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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을 짚다 ㅣ 현대시세계 시인선 38
고경숙 지음 / 북인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고경숙 시집, 혈(穴)을 짚다, 북인,
1. ‘혈(穴) 짚는’ 행위의 기본정서는 아픔이다. ‘혈(穴)’의 사전적 의미는 구멍, 굴(cave)이다. 아프면 사람이 어둠의 인력에 이끌리게 되고 숨을 구멍을 찾는다. 그 속에서 자신만의 굴을 만든다. 카프카의 미완 유고작 단편 ‘굴’은 작가가 창조해낸 존재의 세계이며 자아의 상징이다. 소설은 죽음을 앞던 존재가 굴을 파고 관리하는 과정을 집요하게 그려내고 있다.
한편 혈(穴)을 짚으면 아프지만 시원하다. 슬픔에서 오는 카타르시스까지 느껴진다고 하면 과장일까. 과격한 육체활동을 하거나 잠을 잘못자면 어깨나 목이 아프다. 책이나 컴퓨터 화면을 오래 보면 눈이 아프다. 그때마다 나는 안마를 받거나 스스로 한다. 뭉친 어깨를 풀기 위해서는 뒷목 중앙과 어깨뼈 사이 중간에 움푹 패인 견정혈을 눌러준다. 고개를 숙였을 때 튀어나오는 목뼈와 어깨 끝의 중간을 짚으면 된다. 눈이 아플 때는 미간을 눌러 주거나(이건 사람들이 안 알려줘도 안다), 눈을 둘러싸고 있는 아래와 위를 검지손가락으로 강하게 압박해주면 시원하다.
외형적인 몸(근육)이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면 마사지나, 파스를 붙이거나 근육 이완제를 먹으면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이면 뭉친 근육이 풀린다. 문제다 내면이 꼬이고 뭉쳐 매듭을 풀지 못할 때다. 내면의 혈이 곧 통점(痛點)이다. 통점은 주체가 겪은 고난과 시련, 그리운 사람, 우리가 끝내 찾아야할 진리와 본질로 해석될 수 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하는데 아픈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다. 치유와 완치의 과정은 정확한 진단에서 시작한다. 양약을 쓸지 한방을 쓸지 민간요법을 쓸지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파악한 이후에 정해도 늦지 않다. 정확한 혈과 통점을 찾는 일에 혈안이 되어야 한다.
케미컬라이트 31쪽
-그리운 통점(痛點)
그렇게 쉽게 시선을 뺏길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눈을 감을 걸 그랬습니다/ 우주 깊숙이 박힌 빛을 캐내던 어둠이/ 수초로 파고들어 울음 우는 소리/ 무겁게 무겁게 가라앉습니다/ 발효된 하루가 저수지 예서제서/ 푸른 별로 뜨던 밤,/ 수면 바로 아래/ 유독 흔들리던 빛 하나/ 나는 입질을 멈추고 다가가/ 바늘에 내 아가미를 손수 꿰었죠/ 내게 닿은 찌의 곡선이/ 드리움이 아니라 해도 물론 괜찮았습니다/ 찢어진 아가미와 그대 사이/ 적정의 거리를 왜곡하진 않겠습니다/ 당신이 설정해놓은 구역, 푸른 찌는/ 그리운 통점/ 언제나 반짝입니다
킬힐 62,63쪽
구두굽은 대지의 통점을 자극한다/ 기진한 발바닥으로/ 쿡쿡 찌르고 다니던 그날은/ 봉두난발 핏발선 대지를 갈아엎고/ 한 움큼 씨앗이라도 뿌려야 할지/ 세상을 타진하는 의식이었다// 갇혀 있는 것이 어디 두 발뿐인가/ 사발통문에 이름 올린 하늘도 땅도 이미 한통속/ 입 꾹 다문 채 비를 뿌리지 않고/ 익사를 꿈꾸는 논바닥은 신기루를 보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자꾸 미끄러지는 세상 지탱하느라/ 온 발가락에 청춘을 건다/ 아프지 마라 진화중이다/ 뼈가 변형되고 발목이 접혀지는 것/ 우러르고 싶은 욕망보단 험한 세상/ 널브러진 똥무더기를 피하려는 것이다// 굳이 더 진술하라면/ 언젠간 대지의 혈관을 찾아 피를 터뜨릴/ 12센티 흉기를 소지하고 다닐 요량이라는 것/ 어쩌면 그 전에 내가 먼저 나동그라질지도 모를 일이지만/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데/ 그땐 우리의 내통은 사실무근이라고 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