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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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소설전집, 무진기행, 문학동네, 개정판 2004

 

서평2) 무진(霧津)과 밀양(密陽)

 

우연히 김승옥의 ‘무진(霧津)기행’과 영화 ‘밀양(密陽)’을 짧은 시차를 두고 보았다. 무진의 ‘뿌연 안개’와 밀양의 ‘은밀한 빛(영제가 secret sunshine)’ 상반되는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본질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 장애다. 안개는 흐림으로 빛은 눈부심으로 속 것을 감춘다. 무진기행의 주인공 윤희중은 부잣집 이혼녀와 결혼해서 임원의 지위에 오르기 전 고향인 무진을 홀로 방문했다. 영화의 주인공 신애(전도연)는 바람나서 처자식을 버린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아들의 이름을 딴 ‘준 피아노’학원을 차렸다. 희중은 우연히 음악선생 하인숙을, 신애는 키다리 아저씨처럼 자신을 살뜰히 챙기는 김사장(송강호)를 만났다. 희중은 자신을 닮은 인숙을 사랑한다는 편지를 썼다가 찢어버리고 무진을 떠나면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신애는 납치 유괴사건으로 아들을 잃고, 신에 귀의하지만 ‘용서’의 의미를 뒤늦게 깨닫고 신을 버리고 자신을 잃어간다. 짧은 휴가와 전 남편 고향에의 귀향은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산산히 빛으로 흩어진다. ‘나’를 잃은 비극의 극복은 시간이 가도, 장소를 옮겨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두 작품 모두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게 인생이라는 것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무진에도 밀양에도 해답은 없다. 정답없는 물음의 답을 찾지 않고 새로운 물음을 찾아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겠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 나는 무진으로 오는 버스칸에서 수면제를 만들어 팔겠다는 공상을 한 것이 생각났다. 햇빛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충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 가지를 합성하여 수면제를 만들 수 있다면······ 그러나 사실 그 수면제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게 아닐까. 183쪽

 

- 주인들은 나를 옛날의 나로 대해주었고 그러자 나는 옛날의 내가 되었다. 나는 가지고 온 선물을 내놓았고 그 집 주인 부부는 내가 들어 있던 방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었다. 나는 그 방에서 여자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군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주었다. 그 여자는 처녀가 아니었다. 우리는 다시 방문을 열고 물결이 다시 거센 바다를 내려다보며 오랫동안 말없이 누워 있었다. “서울에 가고 싶어요. 단지 그거뿐예요.” 한참 후에 여자가 말했다. 190쪽

 

- 아내의 전보가 무진에 와서 내가 한 모든 행동과 사고를 내게 점점 명료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 모든 것이 선입관 때문이었다. 결국 아내의 전보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아내의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그러나 나는 돌아서서 전보의 눈을 피하여 편지를 썼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쓰고 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어봤다. 또 한번 읽어봤다. 그리고 찢어버렸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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