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불복종 - 야생사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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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빗 소로우, 강승영 옮김, 은행나무


1. 저항권의 행동방식이 ‘작위’라면 ‘불복종’의 방식은 ‘부작위’다. 일제강점기와 독재시절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가치회복을 위해 폭력적인 방법으로 저항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수많은 피와 땀으로 이룬 독립, 민주주의 국가에서 저항과 불복종의 대상은 외부가 아닌 국가내부의 자본권력과 이를 중심으로 뭉쳐진 거대한 세력으로 옮겨 가고 있다. 정의와 법적안정성,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국민으로서의 의무, 개인의 양심과 사회적 책무 사이에 발생하는 충돌은 소로우가 살던 시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소로우는 멕시코 전쟁과 흑인 노예제도에 반대하며 인두세 납부거부를 이유로 구금되었었다. 비정규직 양산을 반대하며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시위에서 집시법 위반으로 연행된 노동자들, 극심한 종교 및 인종갈등으로 터전을 떠내 국경을 넘는 난민들이 있다.


 스피노자는 ‘내일 세계에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고 했다. 지상의 포식자들이 열매를 맺기 전에 과육을 파먹고, 바람에 흔들려 후루루 떨어지더라도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 누군가의 뱃속을 통과한 사과씨는 새로운 사과나무로 성장할 것이고, 누군가는 땅에 떨어진 설익은 사과를 주워 허기를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 메모


- - 시민의 불복종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나의 유일한 책무는, 어떤 때이고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일이다. 단체에는 양심이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양심적인 사람들이 모인 단체는 양심을 가진 단체다. 법이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정의로운 인간으로 만든 적은 없다. 오히려 법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조차도 매일매일 불의의 하수인이 되고 있다. 21쪽



우리는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대중은 아직도 멀었다고 한다. 그러나 발전이 느린 진짜 이유는 그 소수마저도 다수의 대중보다 실질적으로 더 현명하거나 더 훌륭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처럼 선하게 되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니다. 그보다는 단 몇 사람이라도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이 어디엔가 있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전체를 발효시킬 효모이기 때문이다. 28-89쪽



- 이와 같이 정부는 한 인간의 지성이나 양심을 상대하려는 의도는 결코 보이지 않고 오직 그의 육체, 그의 감각만을 상대하려고 한다. 정부는 뛰어난 지능이나 정직성으로 무장하지 않고 강력한 물리적 힘으로 무장하고 있다.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보도록 하자. 50-51쪽



-- 돼지 잡아들이기

돼지가 가는 길 앞에 담이 하나 있다. 그러나 그 담은 사람이 길을 막고 있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돼지 자신이 그쪽으로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사람보다 더 우월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79쪽

-- 가을의 빛깔들

10월은 채색된 잎의 달이다. 잎들이 화려하게 타오르면서 그 불빛이 온 세상을 비춘다. 과일과 잎사귀 들, 또 하루 자체마저도 저물기 직전에 보다 선명한 빛을 발한다. 저물어가는 한 해도 마찬가지다. 10월은 한 해의 저녁노을이며 11월은 그 이후의 땅거미라고 할 수 있으리라. 94-95쪽



-- 야생사과


솔로모은 "사과나무가 숲의 나무들 사이에 있듯 내 사랑하는 자는 아들들 사이에 있도다." 하고 말한다. 또 “포도주 병으로 내 목을 축이고 사과로 나를 위로하라.”고 하기도 한다. 사람의 가장 고귀한 부위에서 또 가장 고귀한 부분인 눈동자는 이 과일로부터 이름을 따서 ‘눈의 사과’라고 부른다. 149



- 너그러운 사과나무는 이제는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게 된 소들로 하여금 자신의 그늘 밑에서 들어와 쉬도록 허용한다. 소들이 나무 밑동에 몸을 비벼대 껍질이 벗겨지더라도 그것을 허용할 수 있을 만큼 나무는 성장했다. 소들이 사과를 따먹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씨를 널리 퍼뜨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들은 자신이 쉴 그늘과 먹을 것을 스스로 마련한 격이 되며, 사과나무는 이를테면 모래시계를 뒤집어놓고는 또 한 번의 삶을 살게 된다.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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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여행법 - 소설을 사랑하기에 그곳으로 떠나다
함정임 글.사진 / 예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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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쓰지 않기로 한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쓴다. 보지 않은 것을 상상에만 의존해서 쓰면 진실함이 잘 묻어나오지 않는다. 문학작품에서 허용되는 차원을 넘는 객관적 사실 차원에서 치명적 오류를 범할 우려도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다르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피부로 느낄 수 있고 손에 쥘 수도 있다. 체감자가 처한 시공간의 상황에 따라 바람은 시원할 때도 아플 때도 있다. 슬픔, 희망, 사랑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적거나 나이에 비해 직접 체험이 적은 경우에는 그럼 어떡해야 하나. 우선 다독을 통해 간접체험의 힘으로 버텨야 한다. '읽히는' 대상은 책일수도, 그림이나 사진일수도, 사람일수도 있다. 최대한 그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직접체험과 '읽은' 간접체험으로 부족함을 느낀다. 마지막 단계가 남았다. '상상하기'. 스쳐지나갔거나 오랜 시간으로 기억이 흐릿해졌지만 문득 책을 읽다가 불현듯 어떤 사람이나 단어가 떠오를 때가 있다. '잔상'이 상상을 낳고 상상은 잔상을 구체화 한다.


2. 쓸데없어 보이는 소리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이유는 이 책 소설가 함정임의 여행 에세이 '소설가의 여행법'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폴오스터의 뉴욕,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크레타섬, 배수아의 베를린,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알베르 카뮈의 프랑스 루르마랭, 로맹가리의 페루 등 수없이 많은 소설가와 소설가의 장소가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유려하게 풀어진 여행기다. 고백컨대 단 한 챕터도 지루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음 장을 기대하면서 넘겼다. 한동안 이 책의 '잔상'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 메모


 

- 필경사 바틀비

독자의 입장에서, 아니 작가의 관점에서 제일 먼저 찾아본 대목은 바로 위에서 화자인 변호사, 그러니까 고용주가 고용인에게 일을 시키면서 겪은 황당한 일, 그러니까 바틀비의 대답의 한국어 번역이다. 33

 

...나는 충격받은 감각기관들을 추스르며 잠시 완벽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곧 내가 뭘 잘못 들었거나, 바틀비가 내 말뜻을 완전히 잘못 알아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어조로 요구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만큼 분명한 어조로 그 전과 같은 대답이 되돌아 왔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문학동네 판)와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창비 판)의 차이는 생각의 각도와 인식의 깊이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안고 있다. 허먼 멜빌은 이 문장을 ‘I would prefer not to'로 썼는데, ‘안 하고 싶습니다’로 번역할 경우 영어의 독특한 화법 구사인 ‘부정(否定)의 선택’, 곧 ‘그것을 하도록 되어 있는 현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편을 선택하겠다’는 함의가 지워져 버린다. 바틀비가 나, 그러니까 나를 대표로 한 세상에 응대한 말의 총합은 소설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또는 ‘지금은 좀더 합리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또는 ‘떠나지 않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등등. 34-35쪽

 

 

 

- 알베르 카뮈, 티파사에서의 결혼 149쪽

 

...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神)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더미 속에서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어떤 시간에는 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두 눈으로 그 무엇인가를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이란 속눈썹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뿐이다.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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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 완결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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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양·제천 앓이를 했었다. 아파트가 밀집한 도심에서 차를 타고 2시간만 달려도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제천시 청풍면을 플라스틱 세숫대야에 담은 청풍호(충주사람들은 충주호라 부른다)를 망루에서 바라보면 물에서 빛이, 빛에서 물이 보인다.

 

한적한 마을에 아무도 찾지 않아도 마을을 떠나지 않은 탑과 옛 고궁의 주춧돌을 보면 아무리 감성이 메마른 사람도 잠깐이나마 상념에 젖을 것이다. 공수부대가 날아와 일주일 동안 산소폭탄을 투하한 듯 제천의 공기는 코에 들어오는 순간 내가 사는 곳의 공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항상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2. ‘월든(Walden)', 소로우가 나고 자라고 평생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콩코드 마을의 호숫가. 월든 호수에는 네 권의 물고기(로빈슨 크루소 같은 모험기, 자연묘사, 걸리버 여행기처럼 사회에 대한 풍자서이자 정신적인 자서전, 아마도 최초의 녹색 서적 10-11쪽)가 살고 있단다. 내 생각엔 장자가 언급한 북쪽 바다에 산다는 ’곤‘이라는 물고기도 연암 박지원이 말했던 수레바퀴의 일부분도 호숫가에 발을 담그고 있다.

1845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들어가 1847년 9월 6일 호숫가를 떠나 1862년 마흔 다섯에 세상을 떠난 시인이자, 사상가, 철학자. 아니 그 모두를 아우르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모든 것도 아닌 사람의 2년 동안의 생생한 체험이 책에 담겨 있다. 솔직히 잘 읽히는 책은 아니다. 분량이 500여 페이지고, 번역자가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원전의 수많은 비유와 시적인 표현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장들, 실제 보지 못한 1800년대의 이국의 호숫가의 정경을 상상하면서 읽어야 하는 피로감이 책을 읽는데 조금 방해를 준다. 그렇지만 잠이 와서 책장을 덮을까 하는 시점에서 만나는 표현과 깨달음은 완독의 기쁨으로 되돌아왔다. 멕시코전쟁과 미국 흑인노예제도에 반대하며 세금 납부를 거부해서 감옥에 갇혔다가 나온 직후 쓴 ‘시민의 불복종’도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 메모

 

남부의 노예감독 밑에서 일하는 것도 힘들지만, 북부의 노예감독 밑에서 일하는 것은 더욱 힘들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노예감독일 때이다. 22쪽

 

- 한 농부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채소만 먹고는 못 삽니다. 뼈가 될 만한 성분이 하나도 없거든요.” 그래서 자기 몸에 뼈의 원료를 공급해줄 원료를 공급하는 데 정성껏 하루의 일부분을 바친다. 농부는 이런 말을 하는 동안에도 줄곧 소 뒤를 따라다니는데, 그 소인즉 풀만 먹고 자란 뼈를 갖고서도 온갖 장애물을 헤치면서 농부와 그의 육중한 쟁기를 끌고 있다. 25쪽

 

 

- 미개인들은 저마다 최상의 주택에 못지않은 집을 한 채씩 가지고 있고, 이 집은 소박하고 단순한 그들의 욕망을 채워주기에 충분하다. 하늘을 나는 새는 둥지를 가지고 있고 여우는 굴을 가지고 있으며 미개인들도 오두막을 가지고 있건만, 현대의 문명사회에서 자기 집을 가지고 있는 가정은 반수도 안 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닌 것이다. 54쪽

 

 

 

나는 푸리족 인디오처럼 살았다. 그들에 관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 사람들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나타내는 데에 한 가지 말밖에 없다. 그래서 어제를 의미할 때는 등 뒤를 가리키고, 내일은 자기 앞을, 그리고 오늘은 머리 위를 가리켜서 뜻의 차이를 나타낸다.” 172쪽

 

 

- 이 콩의 결실을 내가 다 거둬들이는 것은 아니다. 이 콩들의 일부는 우드척을 위해서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밀의 이삭이 농부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서는 안 되겠으며, 그 낟알만이 밀대가 생산하는 모든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농사가 실패하는 일이 있겠는가? 잡초들의 씨앗이 새들의 주식일진대, 잡초가 무성한 것도 실은 내가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밭농사가 잘되어 농부의 광을 가득 채우느냐 아니냐는 비교적 중요한 일이 아니다.금년에 숲에 밤이 열릴 것인지 아닌지 다람쥐가 걱정을 않듯 참다운 농부는 걱정에서 벗어나 자기 밭의 생산물에 대한 독점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최초의 소출뿐만 아니라 최종의 소출도 제물로 바칠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251쪽

 

 

호수는 하나의 경관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표정이 풍부한 지형이다. 그것은대지의 눈이다. 그 눈을 들여다보면서 사람은 자기 본성의 깊이를 잰다. 호숫가를 따라 자라는 나무들은 눈의 가장자리에 난 가냘픈 속눈썹이며, 그 주위에 있는 우거진 숲과 낭떠러지 들은 굵직한 눈썹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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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을 짚다 현대시세계 시인선 38
고경숙 지음 / 북인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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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숙 시집, 혈(穴)을 짚다, 북인,

 

1. ‘혈(穴) 짚는’ 행위의 기본정서는 아픔이다. ‘혈(穴)’의 사전적 의미는 구멍, 굴(cave)이다. 아프면 사람이 어둠의 인력에 이끌리게 되고 숨을 구멍을 찾는다. 그 속에서 자신만의 굴을 만든다. 카프카의 미완 유고작 단편 ‘굴’은 작가가 창조해낸 존재의 세계이며 자아의 상징이다. 소설은 죽음을 앞던 존재가 굴을 파고 관리하는 과정을 집요하게 그려내고 있다.

한편 혈(穴)을 짚으면 아프지만 시원하다. 슬픔에서 오는 카타르시스까지 느껴진다고 하면 과장일까. 과격한 육체활동을 하거나 잠을 잘못자면 어깨나 목이 아프다. 책이나 컴퓨터 화면을 오래 보면 눈이 아프다. 그때마다 나는 안마를 받거나 스스로 한다. 뭉친 어깨를 풀기 위해서는 뒷목 중앙과 어깨뼈 사이 중간에 움푹 패인 견정혈을 눌러준다. 고개를 숙였을 때 튀어나오는 목뼈와 어깨 끝의 중간을 짚으면 된다. 눈이 아플 때는 미간을 눌러 주거나(이건 사람들이 안 알려줘도 안다), 눈을 둘러싸고 있는 아래와 위를 검지손가락으로 강하게 압박해주면 시원하다.

외형적인 몸(근육)이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면 마사지나, 파스를 붙이거나 근육 이완제를 먹으면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이면 뭉친 근육이 풀린다. 문제다 내면이 꼬이고 뭉쳐 매듭을 풀지 못할 때다. 내면의 혈이 곧 통점(痛點)이다. 통점은 주체가 겪은 고난과 시련, 그리운 사람, 우리가 끝내 찾아야할 진리와 본질로 해석될 수 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하는데 아픈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다. 치유와 완치의 과정은 정확한 진단에서 시작한다. 양약을 쓸지 한방을 쓸지 민간요법을 쓸지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파악한 이후에 정해도 늦지 않다. 정확한 혈과 통점을 찾는 일에 혈안이 되어야 한다.

 

케미컬라이트 31쪽

-그리운 통점(痛點)

 

그렇게 쉽게 시선을 뺏길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눈을 감을 걸 그랬습니다/ 우주 깊숙이 박힌 빛을 캐내던 어둠이/ 수초로 파고들어 울음 우는 소리/ 무겁게 무겁게 가라앉습니다/ 발효된 하루가 저수지 예서제서/ 푸른 별로 뜨던 밤,/ 수면 바로 아래/ 유독 흔들리던 빛 하나/ 나는 입질을 멈추고 다가가/ 바늘에 내 아가미를 손수 꿰었죠/ 내게 닿은 찌의 곡선이/ 드리움이 아니라 해도 물론 괜찮았습니다/ 찢어진 아가미와 그대 사이/ 적정의 거리를 왜곡하진 않겠습니다/ 당신이 설정해놓은 구역, 푸른 찌는/ 그리운 통점/ 언제나 반짝입니다

 

킬힐 62,63쪽

 

구두굽은 대지의 통점을 자극한다/ 기진한 발바닥으로/ 쿡쿡 찌르고 다니던 그날은/ 봉두난발 핏발선 대지를 갈아엎고/ 한 움큼 씨앗이라도 뿌려야 할지/ 세상을 타진하는 의식이었다// 갇혀 있는 것이 어디 두 발뿐인가/ 사발통문에 이름 올린 하늘도 땅도 이미 한통속/ 입 꾹 다문 채 비를 뿌리지 않고/ 익사를 꿈꾸는 논바닥은 신기루를 보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자꾸 미끄러지는 세상 지탱하느라/ 온 발가락에 청춘을 건다/ 아프지 마라 진화중이다/ 뼈가 변형되고 발목이 접혀지는 것/ 우러르고 싶은 욕망보단 험한 세상/ 널브러진 똥무더기를 피하려는 것이다// 굳이 더 진술하라면/ 언젠간 대지의 혈관을 찾아 피를 터뜨릴/ 12센티 흉기를 소지하고 다닐 요량이라는 것/ 어쩌면 그 전에 내가 먼저 나동그라질지도 모를 일이지만/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데/ 그땐 우리의 내통은 사실무근이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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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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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라면을 끓이며, 문학동네




1. 어제 저녁 라면을 먹었다. 물을 약 550ml 넣고 끓인다. 막 연기가 날 때쯤 스프를 넣는다. 스프나 건더기를 넣고 물을 끓이면 끓는점이 낮아진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다. 곧 내가 배가 무지 고프다는 말이다. 면을 넣고 계란을 넣는다. 계란은 국물에 퍼지지 않고 온전하게 모양을 유지하도록 주의한다. 나의 라면 조리법이다. 한창 운동을 열심히 할 땐 라면을 쳐다보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한 끼 때우려고 먹는다. 밥을 때우려고 먹는 라면은 밥이 아니기에 나는 밥과 꼭 같이 먹는다.





2. 2015년 하반기에 나온 소설가 김훈의 산문집, 이미 많은 분들이 읽었다. 알라딘에서 공격적 마케팅이 화제가 된 바로 그 ‘상품’이다. 쿡방과 쿡북의 유행은 올해도 계속되고 있다. 짐작건대 이 책의 편집자나 최근에 출간된 황석영의 ‘밥도둑’도 이런 행렬에 합류했다. 오래전에 출간된 책에 최근의 글을 보태어 리모델링을 보기 좋게 했다. 저자는 일러두기에서 “이 책의 출간으로 앞에 적은 세 권의 책과 거기에 남은 글들을 모두 버린다.”고 했지만 몇몇 글은 한옥에 살던 시골사람이 도심 아파트촌으로 이사해온 것처럼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던지고 받아치면서 삶과 죽음의 보편성 속에서 생명의 개별성과 존재이유를 기어코 찾아내고자 전진하는 특유의 문체는 변함없었다.





- 젊은이들이 다들 도시로 떠나고 섬에는 노인들만 남아 있다. 아기가 없는 섬에 유모차가 많다. 대처의 젊은 부부들은 아이가 걷기 시작하면 유모차를 버린다. 노인들은 젊은 부부들이 쓰다 버린 유모차를 섬으로 가져와서 걸음걸이할 때 의지로 삼는다. 밭일 나갈 때, 바지락 캐러 갈 때, 이웃에 마실 갈 때, 누가 온다고 기별이 와서 선착장에 마중 나갈 때, 노인들은 이 유모차에 기대어 조심조심 걸어간다. 집집마다 마당에 유모차들이 놓여 있다. 노인들은 갯벌 가장자리에 유모차를 세워놓고 뻘 안으로 들어가서 바지락을 캔다. ...... 손자가 자라서 유모차를 졸업하자 손자의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노인도 있었다. 허리가 굽은 노인은 남성보다 여성 쪽이 훨씬 더 많다. 여자들은 생리, 출산, 하혈, 수유, 눈물로 피와 육즙을 모두 빨려서 그렇게 꼬부라진 것이라고, 젊어서 마누라 속 많이 썩인 늙은 어부가 말해주었다. 어부의 말은 의학적으로 타당하게 들렸다. 68쪽




- 세월호는 이 모든 원리와 인류의 축적된 경험을 거꾸로 했다. 그러니 어찌 살기를 바라겠는가. 갑판에 과적을 함으로써 무게중심을 위로 끌어올렸고, 배 밑창의 평형수를 빼버려서 배의 중심을 허깨비로 만들었다. 이것이 침몰의 원인인가. 이것은 원인이라기보다는 침몰 그 자체다. 이것이 침몰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배가 뒤집히니까 가라앉았다는 말과 같다. 이것은 동어반복이다. 163쪽





- 돈이 정치적 채널을 따라서 밀실로 들어갈 때는 이처럼 우아하고 세련된 외양을 갖춘다. 그 돈이 대통령의 직무와 관련이 있다는 혐의는 없다. 이 세련성이 직무 관련성을 제거한다. 그래서 직무와 관련이 없이 먹었다는 모든 떡값이 이 나라에서는 무죄로 통한다. 떡값이란 말은 돈의 모든 속성을 요약정리한 듯하다. 떡값은 직무와 관련이 없을 경우라 하더라도 반드시 직위와는 관련이 있다. 직무는 기능이며 직위는 신분이다. 직무는 용(用)이고 직위는 체(體)인 것이다. 190쪽



- 여자들의 젖가슴이란 그 주인인 각자의 것이고 그 애인의 것이기도 하지만, 신라금관이나 고려청자나 백제 금동향로보다 더 소중한 겨레의 보물이며 자랑거리다. 여자들은 누구나 다 한 쌍의 젖가슴을 키워내고 품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이 젖가슴은 더욱 보편적이고 소중한 일상의 보물이며, 민족적 생명과 에너지의 근본인 것이다. 희소가치가 없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다는 말이다. 더구나 그 속에 살아 있는 생명의 피가 흐르고 젖샘 꽈리에 젖이 고인다고 하니, 죽은 쇠붙이에 불과한 신라왕관과는 비교할 수 없다. 거리마다, 공원마다, 지하철마다 넘쳐나는 이 생명의 국보들은 새로운 삶을 향한 충동으로 우리를 설레게 하고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게 해준다. 244쪽




- 내 생각은 이렇다. 여자 젖가슴의 모든 고난은 직립보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네발로 기어다니는 포유류들의 젖은 아래로 늘어져서 편안하다. 이것이 무릇 모든 젖의 자연일 것이다.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이후로, 여자들의 젖가슴은 어쩔 수 없이 전방을 향하게 됐다. 가엾은 일이다. 크고 무겁고 밀도가 높고 팽팽하고 늘어지지 않은 가슴만이 아름답다고, 남자나 여자나 모든 그렇게 세뇌돼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크고 무거운 것들은 아래로 늘어지게 돼 있다. 늘어지려는 것을 자꾸만 끌어올리니까 부작용이 생긴다. 생명이나 자연은 인간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이미 스스로 본래 그러한 것처럼 아름답고 편안하다. 그러니 가슴이 좀 늘어지기로 무슨 걱정할 일이 있겠는가. 245-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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