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여행법 - 소설을 사랑하기에 그곳으로 떠나다
함정임 글.사진 / 예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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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쓰지 않기로 한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쓴다. 보지 않은 것을 상상에만 의존해서 쓰면 진실함이 잘 묻어나오지 않는다. 문학작품에서 허용되는 차원을 넘는 객관적 사실 차원에서 치명적 오류를 범할 우려도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다르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피부로 느낄 수 있고 손에 쥘 수도 있다. 체감자가 처한 시공간의 상황에 따라 바람은 시원할 때도 아플 때도 있다. 슬픔, 희망, 사랑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적거나 나이에 비해 직접 체험이 적은 경우에는 그럼 어떡해야 하나. 우선 다독을 통해 간접체험의 힘으로 버텨야 한다. '읽히는' 대상은 책일수도, 그림이나 사진일수도, 사람일수도 있다. 최대한 그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직접체험과 '읽은' 간접체험으로 부족함을 느낀다. 마지막 단계가 남았다. '상상하기'. 스쳐지나갔거나 오랜 시간으로 기억이 흐릿해졌지만 문득 책을 읽다가 불현듯 어떤 사람이나 단어가 떠오를 때가 있다. '잔상'이 상상을 낳고 상상은 잔상을 구체화 한다.


2. 쓸데없어 보이는 소리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이유는 이 책 소설가 함정임의 여행 에세이 '소설가의 여행법'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폴오스터의 뉴욕,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크레타섬, 배수아의 베를린,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알베르 카뮈의 프랑스 루르마랭, 로맹가리의 페루 등 수없이 많은 소설가와 소설가의 장소가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유려하게 풀어진 여행기다. 고백컨대 단 한 챕터도 지루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음 장을 기대하면서 넘겼다. 한동안 이 책의 '잔상'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 메모


 

- 필경사 바틀비

독자의 입장에서, 아니 작가의 관점에서 제일 먼저 찾아본 대목은 바로 위에서 화자인 변호사, 그러니까 고용주가 고용인에게 일을 시키면서 겪은 황당한 일, 그러니까 바틀비의 대답의 한국어 번역이다. 33

 

...나는 충격받은 감각기관들을 추스르며 잠시 완벽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곧 내가 뭘 잘못 들었거나, 바틀비가 내 말뜻을 완전히 잘못 알아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어조로 요구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만큼 분명한 어조로 그 전과 같은 대답이 되돌아 왔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문학동네 판)와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창비 판)의 차이는 생각의 각도와 인식의 깊이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안고 있다. 허먼 멜빌은 이 문장을 ‘I would prefer not to'로 썼는데, ‘안 하고 싶습니다’로 번역할 경우 영어의 독특한 화법 구사인 ‘부정(否定)의 선택’, 곧 ‘그것을 하도록 되어 있는 현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편을 선택하겠다’는 함의가 지워져 버린다. 바틀비가 나, 그러니까 나를 대표로 한 세상에 응대한 말의 총합은 소설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또는 ‘지금은 좀더 합리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또는 ‘떠나지 않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등등. 34-35쪽

 

 

 

- 알베르 카뮈, 티파사에서의 결혼 149쪽

 

...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神)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더미 속에서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어떤 시간에는 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두 눈으로 그 무엇인가를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이란 속눈썹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뿐이다.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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