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가방 - 안규철의 사물에 관한 이야기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나다라...... 글을 배운다는 것은 허공을 통과하는 연속적인 말소리의 분할과 편집을 통해, 달아나는 시간을 공간적으로 번역해 붙들어 놓는 법을 배우는 일이고, 나아가 그 번역의 편차를 묵인하거나 무시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글을 못 배운 사람을 까막눈이라 하지만 글을 배우면서 이러한 사각형의 틀 밖에 대해서 까막눈에 가까워진다. 그 틀 안에 들지 않는, 작업대 위에 올려 놓으면 자꾸만 미끄러져 시야를 벗어나는, 뭐라고 이름붙일 수 없는 또 다른 세계, 사물들과 이미지의 세계는 우리에게 블랙홀이 된다.(p. 9)

; 한글을 깨우치는데 힘겨운 아이들이 있다. 특별히, 상대적으로 기호(symbol)에 약한 아이들 얘기인데, 그 아이들은 아마도 이 분별력이 제 힘을 발휘하려 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아이들은 분절된 틈새를 느끼거나 보거나 듣는 아이들인지도 모른다. 그런 아이들에게 분절의 인식을 심어 주는 것은 어쩌면 비극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사각형의 세상을 무리없이 살아가려면, 존재와 존재의, 사물과 사물의 틈새를 바라볼 수 있는 풍요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 그러나 기호란 익혀야 할 그 무엇이다. 그러한 아이들을 위한 동화의 모티브로, 위의 부분은 적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 이 풍성한 세계로의 여행

--> ////////////////////

분명하고 명료한 세계의 합리성, 혹은 안정성.        블랙홀에 빠지는 모험. ^^;

-집은 모든 길의 출발점이고 도착점이다. 그것은 生家에서 시작해서 무덤으로 끝나는 두 개의 점들 사이에 놓이는 간이역들이다. 집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만 달아나는 길들, 그 흘러가는 선 위에 정지된 점을 찍어두는 일과 같다. 그래야 우리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할 수 있고,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를 말할 수 있다.

........

여행은 이러한 집을 떠나서 길에 몸을 맡기는 것이지만, 그 길의 시적과 끝에는 언제나 집이 있다. 여행자는 돌아오기 위해서 길을 떠나는 것이다. 정처없이 발길 닿는 대로 떠나는 여행에서도 이 점은 다르지 않다. 집을 아예 버리고 떠나는 家出조차도. 새 삶을 위한 새로운 집으로의 도착이 전제되어 있다.(p. 82~83)

; 좀처럼 여행을 가지 않는다는 이 사람. 조각가다. 아마 책 뒷표지에서 위 글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 책을 선뜻 들지 않았으리라. 이미 알고 있던 바도 있지만, 한동안 잡지사기자였던 이력이 드러나는 글솜씨다. 그러나, 자꾸 본말전도에 빠지고마는 그의 글쓰기는 중간중간 읽는 흐름을 끊었다. '식탁'은 '다리'를 소외시키고자 생긴 것이 아니며, '의자'역시 그러하고(허리를 위해서고),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는 소리는 위협하기 위해 쓰이기 보다는(효과가 있지만) 장난하기 위해 쓰는 말이다.

우리 주위의 사물들.  대개는 네발짐승이 직립함으로써 생긴 기제들일 것이다. 그래서 이 이의 말들이 사물의 뒷면에 대한 것들이라고는 말 못하겠다. 

-사람의 손에서 바닥으로 막 떨어진 손수건은 방금 자신을 붙들고 있던 손가락들의 흔적과 가볍고 부드러운 천조각으로서의 자신의 본성 사이에서 결정을 못한 채 망설이다가 일시에 멈춘 모습을 보여 준다. 손수건에게 주어졌던 그 찰나의 자유가 그것에 유일무이한,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어떤 형태를 불어 넣는다. 아, 사물들이란 어쩌면 하나같이 이토록 우리를 떠날 궁리들만 하는 것일까. 잠시만 손 밖으로 미끄러져도 그놈들은 제가 하고 싶은 모습으로 변신을 하고 가능만 하다면 눈에 안 띄는 구석으로 은신하고 싶어 한다. 우리가 아무리 사물들에게 정을 들여도 허사일 뿐, 그들은 언제라도 우리를 떠날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p. 189)

;과연 그렇다. 놀란 것은 이 이가 잃어버린 우산을 이야기했을 때다. 그 기억은 내게 있어도 어찌나 명료한지, 혹시 내 우산이 그가 잃어버렸다는 그 우산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마주침은 가끔 독서 중 일어나는 경험인데, 그때마다 나도 모르게 우주가 신비해진다. 

-구겨져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 속에는 명료하게 파악되는 어떤 내적 질서가 없다. 그 안에는 우연히 포착된 허공, 빈 공간 말고는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다.(p. 189)

;이것을 형상화한 그의 작품을 도판으로 본다. 이런 설명이 필요한 작품이다. 조각이나 그림을 볼 때, 이런 부대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이 슬프기는 하지만 또한 누림의 영역이 한발짝 더 펼쳐지는 것 같아서 책을 읽는 재미가 배가된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이 좋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