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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없는 사람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97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8월
평점 :
심보선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 문학과 지성사
1. 다시 읽고 싶은 시집, 선물하고 싶은 시집, 내가 쓰고 싶은 시집, 너에게 받고 싶은 시집. 베고 자면 그 속의 문장들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올 것 같은 시집, 자고 일어나면 촉촉하게 베갯잇이 젖을 것 같은 시집.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깔끔한 맛의 와인 한 모금. 묵직한 바디감의 핸드드립커피도 아니고 달달한 카라멜 마키아토도 아닌 라떼 마키아토 같은 목 넘김, 사랑의 대상이라고 추정되는 ‘너’라는 존재를 꼭 연정의 대상으로 한정 시킬 필요는 없는 듯하다. 어떤 장면에서는 ‘용산 참사 희생자’가 되고 제3세계의 외국인들, 시(詩), 때로는 ‘나’를 비추는 거울로서 ‘너’를 볼 수 있었다. 천둥 번개치는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강렬한 자극은 없지만 굳이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되는 봄날의 가랑비처럼 천천히 몸속의 세포들로 스며드는 문장들이 꽤 있었다.
나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판돈인 양/ 나는 인생에 ‘나’라는 말을 걸고 숱한 내기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혹 나는 ‘나’라는 말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어느 날 밤에 침대에 누워 내가 ‘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지평선처럼 아득하게/ 더 멀게는 지평선너머 떠나온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나’라는 말이 공중보다는 밑바닥에 놓여 있을 때가 더 좋습니다./ 나는 어제 산책을 나갔다가 흙길 위에/ 누군가 잔가지로 써놓은 ‘나’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그 누군가는 그 말을 쓸 때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그 역시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거나/ 홀로 나아갈 지평선을 바라보며/ 땅 위에 ‘나’라고 썼던 것이겠지요./ 나는 문득 그 말을 보호해주고 싶어서/ 자갈들을 주워 주위에 빙 둘러 놓았습니다./ 물론 하루도 채 안 돼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서/ 혹은 어느 무심한 발길에 의해 그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요./ 나는 ‘나’라는 말이 양각일 때보다는 음각일 때가 더 좋습니다./ 사라질 운명을 감수하고 쓰인 그 말을/ 나는 내가 낳아본 적도 없는 아기처럼 아끼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나’라는 말을 가장 숭배할 때는/ 그 말이 당신의 귀를 통과하여/ 당신의 온몸을 한 바퀴 돈 후/ 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로 내게 되돌려질 때입니다./ 나는 압니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나’를 말할 때마다/ 무(無)로 향하는 컴컴한 돌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가겠지요./ 하지만 오늘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너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지평선이나 고향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나는 압니다. 나는 오늘 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인 양/ ‘너는 말이야’ ‘너는 말이야’ 를 수없이 되뇌며/ 죽음보다도 평화로운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 것입니다.
나는 즐긴다/ 장례식장의 커피처럼 무겁고 은은한 의문들을/ (···) / 언젠가 누군가를 환영할 준비가 된 고독은 가짜 고독일까/ 일촉즉발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삶은/ 전체적으로는 왜 지루할까
더 이상 말벗이기를 그친 우리······/ 간혹 오후는 호우를 뿌렸다/ 어느 것은 젖었고 어느 것은 죽었고/ 어느 것은 살았다/ 그 어느 것도 아니었던 우리······/ 항상 나중에 오는 발걸음들이 필요하다/ 오직 나중에 오는 발걸음만이 필요하다/ 바로 그것, 그것인, 아닌,/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인/ 모든 것이······
-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2011년 1월 20일 용산 참사 2주기에 부쳐) 44-48쪽 부분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앉아 서로에게 물어볼 텐데/ 학살자들은 또 무슨 궁리를 할까?/ 우리가 울부짖기도 전에 우리의 목을 죈 그들/ 우리가 죽기도 전에 우리의 관을 짠 그들/ 그런데 우리가 무죄를 입증하기도 전에/ 차가운 곁눈질을 던지며 그곳을 총총히 지나치던/ 시민이라는 이름의 방관자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첫 줄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써진다면/ 첫눈처럼 기쁠 것이다./ 미래의 열광을 상상 임신한/ 둥근 침묵으로부터/ 첫 줄은 태어나리라./ 연서의 첫 줄과/ 선언문의 첫 줄./ 어떤 불로도 녹일 수 없는/ 얼음의 첫 줄./ 그것이 써진다면/ 첫아이처럼 기쁠 것이다./ 그것이 써진다면/ 죽음의 반만 고심하리라./ 나머니 반으로는/ 어떤 얼음으로도 식힐 수 없는/ 불의 화환을 엮으리라.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내일은 음력으로/ 모든 게 잊힌 과거야./(···)
내가 아주 슬펐을 때,/ 나는 최대한 낮은 어조로/ 서쪽의 지평선을 읽었지./ 서쪽은 음력으로 어제의 동쪽이고/ 지평선은 하나의 완벽한 입체이니까.
잠든 너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인간의 침묵에서/ 벌레의 침묵 쪽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멸망에 관한 한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미래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