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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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라면을 끓이며, 문학동네




1. 어제 저녁 라면을 먹었다. 물을 약 550ml 넣고 끓인다. 막 연기가 날 때쯤 스프를 넣는다. 스프나 건더기를 넣고 물을 끓이면 끓는점이 낮아진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다. 곧 내가 배가 무지 고프다는 말이다. 면을 넣고 계란을 넣는다. 계란은 국물에 퍼지지 않고 온전하게 모양을 유지하도록 주의한다. 나의 라면 조리법이다. 한창 운동을 열심히 할 땐 라면을 쳐다보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한 끼 때우려고 먹는다. 밥을 때우려고 먹는 라면은 밥이 아니기에 나는 밥과 꼭 같이 먹는다.





2. 2015년 하반기에 나온 소설가 김훈의 산문집, 이미 많은 분들이 읽었다. 알라딘에서 공격적 마케팅이 화제가 된 바로 그 ‘상품’이다. 쿡방과 쿡북의 유행은 올해도 계속되고 있다. 짐작건대 이 책의 편집자나 최근에 출간된 황석영의 ‘밥도둑’도 이런 행렬에 합류했다. 오래전에 출간된 책에 최근의 글을 보태어 리모델링을 보기 좋게 했다. 저자는 일러두기에서 “이 책의 출간으로 앞에 적은 세 권의 책과 거기에 남은 글들을 모두 버린다.”고 했지만 몇몇 글은 한옥에 살던 시골사람이 도심 아파트촌으로 이사해온 것처럼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던지고 받아치면서 삶과 죽음의 보편성 속에서 생명의 개별성과 존재이유를 기어코 찾아내고자 전진하는 특유의 문체는 변함없었다.





- 젊은이들이 다들 도시로 떠나고 섬에는 노인들만 남아 있다. 아기가 없는 섬에 유모차가 많다. 대처의 젊은 부부들은 아이가 걷기 시작하면 유모차를 버린다. 노인들은 젊은 부부들이 쓰다 버린 유모차를 섬으로 가져와서 걸음걸이할 때 의지로 삼는다. 밭일 나갈 때, 바지락 캐러 갈 때, 이웃에 마실 갈 때, 누가 온다고 기별이 와서 선착장에 마중 나갈 때, 노인들은 이 유모차에 기대어 조심조심 걸어간다. 집집마다 마당에 유모차들이 놓여 있다. 노인들은 갯벌 가장자리에 유모차를 세워놓고 뻘 안으로 들어가서 바지락을 캔다. ...... 손자가 자라서 유모차를 졸업하자 손자의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노인도 있었다. 허리가 굽은 노인은 남성보다 여성 쪽이 훨씬 더 많다. 여자들은 생리, 출산, 하혈, 수유, 눈물로 피와 육즙을 모두 빨려서 그렇게 꼬부라진 것이라고, 젊어서 마누라 속 많이 썩인 늙은 어부가 말해주었다. 어부의 말은 의학적으로 타당하게 들렸다. 68쪽




- 세월호는 이 모든 원리와 인류의 축적된 경험을 거꾸로 했다. 그러니 어찌 살기를 바라겠는가. 갑판에 과적을 함으로써 무게중심을 위로 끌어올렸고, 배 밑창의 평형수를 빼버려서 배의 중심을 허깨비로 만들었다. 이것이 침몰의 원인인가. 이것은 원인이라기보다는 침몰 그 자체다. 이것이 침몰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배가 뒤집히니까 가라앉았다는 말과 같다. 이것은 동어반복이다. 163쪽





- 돈이 정치적 채널을 따라서 밀실로 들어갈 때는 이처럼 우아하고 세련된 외양을 갖춘다. 그 돈이 대통령의 직무와 관련이 있다는 혐의는 없다. 이 세련성이 직무 관련성을 제거한다. 그래서 직무와 관련이 없이 먹었다는 모든 떡값이 이 나라에서는 무죄로 통한다. 떡값이란 말은 돈의 모든 속성을 요약정리한 듯하다. 떡값은 직무와 관련이 없을 경우라 하더라도 반드시 직위와는 관련이 있다. 직무는 기능이며 직위는 신분이다. 직무는 용(用)이고 직위는 체(體)인 것이다. 190쪽



- 여자들의 젖가슴이란 그 주인인 각자의 것이고 그 애인의 것이기도 하지만, 신라금관이나 고려청자나 백제 금동향로보다 더 소중한 겨레의 보물이며 자랑거리다. 여자들은 누구나 다 한 쌍의 젖가슴을 키워내고 품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이 젖가슴은 더욱 보편적이고 소중한 일상의 보물이며, 민족적 생명과 에너지의 근본인 것이다. 희소가치가 없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다는 말이다. 더구나 그 속에 살아 있는 생명의 피가 흐르고 젖샘 꽈리에 젖이 고인다고 하니, 죽은 쇠붙이에 불과한 신라왕관과는 비교할 수 없다. 거리마다, 공원마다, 지하철마다 넘쳐나는 이 생명의 국보들은 새로운 삶을 향한 충동으로 우리를 설레게 하고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게 해준다. 244쪽




- 내 생각은 이렇다. 여자 젖가슴의 모든 고난은 직립보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네발로 기어다니는 포유류들의 젖은 아래로 늘어져서 편안하다. 이것이 무릇 모든 젖의 자연일 것이다.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이후로, 여자들의 젖가슴은 어쩔 수 없이 전방을 향하게 됐다. 가엾은 일이다. 크고 무겁고 밀도가 높고 팽팽하고 늘어지지 않은 가슴만이 아름답다고, 남자나 여자나 모든 그렇게 세뇌돼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크고 무거운 것들은 아래로 늘어지게 돼 있다. 늘어지려는 것을 자꾸만 끌어올리니까 부작용이 생긴다. 생명이나 자연은 인간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이미 스스로 본래 그러한 것처럼 아름답고 편안하다. 그러니 가슴이 좀 늘어지기로 무슨 걱정할 일이 있겠는가. 245-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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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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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소설전집, 무진기행, 문학동네, 개정판 2004

 

서평2) 무진(霧津)과 밀양(密陽)

 

우연히 김승옥의 ‘무진(霧津)기행’과 영화 ‘밀양(密陽)’을 짧은 시차를 두고 보았다. 무진의 ‘뿌연 안개’와 밀양의 ‘은밀한 빛(영제가 secret sunshine)’ 상반되는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본질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 장애다. 안개는 흐림으로 빛은 눈부심으로 속 것을 감춘다. 무진기행의 주인공 윤희중은 부잣집 이혼녀와 결혼해서 임원의 지위에 오르기 전 고향인 무진을 홀로 방문했다. 영화의 주인공 신애(전도연)는 바람나서 처자식을 버린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아들의 이름을 딴 ‘준 피아노’학원을 차렸다. 희중은 우연히 음악선생 하인숙을, 신애는 키다리 아저씨처럼 자신을 살뜰히 챙기는 김사장(송강호)를 만났다. 희중은 자신을 닮은 인숙을 사랑한다는 편지를 썼다가 찢어버리고 무진을 떠나면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신애는 납치 유괴사건으로 아들을 잃고, 신에 귀의하지만 ‘용서’의 의미를 뒤늦게 깨닫고 신을 버리고 자신을 잃어간다. 짧은 휴가와 전 남편 고향에의 귀향은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산산히 빛으로 흩어진다. ‘나’를 잃은 비극의 극복은 시간이 가도, 장소를 옮겨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두 작품 모두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게 인생이라는 것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무진에도 밀양에도 해답은 없다. 정답없는 물음의 답을 찾지 않고 새로운 물음을 찾아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겠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 나는 무진으로 오는 버스칸에서 수면제를 만들어 팔겠다는 공상을 한 것이 생각났다. 햇빛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충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 가지를 합성하여 수면제를 만들 수 있다면······ 그러나 사실 그 수면제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게 아닐까. 183쪽

 

- 주인들은 나를 옛날의 나로 대해주었고 그러자 나는 옛날의 내가 되었다. 나는 가지고 온 선물을 내놓았고 그 집 주인 부부는 내가 들어 있던 방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었다. 나는 그 방에서 여자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군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주었다. 그 여자는 처녀가 아니었다. 우리는 다시 방문을 열고 물결이 다시 거센 바다를 내려다보며 오랫동안 말없이 누워 있었다. “서울에 가고 싶어요. 단지 그거뿐예요.” 한참 후에 여자가 말했다. 190쪽

 

- 아내의 전보가 무진에 와서 내가 한 모든 행동과 사고를 내게 점점 명료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 모든 것이 선입관 때문이었다. 결국 아내의 전보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아내의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그러나 나는 돌아서서 전보의 눈을 피하여 편지를 썼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쓰고 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어봤다. 또 한번 읽어봤다. 그리고 찢어버렸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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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전명진 글.사진 / 북클라우드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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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전명진 여행에세이, 북클라우드, 2015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나폴리의 한 가게에 부랑자가 들어와 “Cafe sospeso, Per favore." 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리스타는 갓 내린 커피 한 잔을 내민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몇몇 까페에서 운영하고 있는 서스펜디드 커피의 기원이다. 손님들은 평소 커피를 마실 때 미리 커피 값을 더 지불하고, 돈이 없는 사람들이 커피를 무료로 마실 수 있게 하는 개념이다. 또한 누구나 부담 없이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카페들은 담합 아닌 담합을 했다. 테이블 자리에 앉지 않고, 바에 서서 먹는 커피의 가격은 이탈리아 전역 어디에서나 2유로를 넘지 않는다. 그들에게 커피는 돈으로 가치를 매기는 개념이 아니다. 부랑자든 우주인이든 모두가 함께 누려야 할 문화인 것이다. 83쪽

 

- 아직 서른, 총각입니다. 아 서른이에요? 허허 희한하네. 왜 그러시나요? 서른이라 하기에는 스무 살처럼 맑고, 또 마흔 살처럼 깊어 보여서요. 145쪽

 

- 사진에서 조리개는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빛을 얼마나 받아들일지 정해주는 장치이다. 조리개 값을 낮출수록 활짝 열려서 렌즈를 투과한 빛이 많이 들어와 필름에 맺히고, 심도가 옅어진다. 흔히 아웃포커스라 부르는 것. 156쪽

조리개 값이 낮은 경우 초점을 맞춘 대상 외에는 흐려지고, 조리개 값을 높이면 가까운 대상에서 멀리 있는 대상에까지 고루 초점이 맞는다. 일반적으로 주제를 부각하기 위해 아웃포커스를 많이 활용하지만 실제로 대상을 부각하는 데에 빛과 구도만을 이용하여 촬영하는 작가들이 많다.

 

- 저희와 가까운 탁현민 교수님이 〈여행수다〉에서 나와 한동안의 제주살이를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 서쪽을 향해 가다 보면 애월읍에서 한림읍으로 넘어가는 길이 얼마나 멋진지를 설명해주셨지요. 평범한 도로를 달리다 어느 내리마을 벗어나 커브를 도는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제주의 바다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겁니다. 재미있게도 제주를 자주 다녔던 저와 탁피디님은 함께 그곳을 지나가본 적이 없음에도 모두 똑같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그곳을 ‘감정변경선’이라고 부른다 했습니다. 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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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다 - 생각하는 동화 6
정채봉 지음, 김복태 그림 / 샘터사 /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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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너다 37쪽-48쪽

 

망나니 호랑이가 산속을 으스대고 다녔다. 그러다가 골짜기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올라가서 ‘어흥!’하고 소리를 한번 질러보았다. 그러자 메아리가 ‘어흥!’하고 돌아왔다. 망나니 호랑이는 약이 올랐다. ‘감히 나를 보고 어흥 하고 맞대결을 하겠다는 녀석이 있다니.’ 망아니 호랑이는 더 크게 소리질렀다. “너는 누구냐? 어흥!” 저쪽 또한 지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어흥!” “감히 날 약올리다니!” “감히 날 약올리다니!” “이놈 너를 잡아먹어야겠다!” “이놈 너를 잡아먹어야겠다!” 망나니 호랑이는 더럭 겁이 났다. 저쪽에서 정말로 쫒아나올까 봐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서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줄행랑을 쳤다. 이 소문이 산속에 쫙 퍼지자 꾀꼬리 새끼가 벌벌 떨며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 우리 산 속에 망나니 호랑이를 잡아먹겠다는 무서운 친구가 산대요.” 엄마 꾀꼬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라. 너의 정다운 친구가 살고 있단다.” 새끼 꾀꼬리는 골짜기의 바위 위로 날아가 소리를 보내보았다. “꾀꼴.” “꾀꼴.” 새끼 꾀꼬리는 마음이 놓였다. “반갑다 얘. 꾀꼴.” “반갑다 얘. 꾀꼴.” “함께 노래하자. 꾀꼴 꾀꼴 꾀꼴.” “함께 노래하자. 꾀꼴 꾀꼴 꾀꼴.”

 


 

사랑의 엽서, 또 한번 감네

 

그대만을 생각하기 위해

감은 눈을

또 한번 감네

한번

감네

그대만이 남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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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미치다
김동원 지음 / 만인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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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 시에 미치다, 만인사, 2014

 

1. 김동원 시인이 인터넷까페 ‘텃밭시인학교’에 연재한 글과, 에세이집 '시, 낭송의 옷을 입다'에 수록된 내용을 수정, 보완한 책이다. 


'시에 미치다'. 제목이 한 줄의 시다. '미치다'는 광(狂) 이 아닌 도(道 , 到)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그를 시에 다다르게 했을까, 무엇이 그 길에 이르게 했을까. 손을 뻗어 쥔 것은 "허공 한줌"이 아니었을까. 


2. 시에 관한 일반론부터, 나의 애송시까지, 시인의 시심을 불러일으켜 그것이 형상화되고 응축되어 시가 탄생하는 과정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해주는 책이랄까. 무엇보다 책 속에 담긴 많은 명시들이 있다.



- 좋은 시의 요건(미당문학상 심사기준)

“대상에 대한 예사롭지 않은 발견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 응결 혹은 형상화의 미학이 돋보여야 한다. 가독성과 흡인력이 높은 작품이어야 한다. 그리고 독자의 나태한 일상을 흔들고 긴장하게 만드는 힘(낯설게 하기)”

 

- 송재학, 공중, 전문, 09년 문학동네 겨울호에 발표되어 2010년 계간지 문학사상이 주관한 제25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

 

허공이라 생각했다 색이 없다고 믿었다 빈 곳에서 온 곤줄박이 한 마리 창가에 와서 앉았다 할딱거리고 있다 비 젖어 바들바들 떨고 있다 내 손바닥에 올려 놓으니 허공이라 가끔 연약하구나 회색 깃털과 더불어 뒷목과 배는 갈색이다 검은 부리와 흰 뺨의 영혼이다 공중에서 묻혀온, 공중이 묻혀준 색깔이라 생각했다. 깃털의 문양이 보호색이니까 그건 허공의 입김이라 생각했다. 박새는 갈필을 따라 날아다니다가 내 창가에서 허공의 날숨을 내고 있다 허공의 색을 찾아보려면 새의 숫자를 셈하면 되겠다 허공은 아마도 추상파의 쥐수염 붓을 가졌을 것이다 일몰 무렵 평사낙인의 발묵이 번진다 짐작하자면 공중의 소리 일가(一家)들은 모든 새의 울음에 나누어 서식하고 있을 게다 공중이 텅 비어 보이는 것도 색 일가(一家)들이 모든 새의 깃털로 바빴기 때문이다 희고 바래긴 했지만 낮달도 선염법(渲染法)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공중이 비워지면서 허공을 실천중이라면, 허공에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들이 있다 바람결 따라 허공 한 줌 움켜쥐자 내 손바닥을 칠갑하는 색깔들, 오늘 공중의 안감을 보고 만졌다 공중의 문명이란 곤줄박이의 개체수이다 새점을 배워야겠다

 

: 이 시의 관전 포인트는 허공(虛空)과 공중(空中)이란 시어가 갈마들며 풍기는 기막힌 늬앙스이다. ‘허공의 입김’ '허공의 날숨‘에서 그 예를 확인할 수 있듯, 허공이 만질 수 없는 추상어에 가깝다면 공중은 “공중에서 묻혀온, 공중이 묻혀준 색깔”, “공중의 소리 일가”등에서도 짐작되듯, 촉각과 청각으로 느낄 수 있는 구상어에 근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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