람이 미스 반 데어 로에다. 239쪽


- 미스와 코르뷔지에가 신기술과 동양의 문화 유전자를 섞었다면 다음에 소개할 건축가 두 명은 콘크리트 기술 위에 동양의 문화 유전자와 서양의 기하학적 성격의 문화 유전자를 섞은 건축가들이다. 한 명은 20세기 후반 최고의 건축가로 일컬어지는 루이스 칸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안도 다다오다. 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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