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289
이수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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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명 시집,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문학과 지성사,



1. 비교적 짧은 시편들로 이루어진 시집. 최근 읽은 황유원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에 비해 반 정도로 얇은 시집.
화자는 자꾸 ‘벽’ 속으로 들어간다. ‘벽’을 뚫고 다른 세계로 전향하는 것이 아니라 ‘벽’ 속에 산다. ‘금’간 벽 속에서 ‘움직이는 금을/ 그 보이지 않는 한 토막의 누드를’ 그린다.



‘벽’은 어떤 곳일까? 숨고 싶은 곳,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유배지, 어둠이 공기인 곳, 금기와 금지의 장소가 ‘벽’이다. ‘벽’은 여러 가지로 변주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끊임없이 굴러야 하는 바퀴로, 천장에서 위태롭게 깜빡이는 전등으로, 신발을 신었을 때 뒤꿈치가 신발을 낯설어 해서 얼굴이 붉게 까지는 것, 내 몸속에서 피처럼 돌아다니는 못이나 바늘로. 그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한 토막의 누드를 그리’고, ‘머리가 없는 곳에서/ 머리가 금지된 곳에서/ 머리카락이 자’란다.


‘벽’이 꼭 부정적인 장소나 이미지인 것은 아니다. ‘벽’에서 벽의 밖에서 들리는 노랫소리, 웃음과 울음, 연필 깎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를 클래식 음악을 듣듯 감상할 수 있는 장소다. 지금은 웅크리고 베이고 위태롭게 매달려 있지만 어둠으로 가득찬 벽 속에도 미세하지만 밝음과 맑음이 있고, 희망의 실뭉치가 있다. 내 몸속의 바늘을 꺼내 서투르게 상처받은 어둠을 꿰매고 완성된 옷을 이 보잘 것 없는 옷걸이에 거는 일이 남아 있다.



2. 메모

- 금 24-25쪽

마룻바닥/ 내가 앉은 마룻바닥/ 내가 닦아대는 마룻바닥은 금이 간다./ 내 손가락, 내 발바닥은 금이 간다.// 내가 여는 문/ 내가 미끄러지는 타일/ 내가 마주친 벽은 금이 간다./ 나는 금 속으로 들어선다.// 금은 금과 부딪친다./ 금을 부수고/ 금의 시체를 먹으며/ 금은 자란다.// 나는 금을 따라 걷는다./ 금들이 부딪치는 한가운데/ 꽃이 피어 있다./ 나는 몸을 구부린다.// 내가 몸을 구부리자/ 꽃이 많아진다./ 더 작은 꽃/ 더 미세한 꽃들이 피어난다.// 분할되고 분할되고 분할되는 기계들이/ 다시 분할될 준비를 하고 있다./ 더 작은 금/ 더 미세한 금 속으로/ 소용돌이가 되어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금을 긋는다./ 금 속에서/ 움직이는 금을/ 그 보이지 않는 한 토막의 누드를 그린다.



- 금지된 놀이 50-51쪽

머리를 덮으며/ 머리카락이 자랐다.// 아이들은 인형을 던지며 놀았다.// 한 아이가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이 금지되었다./ 한 아이가 옆집 아이와 노는 것이 금지되었다.// 머리카락을 덮으며/ 머리카락이 자랐다.// 한 아이가 노는 아이인 것이 금지되었다./ 한 아이가 아이인 것이 금지되었다.// 검은 머리카락 몇 올이 날아다녔다.//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인형을 던지며 놀았다.// 한 아이가 금지된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이 금지되었다./ 한 아이가 금지된 울음과 노는 것이 금지되었다.// 한 아이가 숨어서/ 숨죽이고 있는 것이 금지되었다.// 머리가 없는 곳에서/ 머리가 금지된 곳에서/ 머리카락이 자랐다.



- 면도 52-53쪽

벽 속에 그의 수염이 있다./ 벽 속에 그의 얼굴이 있다./ 벽 속에 끝나지 않은 하루가 있다./ 깎아내야 할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한밤중에 홀로 일어나/ 벽 속에 들어가서/ 그는 자신의 수염을 깎는다./ 수염에 덮여 있는 얼굴을 깎는다.// 얼굴에 섞여 있는/ 얼굴이 되지 못하는/ 얼굴// (···)// 어제보다 긴 얼굴을 달고/ 그는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는 것은 얼마나 신기한 일일까.



- 빗물이 벽을 타고 흘렀다 96쪽

빗물이 벽을 타고 흘렀다. 나는 벽 속에 있었다. (···) 나는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를 향해 가까이 다가오는 발자국, 멀어지는 발자국, 알 수 없는 울부짖음 소리, 나는 시끄러운 정적 속에 묶여 있었다. 빗물이 벽을 타고 흘렀다. 닫혀 있는 빗방울, 닫혀진 물이 벽을 흐르고 흘렀다. 벽은 빗방울 속에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며 벽 속에서 나는 말했다. 날 꺼내줘. 도시는 녹고 있었다. 빗물 속에 도시는 녹아들었다. 천천히 모든 것이 떠내려갔다. 날 꺼내줘, 떠내려가며 나는 말했다.




- 데칼코마니 93쪽

땀은 몸 밖으로 난다./ 그리고 몸 안으로도 흐른다.// 밤/ 유리창으로 내가 밖을 바라볼 때/ 유리창에는 안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내가 있다.// 그 유리창을 열어놓는다./ 그 유리창이 저절로 닫힌다.// 처음에 기둥에 못을 몇 개 박은 뒤/ 나는 못을 밟고 올라갔다.// 올라갔다고 머무를 필요는 없다./ 올라갔다고 굳이 내려올 필요는 없다.// 나의 못들을 뺄 필요는 없다.// 어떤 동물들은 뿔이 있다./ 어떤 동물들은 굴 속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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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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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소설집, 쇼코의 미소, 문학동네



1. 《쇼코의 미소》를 이제야(?) 읽었다. 2016년 7월에 출간된 어떻게 보면 아직까지 신간이지만, 독자들 사이에선 워낙 유명한 책이다. 해설에서 언급한 ‘순하고 맑은 서사의 힘’ ‘정서적 공감을 통한 유대’ ‘손녀-조모의 관계, 가부장적 남성성의 부재’ 에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보다 소설집에 밑바탕에 있는 비판정신에 대해 주목하고 싶다.

‘6.25전쟁’은 한반도의 한민족을 남북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베트남 전쟁’은 가까웠던 ‘응웬 아줌마’와 ‘엄마’ 사이를 멀어지게 했다.(〈씬짜오 씬짜오〉) 전쟁 자체의 비극성과 그것이 불러온 개인적 차원의 상처를 국가에 속한 개인이 감당하고 치유해 나가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치유 불가능함에도, 그래도 기억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것.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 순애의 남편이 ‘인혁당 사건’에 연류되어 사형은 면하지만 다른 피고인들은 사형을 선고받고 확정된 다음 날 새벽에 집행당했다. (인혁당 사건, 1975년 4월 8일. 대법원(재판장 민복기)은 서도원, 김용원, 이수병, 이홍선, 송상진, 여정남, 하재완, 도예종 등 대학생이 아닌 인혁당 관련 피고인 여덟 명의 항소기각 사형확정. 다음 날 새벽 집행,국제 법학자 협회는 이 날을 ‘국제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 칭함(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215쪽))


〈미카엘라〉에서는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25년 뒤 2014년 프란체스코 교황 방한 기념 시복미사(2014년 8월 16일)과 세월호 사건이 서사의 축이다. 2014년 7월 말, 8월 초 수안보 쪽으로 휴가를 갔었다. 숙소 근처에 있었던 성당에 내걸린 프란체스코 교황 방한 환영 현수막, 무척 더웠던 기억과 세차게 내린 소나기, 그때 먹었던 꿩고기 등 개인적인 추억이 먼저 생각났고 책에도 나오지만 교황 방한 때 유민 아빠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모든 작가가 현실의 문제를 작품의 소재나 배경으로 활용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1984년생인 작가는 직접 체험한 세월호 사건과 프란체스코 교황방한의 기억을 소환한 것 뿐 아니라, 베트남 전쟁과 인혁당 사건까지 작품으로 끌어들여 그 비극이 인물에 영향을 주는 방향으로 서사를 풀어나갔다. 이 소설집에 실린 모든 작품이 현실에 대한 비판이 담겼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작가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어떻게든 작품에 녹아들게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나의 독법이 지엽적이고 주관적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은 이 소설집을 다르게 바라보았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짧은 감상을 적었다.




2. 메모


〈쇼코의 미소〉



“나는 쇼코가 조금 미워져서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그리웠었다는 그 말에 눈물이 났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24쪽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두를 잃고 나서도 더 잃을 것이 남아 있던 이모의 모습을. 엄마는 사랑했다.” 100쪽




〈한지와 영주〉


“천국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영혼의 상태라는 결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죽음 뒤의 삶이 영원하다면, 영원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지금의 삶은 왜 존재하는 거지? 천국은 이런 삶에 대한 보상이라는 거야?” “이런 삶?” 카로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141쪽


-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불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사람이 현생에 대한 기억 때문에 윤회한다고 했다. 마음이 기억에 붙어버리면 떼어낼 방법이 없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법이라고 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애도는 충분히 하되 그 슬픔에 잡아먹혀 버리지 말라고 했다. 안 그러면 자꾸만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그 말이 무서웠다.

- 나는 그 텅 빈 어둠 속에서 ‘한때 지구는 이렇게 쓸쓸한 곳이었구나’라고 생각한다. 지구는 그저 융기하고 침식하며, 열심히 퇴적하고 있었구나. 참 열심히, 쓸쓸히도.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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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없는 사람 문학과지성 시인선 397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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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 문학과 지성사


1. 다시 읽고 싶은 시집, 선물하고 싶은 시집, 내가 쓰고 싶은 시집, 너에게 받고 싶은 시집. 베고 자면 그 속의 문장들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올 것 같은 시집, 자고 일어나면 촉촉하게 베갯잇이 젖을 것 같은 시집.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깔끔한 맛의 와인 한 모금. 묵직한 바디감의 핸드드립커피도 아니고 달달한 카라멜 마키아토도 아닌 라떼 마키아토 같은 목 넘김, 사랑의 대상이라고 추정되는 ‘너’라는 존재를 꼭 연정의 대상으로 한정 시킬 필요는 없는 듯하다. 어떤 장면에서는 ‘용산 참사 희생자’가 되고 제3세계의 외국인들, 시(詩), 때로는 ‘나’를 비추는 거울로서 ‘너’를 볼 수 있었다. 천둥 번개치는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강렬한 자극은 없지만 굳이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되는 봄날의 가랑비처럼 천천히 몸속의 세포들로 스며드는 문장들이 꽤 있었다.



2. 메모


- ‘나’라는 말 73-75쪽

나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판돈인 양/ 나는 인생에 ‘나’라는 말을 걸고 숱한 내기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혹 나는 ‘나’라는 말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어느 날 밤에 침대에 누워 내가 ‘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지평선처럼 아득하게/ 더 멀게는 지평선너머 떠나온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나’라는 말이 공중보다는 밑바닥에 놓여 있을 때가 더 좋습니다./ 나는 어제 산책을 나갔다가 흙길 위에/ 누군가 잔가지로 써놓은 ‘나’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그 누군가는 그 말을 쓸 때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그 역시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거나/ 홀로 나아갈 지평선을 바라보며/ 땅 위에 ‘나’라고 썼던 것이겠지요./ 나는 문득 그 말을 보호해주고 싶어서/ 자갈들을 주워 주위에 빙 둘러 놓았습니다./ 물론 하루도 채 안 돼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서/ 혹은 어느 무심한 발길에 의해 그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요./ 나는 ‘나’라는 말이 양각일 때보다는 음각일 때가 더 좋습니다./ 사라질 운명을 감수하고 쓰인 그 말을/ 나는 내가 낳아본 적도 없는 아기처럼 아끼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나’라는 말을 가장 숭배할 때는/ 그 말이 당신의 귀를 통과하여/ 당신의 온몸을 한 바퀴 돈 후/ 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로 내게 되돌려질 때입니다./ 나는 압니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나’를 말할 때마다/ 무(無)로 향하는 컴컴한 돌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가겠지요./ 하지만 오늘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너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지평선이나 고향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나는 압니다. 나는 오늘 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인 양/ ‘너는 말이야’ ‘너는 말이야’ 를 수없이 되뇌며/ 죽음보다도 평화로운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 것입니다.



- 의문들, 16-17쪽 부분

나는 즐긴다/ 장례식장의 커피처럼 무겁고 은은한 의문들을/ (···) / 언젠가 누군가를 환영할 준비가 된 고독은 가짜 고독일까/ 일촉즉발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삶은/ 전체적으로는 왜 지루할까



- 필요한 것들, 22-23쪽 부분

더 이상 말벗이기를 그친 우리······/ 간혹 오후는 호우를 뿌렸다/ 어느 것은 젖었고 어느 것은 죽었고/ 어느 것은 살았다/ 그 어느 것도 아니었던 우리······/ 항상 나중에 오는 발걸음들이 필요하다/ 오직 나중에 오는 발걸음만이 필요하다/ 바로 그것, 그것인, 아닌,/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인/ 모든 것이······



-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2011년 1월 20일 용산 참사 2주기에 부쳐) 44-48쪽 부분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앉아 서로에게 물어볼 텐데/ 학살자들은 또 무슨 궁리를 할까?/ 우리가 울부짖기도 전에 우리의 목을 죈 그들/ 우리가 죽기도 전에 우리의 관을 짠 그들/ 그런데 우리가 무죄를 입증하기도 전에/ 차가운 곁눈질을 던지며 그곳을 총총히 지나치던/ 시민이라는 이름의 방관자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 첫줄, 62쪽

첫 줄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써진다면/ 첫눈처럼 기쁠 것이다./ 미래의 열광을 상상 임신한/ 둥근 침묵으로부터/ 첫 줄은 태어나리라./ 연서의 첫 줄과/ 선언문의 첫 줄./ 어떤 불로도 녹일 수 없는/ 얼음의 첫 줄./ 그것이 써진다면/ 첫아이처럼 기쁠 것이다./ 그것이 써진다면/ 죽음의 반만 고심하리라./ 나머니 반으로는/ 어떤 얼음으로도 식힐 수 없는/ 불의 화환을 엮으리라.



- 음력, 98-99쪽 부분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내일은 음력으로/ 모든 게 잊힌 과거야./(···)
내가 아주 슬펐을 때,/ 나는 최대한 낮은 어조로/ 서쪽의 지평선을 읽었지./ 서쪽은 음력으로 어제의 동쪽이고/ 지평선은 하나의 완벽한 입체이니까.



- 변신의 시간 101쪽 부분

잠든 너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인간의 침묵에서/ 벌레의 침묵 쪽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멸망에 관한 한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미래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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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 제30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179
서효인 지음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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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 시집,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민음사
#서효인


1.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격언을 알고 있다. 도덕이라는 커다란 원이 있고 그 울타리 내에 이것만은 국가나 공동체의 힘으로 강제해야 할 불가피한 영역이 법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이를 먹을수록 법이 도덕을 울타리와 담을 허물더니 도덕의 집을 철거하고 철제 컨테이너 가건물을 지으며 영역을 넓혀 간다. 법은 바람에도 끄덕 없다. 힘 센 사람은 더 강하게, 힘 약한 사람은 쪼그라들게 만드는 트랜스포머. 언제든 분리와 철거가 가능한 도시의 게르가 법이다. 한비자는 물론이고 공자, 맹자도 추운 곳에 덜덜 떨다가 전기장판 위에서 잠시 몸을 지지는 피난처.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데 법의 울타리를 벗어나 법의 눈 밖에 나면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밥 주고 운동시켜주고 기술도 가르쳐 주는 치외법권의 대사관인 큰 집으로 이사해야 한다.



2. 시집을 읽고 법, 도덕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서효인 시인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직접 까든 돌려 까든 눈 뜨고는 못 본다. 시인의 예민한 촉수로 자본화 된 권력에 빳빳이 고개를 들고 대들 준비가 되어 있다. 일단 내 성질 한 번 건드려 봐라는 식으로.
‘그의 옆집’이라는 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늙은 시인과 덜 늙은 시인과, 더 늙은 시인이 중국요리를 시켜먹는다. 옆집은 적막하다가 무슨 일이 일어난 듯 시끄럽다가, 필시 사고로 추정되는 상황에도 시인들은 침묵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이나 하듯. ‘누가 권력을 잡든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그래도 박통이나 전통때가 좋았는데. 그때가 좋았었지.’ 어르신들의 말이 배경음악으로 들리는 시.



나는 ‘그때, 거기, 그들’ ‘지금, 여기, 우리’가 좋았으면 좋겠다.



3. 메모




- 그의 옆집 86-87쪽 부분

우리는 그의 옆집에서 그의 발소리를 숨죽여 기다린다. 급기야 시인들은 서로를 몽둥이로 떄리며 점점 분명해지는 옆집의 소리를 외면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늙었다. 옆집은 그대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남은 음식이 뒤섞인 그릇을 오늘 자 신문으로 덮는다. 악마의 행복도 이렇게, 치밀하지 못했다.



- 옥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비밀이야, 106-107쪽 부분

한 대, 두 대, 석 삼, 너구리, 오징어 (···) 굴 속에 너구리가 있다. 바깥에는 지독한 매연, 매연 속에는 못 박힌 각목, 각목 끝에는 너와 나의 손목이 있다. 또 누가 죽었다는 소식이다. 손목 끝에는 고운 손가락이 있고, 우리는 자가용 핸들을 가볍게 쥐던 손으로 악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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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최대화 민음의 시 219
황유원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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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유원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 민음사



1. 세밑이다. 두어 시간 뒷면 2017년 새해가 어둑하게 올 것이다. 새해가 뜨기 전에 새해의 어둠과 새해의 새벽의 어스름이 먼저 올 것이다. 사람들은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동해의 어느 해변과 산에서, 광화문에서, 보신각에서 새해를 기다릴 것이다.
새해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지, 보다는 왜 그것을 해야지?, 를 생각해야겠다. 몸 밖의 자극에 조금 무심해 지고 몸 안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야겠다.



2. 황유원 시인의 첫 시집이다. 두 페이지 이내의 시는 없고 거의 모든 시가 세 페이지가 넘는 아주 두꺼운 시집. 글자보다 소리로 가득찬 시집. 해설을 쓴 성기완 시인의 말을 빌리면 이 시집에서 ‘소리는 소리는 텅 빈 전체의 유일한 존재증명이면서, 동시에 커넥터.’
시인은 수줍게 어느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시의 긴 길이가 곧 영감의 증거라고 느낍니다. 긴장감을 포기하더라도 유창한 리듬은 꺠고 싶지 않거든요.”(현대시 3월호, 181쪽) 다양하게 변주되는 이미지와 그 중심을 이루는 리듬감 덕분에 하나도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키워드를 꼽자면 ‘비, 소리, 음악, 겨울’. 한 번 읽고 또 읽고 싶은 시집.




- 북유럽 환상곡, 부분, 15쪽

떨리는 손 숨기기 위해/ 손의 멱살을 쥐어 본 적 있습니까/ 손톱자국 네 개 희미하게 남아/ 손에게 미안해 지는 저녁


- 간단한 몇 가지 동작들, 31-35쪽 부분

우리가 동화 속 연인들처럼 동이 틀 때까지 놓지 않고 켜 놓은 환한 양손이/ 우리보다 먼저 졸다/ 살짝, 가볍게 벌어지고// 이윽고 완전한 한 마리의 새로 펼쳐진 그것은/ 불 꺼진 손안에 그대로 안긴 채/ 다시 우리의 잠 속으로 날아들게 되는 거겠지




- 비 맞는 운동장, 41-43쪽

혼자 비 맞고 있는 운동장, 누가 그쪽으로/ 우산을 든 채 걸어 들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검은 우산을 들고 있어서 멀리서 보면 무슨 작은/ 구멍 같아 보이는 사람이 벌써 몇 바퀴째/ 혼자서 운동장을 돌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도 비 밎으며 뛰놀진 않는 운동장/ 웅덩이 위로 빗방울만 뛰노는 운동장에서/ 어쩌면 운동장 구석구석에 우산을 씌워 주기 위해/ 어쩌면 그건 그냥 운동장의 가슴에 난 구멍이/ 빗물에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는 건지도 몰랐지만/ .../ 우산은 분명/ 운동하고 있었다/ 혼자서 공 차고 노는 사람이/ 혼자서 차고/ 혼자서 받으러 가듯/ 비바람에 고개 숙이며 간신히 거꾸로/ 뒤집어지지 않는 운동이었다/



- 세상의 모든 최대화, 124-128쪽 부분

짓밟힌 몸길이를 짓밟힌 시간으로 나눠 기차가 절망하기 시작한 지점에서부터 자기 합리화에 성공하는 지점까지 걸린 속도를 계산해 내며 자기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디지




- 항구의 겨울, 147쪽 부분

항구의 겨울, 항구한 겨울은 뺄셈이 불가능한 세계. 마냥 쌓이기만 한다. (···)/ 그래도 웃음이 뺄셈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믿으며 그 믿음을 얼린다. (···) 결국 모든 것은 덧셈이겠지만, 영원히 영을 꿈꾸며. 최대한 동그랗게. 차가운 얼음을 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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