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의 먹이사슬 -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이득을 보는 사람들
베른하르트 푀터 지음, 정현경 옮김 / 이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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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의 원인을 보통 온실효과로 생각한다. 기름과 석탄을 땔 때 나오는 이산화탄소가 그 주범으로. 당연히 석유와 화학 에너지를 생산하는 업체들을 공범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덕에 이로운 문명을 누리고 있다면 과연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그런데 기후변화의 가해자였던 기업들이 이제는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에너지 가격은 그만큼 상승하고 있고, 원료도 그만큼 부족한 상황이고, 기후변화의 법률들이 점점 더 까다롭게 강화되고 있는 까닭이다.



그에 비하면 원자력 산업은 그야말로 지구온난화와는 거리가 있다. 그야말로 기후변화에 빛을 볼 수 있는 산업이다. 그러나 일본의 지진 여파로 그것 역시 도마 위에 올라 있다. 한 번 터지면 미래 세대까지 위협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베른 하르트 푀터의 <기후변화의 먹이사슬>은 기후변화의 가해자와 피해자, 그 속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을 추적하고, 향후 기후변화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지 깨닫게 하는 책이다. 기후변화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기보다 기후변화의 문제에 대해 도덕적이고도 계몽적인 성격으로 써 내려간 것이다.



보통 '지구온난화'하면 과학적으로 규명하기에 급급했다. 지구 온도가 올라가면 그만큼 빙하가 많이 녹아내려 해수면이 급상승한다고 세계 언론은 떠들어댔다. 그런데 그 일이 자연재해에 따른 일이 아니라, 지극히 인재(人災)라는 데에 이 책은 주목하고 있다. 더욱이 기업후원을 받고 있는 과학자들은 기후변화보다는 유해물질 쪽으로 논쟁을 이끈다고 지적한다.



독일 연방 산하의 <세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자문 위원회(WBGU)>는 2030년 페루의 안데스 산맥이 가뭄으로 황폐화 되고, 남아프리카는 2020년부터 식량 생산량이 인구증가율을 따라가지 못하고, 중국은 2025년부터 진주강 일대의 삼각주가 심각한 태풍과 홍수로 황폐해질 것이고, 금세기 중반에 북아프리카의 식량사정이 악화되어 대부분 유럽 쪽으로 인구이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물론 WBGU 전문가들은 그런 묵시록적 예언들이 현실이 안 될 것을 바라고 있다. 모두가 지혜를 모아 기후변화에 대한 대책을 내놓는다면 가능하다고 한다. 전 세계가 하나의 공동체로 뜻을 모으고, 협력 시나리오를 가동하면 된다는 게 그것이다. 이를 위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전 세계적으로 많이 내 품고 있는 미국, 그리고 중국은 그것을 최대한 제한해야 할 것이다. 세계 일류 국가들이 환경국가를 위해, 그리고 가난한 나라들을 위해 애써야 할 이유가 그것임을 밝혀주고 있다.



"선진국의 경우 기후변화로 폭염, 식중독, 알레르기 등이 발생하지만, 그로 인한 피해는 당국의 조치로 예방하거나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반면, 빈곤 국가에서는 기후변화가 흉작과 기근, 전염병, 자연재해로 인한 사망 등에 영향을 미쳐 주민의 생명의 위태롭게 한다. …그러므로 기후변화는 세계적으로 이미 양극화된 공중 보건 분야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기후변화는 본질적으로 서구 선진국 때문에 발생했다. 따라서 가난한 나라 빈곤층이 기후변화에 대한 저항력을 키우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193쪽)



아무쪼록 이 책은 기후변화에 관해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상식과 통념을 깨부수고 있다. 기후변화의 가해자였던 기업들이 이제는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지적을 비롯해, 열대우림에서는 조림산업이 지구의 허파 역할을 감당하지만 온대나 냉대 지역에서는 이산화탄소를 내 품는 격이 되고, 스웨덴 같은 곳에서는 조림산업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는 지적 등, 다각적인 시각에서 기후변화의 관계를 밝혀주고 있다.



다만 그가 이야기하듯이, 기후변화로 인해 선진국 투자 회사들이 돈을 긁어모으는 재미를 맛보는 동안 빈곤 국가들은 점점 홍수와 기근과 물 부족 때문에 아사 생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기후변화가 지구 곳곳에서 반정부 시위를 일으키는 핵심 의제가 될 것도 의미심장하다. 결국,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기후 변화에, 온실이 되어 버린 지구 안에, 공의가 살아 숨 쉬게 하려면 정치적인 해법만이 묘책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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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영토, 인구 -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 난장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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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는 자유주의를 넘어 신자유주의 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정리해고, 대량실업, 극심한 빈부격차, 세계적인 전자정부의 통제, 세계인구의 대량 청소 등이 그것이다. 가히 신자유주의 시대의 폭력이 우리사회 곳곳에서 옥죄고 있다.



그것은 자본과 시장질서 속에서 자유롭게 일어나는 경제학적 구조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다. 세계 모든 이들이 주지하듯이, 정치적인 실리관계가 더 확실한 지배체제로 서 있다. 그런 점들을 도외시한 채 단순한 시장접근 방식으로 신자유주의 체제를 이해한다는 것은 뜬구름 잡는 일이다.



미셸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는 홀로 자립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사다리를 부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 담론이다. 그것이 통치성의 개념으로 대두되는 바, 규율권력과 생명관리권력을 종합한 담론서이기도 하다. 감시와 처벌, 그리고 성의 역사를 하나로 통합한 게 그것이다.



푸코는 그런 통치성이 전체화하는 동시에 개별화 전략으로 나타난다고 꼬집는다. 이른바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빌미로 전체적인 감시체계를 발동하고, 그와 동시에 한 개인의 사소한 내용까지도 수시로 침투한다는 게 그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친 이후에는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전면화된 복종의 장'에 다다르게 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2세기경에 등장한 그리스도교의 사목제도 속에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중심한 16세기의 통치술에도, 중상주의로 대표되는 17세기에도 대두되었다고 평가한다. 물론 시대를 달리하여 색다른 옷을 껴입긴 했지만 그 속에는 언제나 규율과 생명관리라는 통치성이 그 근간이었음을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사목적 통치의 특성은 이렇습니다. 요컨대 전반적으로 사목적이라 할 수 있는 권력이 그리스도교 시대 내내 정치권력과 분리된 채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종교 권력이 개인의 영혼만을 돌보는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와 달리 사목권력은 영혼의 인도가 어떤 개입, 곧 일상의 품행과 생활의 관리에 대한 지속적인 개입, 재산·부·사물에 대한 지속적인 개입을 포함하는 한에서만 개인의 영혼을 돌봅니다."(223쪽)



이는 이 책의 제 5강부터 9강 전반에 기술하고 있는 사목제도의 권력 기술에 관한 내용이다. 특별히 사목 권력을 '좋은품행'으로 진단한 그의 지적은, 하버마스가 이야기했듯이, 지극히 '소장 보수주의자'의 견해로 비칠 수 있다. 반면에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반종교개혁 진영 안에서조차 '대항품행'이 등장했다고 진단한 것은 그의 진보주의적인 시각도 반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책의 제 10강부터 13강까지는 국가 이성에 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 역시 경제적 통치성과 깊은 연관이 있는 강론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비용과 수익에 의해 통치당하고 있는 '호모에코노미쿠스'에 대한 견해이기도 하다. 오늘날 국가 운영 전반에 감시와 통제를 적용하는 것도 그 일환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그에 대한 해체를 위해 기술하려고 했던 '혁명적 주체성의 역사'는 그의 때 이른 죽음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시 문제, 그것은 단순한 안전 공간과 환경 문제 차원으로만 해결하는 게 아니다. 그 밑바탕에는 안전과 환경을 빌미로 한 통제성이 놓여 있음을 갈파해야 한다. 아울러 17-18세기에 대두되었던 식량문제와 천연두 문제가 신자유주의 시대 말미에는 신종 질병과 감염이라는 문제 속에서 쓸모없는 인구의 대량청소라는 명분도 얻게 될 것이다. 생명에 관한 경외와 주체성의 윤리는 뒷전으로 밀려난 채 말이다.



그렇기에 이 시대의 위기 속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자세는 푸코가 바라봤던 대항품행의 또 다른 형식을 취하는 것, 곧 전면화된 복종의 장을 해체하여 스스로의 주체성을 세워가는 일에 달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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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민 지음
신국판|756쪽|컬러|


다산의 재발견
다산은 어떻게 조선 최고의 학술 그룹을 조직하고 운영했는가?





새로 발굴한 다산 친필첩으로
넓고 깊은 다산학의 새 지평을 열다





1. 인문학자 정민, 다산의 생생한 육성을 담은 친필첩을 발굴하다
― 다산 친필 편지의 발굴과 연구, 집필로 이어지는 필드 워크




역사의 현장 속으로 뛰어들어 전근대 자료와 사투를 벌이고, 자료 발견의 기쁨으로 연구에 몰두하여 논문을 쓰고, 여러 편의 논문을 새로운 관점으로 넓게 조망하거나 깊게 파고들어, 과거를 현재에 적용하는 연구와 집필을 지속하고 있는 인문학자 정민. 그가 근 5년 이상 집요하리만큼 다산의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한 글 22편을 모아 엮은 《다산의 재발견》을 펴냈다. 이 책은 1801~1818년까지 강진 유배 시기 다산의 생생한 육성을 담은 친필 편지를 발로 뛰며 찾아내, 이를 연구하고 정리하여 ‘사람 냄새 나는’ 다산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책이다.


다산의 강진 유배 시기, 그의 나이 40세에서 57세에 이르는 시기에 교유했던 수많은 제자, 승려, 자녀에게 쓴 시, 산문 등의 조각난 친필 편지(서첩)의 퍼즐을 앞뒤의 역사적 맥락, 좌우의 문화적 맥락, 전후의 개인적 맥락 속에서 맞춰내 다산의 면모를 재구성하고 있다. 다산 친필 편지의 발굴과 연구, 집필로 이어지는 다산 정약용 필드워크는 우리 시대 인문정신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지난 4, 5년간 나는 한사코 다산만 쫓아다녔다. 이제 그간의 글을 모아 엮으면서 이 글에 바탕이 된 자료들을 찾아 헤매던 시간들을 정리해볼 필요를 느낀다. 나 자신 자료를 구하려고 동분서주한 기억들을 갈무리하는 한편, 현장 공부의 중요성에 대해 후학들에게 몇 마디 군말을 덧붙이는 것도 의미 없지 않겠다는 판단에서다. 이는 소중히 간직해온 귀한 자료를 선뜻 혹은 우여곡절 끝에 제공해주어, 다산학의 새 지평을 여는 보람을 얹어주신 소장자 여러분에 대한 내 작은 예의의 표시이기도 하다.
― 본문 17~18쪽, 〈서설:다산의 자취를 찾아 헤맨 여정〉에서


2. 지은이 소개



정 민 충북 영동 출생. 현재 한양대 국문과 교수다. 무궁무진한 한문학 자료를 살아 있는 유용한 정보로 바꾸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꼼꼼히 읽어 《비슷한 것은 가짜다》와 《고전 문장론과 연암 박지원》을 펴냈다. 18세기 지식인에 관한 연구로는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과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미쳐야 미친다》 등이 있다. 또 청언소품(淸言小品)에 관심을 가져 《마음을 비우는 지혜》, 《내가 사랑하는 삶》,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돌 위에 새긴 생각》, 《다산어록청상》, 《성대중 처세어록》, 《죽비소리》 등을 펴냈다. 이 밖에 옛 글 속 선인들의 내면을 그린 《책 읽는 소리》, 《스승의 옥편》 등의 수필집과 한시 속 신선 세계의 환상을 분석한 《초월의 상상》, 문학과 회화 속에 표상된 새의 의미를 찾아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조선 후기 차 문화의 모든 것을 담아서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등을 썼다. 아울러 한시의 아름다움을 탐구한 《한시 미학 산책》과 어린이들을 위한 한시 입문서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가 있고, 사계절에 담긴 한시의 시정을 정리한 《꽃들의 웃음판》도 썼다.



4년 넘게 몰입해온 다산 관련 논문을 한자리에 모았다. 다산 친필이 있다는 말만 들으면 어디든 찾아갔다. 새 자료를 수소문해서 만나고, 정리해서 번역하고, 논문으로 썼다. 손에 못 넣으면 안절부절 몸이 달았다. 곁에서 보다 못한 아내가 혀를 찼다. 도도하던 사람이 자료 앞에선 왜 그렇게 속도 없이 비굴해 지느냐고, 보기 민망하다고 나무랐다. 그런 소리를 들은 다음 날도 친필 편지 한 장이 나왔다는 소식에 하던 일 비켜두고 카메라를 들고 달려갔다. 그렇게 모은 자료로 쓴 논문이 20편을 퍽 넘겼다. 지금도 나는 새 자료 소식만 들리면 어디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
― 본문 5쪽 〈머리말〉에서


3. 새로 발굴한 다산 친필첩으로 다산학의 새 지평을 열다
― 이 책의 개요




지은이가 5년 이상의 연구 기간 동안 발굴하고 찾아낸 다산의 친필 편지는 150여 통이다. 황상에게 준 다산의 친필 편지 31통을 모은 《다산여황상서간첩(茶山與黃裳書簡帖)》, 혜장과의 교유 내용이 담긴 《견월첩》, 다산이 월출산을 등반하고, 백운동의 12경을 친필로 써주고, 앞뒤에 초의를 시켜 〈백운동도〉와 〈다산도〉를 그리게 해 첨부한 《백운첩(白雲帖)》, 다산이 호의에게 보낸 편지첩 《매옥서궤(梅屋書匭)》, 다산과 은봉의 교유를 담은 《만일암지(挽日菴志)》 등이다.


그의 다산 연구는 2006년 겨울 첫 선을 보였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이다. 이 책은 다산 정약용의 지식 생산 메커니즘을 일목요연하게 매뉴얼화하여 다산을 지식편집의 관점으로 묶어내 주목받았다.


이번에 발간된 《다산의 재발견》은 그 두 번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새로 발굴한 다산 친필첩을 ‘다산의 강진 강학과 제자 교육’, ‘다산의 사지 편찬과 불승과의 교유’, ‘다산의 공간 경영과 생활 여백’, ‘다산 일문의 행간과 낙수’ 4개의 영역으로 분류하여 22개의 논문으로 깊이 있게 각론화했다. 또한 각각의 글을 가로세로로 엮으며 횡단하고 있어 강진 유배기의 다산학을 깊고 넓게 들여다보고 있다.



다산은 대단히 곰살궂은 사람이었다. 그의 취미는 조각 천이나 종이를 오려 공책을 만들고, 거기에다 정성스레 글씨를 써서 선물하는 것이었다. 이런 취미는 그의 아들에게도 그대로 대물림되어, 부자가 남긴 아름다운 서첩이 참 많다. 이런 자료들은 어쩐 일인지 대부분 문집에 수록되지 않았다. 연대도 분명하고, 사연도 진진해서, 이런 자료들이 다산학의 결락된 부분들을 메워주고 채워주는 것이다.
― 본문 49쪽 〈서설:다산의 자취를 찾아 헤맨 여정〉에서



4. 다산은 어떻게 조선 최고의 학술 그룹을 조직하고 운영했는가?

― 이 책의 특징 1



다산은 1801년 강진에 귀양 와서 1818년 여유당으로 돌아갔다. 40세에서 57세에 이르는 시기였다. 개인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조선의 학문을 위해서는 축복의 시간이었다. 강진에서 다산은 훗날 다산학단(茶山學團)으로 일컬어지는 제자들을 양성하고, 50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함께 완성하였다. 학문의 불모지였던 강진에 경이의 눈길이 쏠렸다. 학술사에서 불가사의로 일컬어지는 놀라운 성과는 제자들의 헌신적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했다. 다산 없는 제자나 제자 없는 다산은 어느 경우든 상상하기 어렵다. 다산은 초당 정착 초기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자들에 대해 “양미간에 잡털이 무성하고, 온몸에 뒤집어쓴 것은 온통 쇠잔한 기운뿐”이며, 발을 묶어놓은 꿩과 같아 “쪼아 먹으라고 권해도 쪼지 않고 머리를 눌러 억지로 곡식 낟알에 대주어서 주둥이와 낱알이 서로 닿게 해주어도 끝내 쪼지 못하는 자들”이라고까지 말했다. 다산은 그들을 도대체 어떻게 가르쳐서 단기간에 조선 학술사에서 달리 유례를 찾기 어려운 놀라운 학술집단으로 변모시킬 수 있었을까?



다산의 제자 교학방식을 단계별, 전공별, 맞춤형, 실전형, 토론형, 집체형 등 여섯 범주로 나누어 살폈다. 단계와 수준에 따라 효과적인 로드맵을 제시하고, 제자의 개성을 고려하여 전공을 정해주었다. 성격이나 신분을 따져 각자에게 맞는 맞춤형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부단한 실전 연습 과정에서 작은 성취도 진작(振作) 고무시켰고, 태만은 매섭게 야단쳤다. 토론을 통해 문제의식을 예각화하고, 작업의 핵심가치를 장악했다. 그러고는 조직적인 시스템을 갖추어 집체 작업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완수해냈다. 그 결과 잔털이 부숭부숭하던 촌학구들이 중앙 학계에 내놓아도 조금도 꿀리지 않는 큰 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다산이 제자 훈련과정을 자신의 작업과정과 일치시킨 점도 놀랍다. 다산은 작업의 원동력을 제자를 통해 얻었고, 제자들은 스승의 방법론과 작업 과정에 동참하면서 작업의 노하우를 익혔다. 서로 윈윈의 모양새를 갖추었던 것이다. 다양한 방식들의 이상적인 조합이 작업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시너지 효과를 창출했다. 다산의 교학 방식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대단히 체계적이다.
― 본문 13~14쪽, 〈강진 강학과 제자 교학 방식〉에서


5. 다산 친필 편지, 19세기 다산이 일거수일투족을 복원하다
― 이 책의 특징 2




조선에서 문집을 편찬할 때 편지글은 편집 작업을 거친다.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다. 편지의 내용 외에 글을 쓰는 사연, 쓴 날짜 등을 삭제한 뒤에 문집에 게재한다. 지은이가 새로 발굴한 다산이 직접 쓴 150여 통의 친필 편지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문집에 없는 것이 많다. 그런 자료에는 당시의 개인의 성정, 편지글의 사연, 날짜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자료적 문화적 가치가 상당하다.


이러한 편지들은 그 동안 볼 수 없거나, 보이지 않던 곳의 앞뒤가 이어지고, 이야기가 복원되고, 인과의 사연이 맥락에 따라 구성된다.


제자, 자녀에게 쓴 편지글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혜장, 초의 등의 승려와 교유한 글도 상당하다. 즉 불교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다산이 승려들과 친하게 지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성리학을 공부하는 선비로서 승려와 나눈 편지는 스스로 검열하여 문집에서 누락시켜야만 했다. 이런 사연을 담은 편지들이 발굴되면서 문화사의 빈자리가 메워진다. 이렇게 진열장 안에 핏기 없이 놓여 있던 편지 한 장, 시 한 수가 하나하나 모이자 자료들 나름대로 방향을 제시하게 된다. 무관하던 것들 사이에 네트워크가 생겨나고, 다른 방식으로 소트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그려내는 과정에서 두 가지는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연구 과정을 통해 그때까지의 지은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문학자 정민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자료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는 지은이의 연구 및 저술 방식이다. 엄밀한 이론 하에 다양한 자료들을 끼워넣는 것도 아니고 수많은 자료들을 들이대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지은이는 스스로 가장 본질적이라 믿는 관점으로 다양한 자료들을 배열함으로써 그 자료들이 이리저리 부딪치게 만드는 것이다.



흩어졌던 자료들이 숨어 있다가 한꺼번에 튀어나와 한 실에 서 말 구슬이 꿰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2003년 학고재에서 개최한 〈유희삼매〉전에 전시되고, 같은 제목의 책에 도판으로 수록된 〈여성화시첩(與聖華詩帖)〉 10수는 시문집에는 누락된 작품이었다. 흥미롭기는 한데, 앞뒤 맥락이 닿지 않고 내용 중에 이해가 안 되는 대목도 있었다. 이성화란 이름을 이리저리 찾아봐도 다른 기록이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앞서 말한 이을호 박사 구장 《정다산선생행서첩》을 강기욱 선생을 통해 받고 내용을 검토하는데 흥미롭게도 〈송이성화장귀서(送李聖華將歸序)〉란 글이 실려 있었다. 필치나 글씨 크기로 보아 같은 시기에 다산이 한 사람에게 써준 글씨였다.


2009년 6월 인사동 공화랑에서 〈안목과 안복〉이란 이름으로 전시가 열렸다. 그 얼마 전 유홍준 선생과의 대화에서 다산 관련 자료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이를 기억한 유 선생께서 공화랑에 다산 글씨가 나왔는데, 가서 한번 보라는 전갈을 주셨다. 그쪽에 자료를 보여주라고 이야기를 해두겠노라고 했다. 바로 달려가서 보니 〈여성화초천사시사첩(與聖華苕川四時詞帖)〉이었다. 수신자가 이성화였다. 액자의 유리 때문에 일단 본문만 알아볼 수 있도록 촬영해 와서 검토에 들어갔다. 앞서 〈여성화시첩〉을 읽었을 때 맥락이 닿지 않던 말이 뒤쪽 〈여성화초천사시사첩〉을 읽으니 비로소 소연해졌다. 둘은 원래 묶여 있던 하나의 서첩이었다.……원래 하나의 첩에 묶여 있던 것이 셋으로 떨어져 전혀 다른 문맥으로 전해오다가, 근 200년 만에 한자리에 다시 만나 비로소 조리와 문맥을 갖추게 되었던 셈이다.……다산이 자꾸 내게 무언가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 본문 34~36쪽 〈서설:다산의 자취를 찾아 헤맨 여정〉에서




[출처] Humanist [다산의 재발견] ☆ (북뉴스 ◈책과서평 전문카페◈ 베스트셀러 인기소설 시) |작성자 세라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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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버린 나라 - 코스타리카 사람들의 평화 이야기
아다치 리키야 지음, 설배환 옮김 / 검둥소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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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 우리나라는 병영 구타로 모두가 곤혹을 치뤘다. 물 폭탄과 무상급식과 한진중공업사태 때문에 잠시 그것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듯 하다. 하지만 군대가 존재하는 한 그 병영 구타는 언제든 다시 수면 위에 떠오를 것이다.

나도 경기도 연천군 삼곳리에서 전방 철책근무를 서다가 고참한테 얻어 맞은 적이 있다. 제 시간에 맞춰 완전무장을 못 했다며 군화발로 무릎이 까인 게 그것이었다. 그때 맞은 후유증을 지금도 앓고 있어서 '그 고참'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병영구타는 내게 추억이나 향수가 될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병영구타를 막는 길은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군대를 아예 없애는 게 그것.

그렇게 이야기하면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할지 모르겠다. '빈대 잡자고 초가를 태우겠느냐'고. 군대가 없어지면 누가 우리나라를 지키겠냐며 비난할지 모르겠다. 북한이 쳐들어오면 누가 막겠느냐고, 국제사회에 어려움을 당한 나라들을 위해 우리의 평화유지군은 또 어떻게 보내겠느냐며, 따져 물을지 모르겠다.

아다치 리키야가 쓴 〈군대를 버린 나라〉는 코스타리카 사람들이 맞이한 '적극적'인 평화이야기다. 그 나라는 그야말로 군대를 없앴다. 굳이 내가 '적극적'이라고 말한 것은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할 때 그들 국민들은 대부분 반대 의사를 내비쳤고, 그곳의 대통령이 미국을 지지할 때 한 대학생이 나서서 자국 대통령의 태도를 비정상적이라 여겨 법원에 제소하여 승소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그 나라가 국제사회에 평화를 위한 목소리를 내기까지, 자국 내부에서는 어떻게 평화체제를 구축해왔는지 이 책은 낱낱이 보여준다.

그들은 어떻게 군대를 폐기했을까? 사실 코스타리카가 스페인 지배체제로부터 독립한 것도 '아닌 밤에 홍두깨' 격이었다고 한다. 1821년에 과테말라가 스페인과 싸워 독립을 쟁취할 무렵, 그 나라도 덩달아서 독립을 한 게 그것이다. 1838년에는 중남미 연방에서 탈퇴했고, 그 뒤 1940년대에는 격동의 시대를 맞이했다고 한다. 부유층의 공화당과 빈곤층의 공산주의 인민전위당, 그리고 독자권력을 가진 가톨릭교회가 서로 상충한 게 그것이다.

1948년에 시행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사회적 혼란과 내전을 불러왔는데, 그 틈을 비집고 나선 농장주가 있었으니 호세 피게레스 페레르(Jose Figueres Ferrer)가 그였다고 한다. 그는 과테말라의 아레발로 대통령과 '카리브 협정'을 체결하여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 지역의 독재정권을 차례로 무너뜨릴 심사였다고 한다. 결국 그런 과정으로 정권은 장악했지만 내전으로 2천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여, 그 돌파구를 위해 '병영을 박물관으로 바꿉시다'는 전 국민적인 제언을 했다고 한다. 1949년 11월 7일, 새 헌법 반포와 함께 '항구적 조직으로서 군대는 금지한다'는 조항이 시행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역사에 '만약에'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만약에'가 제기된다면 재밌는 상상들을 할 수 있다. 만일 전두환 소장이 정권을 잡은 뒤에 정권 연장의 아름다운 승인을 얻기 위해 피게레스처럼 군대 폐지를 선언했다면 어땠을까? 아니, 그 이전의 일본군 출신으로서 '전투력 불유지' 내용이 들어 있는 일본의 '평화헌법'에 대해 알고 있었을 박정희가 권좌에 오른 뒤에 군대를 폐지하고 평화헌법 조항을 넣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냉전 체제에서 미국의 눈치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밉게 보였다가는 권좌에서 쉽게 물러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러나 그때 그런 조치를 취했다면 오고 오는 세대에, 아니 전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지 않았을까. 사실 코스타리카도 그 당시 미국의 견제와 압력을 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미국과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설득하여 군대를 폐지해 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다치는 그 정도만 알고 있으면 코스타리카를 아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저 표층적으로만 알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좀 더 심층적으로 그 나라를 알기 위해, 그는 일본 돈 100만 앤을 모은 뒤, 1991년 1월 직장에 사표를 내고 코스타리카로 날아가 2년 동안 그곳의 대학원에서 공부하며 깊이 있게 그 나라를 파헤치게 된다. 그 나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세와 양식과 관습과 문화와 정치와 경제와 외교 등 전반적인 것들을 훑고 다닌 게 그것이다.

그가 코스타리카에 파고들어 면면히 알게 된 건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그 나라야말로 민주주의 꽃을 피우고 있는 나라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곳의 대통령은 경호원도 하나 없이 소탈한 복장으로 산책을 즐기면서 다니고 있고, 국회 방청객엔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고, 국회 심의 법안과 의사록에 관한 정보도 누구나 쉽게 입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게 그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교도소엔 콘크리트로 된 담도 없을뿐더러, 교도소 내의 수감자가 자신의 파트너를 만나 '밀회'를 나눌 수 있도록 '사랑의 방'도 마련해 놓고 있고, 보험료 납부와 상관없이 국립병원에서는 돈 없이도 진찰과 치료를 받을 수 있고, 초등학교 놀이터를 그 학교 교장이 자기 주차장으로 삼는 것에 대해 아이들이 '놀이할 권리'를 내세워 그 학교 교장을 제소하여 승소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코스타리카였던 것이다.

더욱이 해발고도 1,400-1,800미터에 위치하고 있는 '몬테베르데'는 전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열대 운무림'을 펼쳐 보인다고 한다. 숲은 그만큼 울창하고, 바다 속은 그만큼 깊고 맑은 곳이 그곳이라는 것이다. 그곳에 있는 수목들 연령도 보통 100년은 넘는 것들이라고 한다. 그만큼 코스타리카는 자연과 숲과 생태계를 위해 정책적으로 보호 관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에코투어리즘으로 얼마나 많은 관광수입을 거둬들일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순수하고 소박한 생활과 인생을 좋다고 인식한다. 아등바등 하지 않고 '고만고만한 것이 좋다'는 삶의 태도를 추구한다. 이를 위해서 군대는 불필요하며, 오히려 군대란 과대한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므로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일찍이 대통령 비서관이 내게 가르쳐 준 '고만고만한 것'과 '군비 폐기'는 여기에서 사상적으로 연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푸라 비다'(Pura vida/ Pure life)야 말로 코스타리카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인식되는 심층 문화라고도 말할 수 있다."(201쪽)

군대가 없는 나라 코스타리카. 단순한 그 표층 아래에 어떤 심층이 깊게 자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곳의 민주주의는 우리나라처럼 단순한 말이나 겉치레에만 그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인권과 자연 환경과 자유 등 다양한 분야가 한데 어우러져 시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그들처럼 군대를 없애려면, 병영구타를 없애려면,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시행하도록 모두가 한데 뜻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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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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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이기주의, 예나 지금이나 그건 다를 게 없다. 왕을 위시한 권력 집단은 백성에게 떡고물을 주는 대신 영구집권을 꿈꾼다. 중간계층은 늘 상위권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을 찾는데 목을 멘다. 힘없는 군중들은 정치적인 야욕보다 배불리 먹고 사는 것에 만족한다.

그건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늘 되풀이 된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게 그것이다. 로마 집정관 체제도, 황제의 권력 체제도,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도 결코 다르지 않다. 다만 옛날에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신분상승제도가 있었지만 오늘날엔 그 일이 하늘에서 별 따기처럼 어렵다. 개인이 지닌 능력이 집단이 휘두르는 체제에 쉽게 정복당하기 때문이다.

<로마인 이야기>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시오노 나나미가 십자군 전쟁과 관련된 두 권의 책을 펴냈다. 한 권은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이고, 다른 한 권은<십자군 이야기1>다. 앞에 것은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장엄한 판화를 바탕으로 나나미가 짤막한 설명과 함께 전체적인 십자군 전쟁을 조명한 책이고, 뒤의 것은 본격적인 십자군 전쟁 이야기를 써 내려간 책이다.

그녀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오늘을 사는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한 이야기는 뭘까? 교황과 황제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 과도한 십자군 전쟁을 촉발시켰고, 자기 최면에 빠진 은자 피에르를 중심으로 무지한 군중들이 집단 최면에 이끌려 십자군 전쟁에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각각의 집단 이기주의가 십자군을 제창케 했다는 것이다. 그를 위해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를 통해 '성지 탈환'에 대한 일장 연설을 다음과 같이 했다고 한다.

"이슬람교도는 지중해까지 세력을 확장해 너희 형제를 공격하고, 죽이고, 납치해 노예로 삼고, 교회를 파괴하고, 파괴하지 않은 곳은 모스크로 바꾸고 있다. 그들의 폭력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지금이야말로 그들에게 맞서 일어설 때다. 이것은 내가 명하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명하는 것이다. 그 땅으로 가서 이교도와 싸워라. 설사 그곳에서 목숨을 잃는다 해도 너희의 죄를 완전히 용서받게 될 것이다. 신께 부여받은 권한으로 나는 여기서 그것을 분명히 약속한다."(24쪽)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를 보면 그야말로 웅장한 그림 하나가 등장한다. 거대한 십자군 무리들이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벅찬 감동에 전율하는 게 그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북유럽에서부터 먼 길을 거쳐 수많은 시련을 이겨내고 당도했으니,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나미는 그들 십자군 부대가 이슬람을 곧바로 공격하지 않고, 십자가를 앞세우고 줄지어 찬송가를 부르며 성벽 아래를 행진했다고 말한다.

더욱이 제 5차 십자군과 관련된 휴전 체결 이후, 술탄을 방문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손짓을 보여주는 판화는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수도사들은 대부분의 십자군 전투에 참전하여, 병사들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 주는 게 의무였다. 이탈리아 출신인 성 프란체스코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적 대장 술탄에게 직접 찾아갔던 것이다.

"당신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기 위해 신이 보내서 왔노라고 말하는 수도사에게 술탄도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을 그만두고 평화를 확립하는 길이라며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을 권유하는 젊은 수도사에게 술탄 휘하 사람들은 더할 수 없이 격양했다. 그러나 술탄은 미소 지으며 수도사를 그리스도교군 진영으로 무사히 돌려보내라고 명령했다."(140쪽)

다시 <십자군 이야기1>로 돌아와, 1099년 7월 15일에 드디어 십자군 부대가 예루살렘 성읍을 탈환하게 된다. 그야말로 원정을 떠난 지 3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었는데, 문제는 그 이후에 나타난다. 성을 점령하기 전까지는 서로가 한 데 뭉쳐서 하나로 공략해 들어갔지만, 성을 함락시킨 이후 18년 동안의 주도권 다툼이 그것이다. 더욱이 십자군을 제창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도 성지 탈환 소식을 접하지 못한 채 죽었기에,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대주교가 열중했던 것은, 예루살렘에 감추어져 있다고 전해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혔던 십자가였다. 사실은 그저 평범한 나뭇조각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이 나뭇조각을 끼워 맞춘 십자가는 '성십자가'(True Cross)로 불리며 이후 십자군이 군사행동을 할 때면 어디에나 받쳐 들고 다니게 된다."(243쪽)

이 이야기가 내게는 너무 재밌게 다가 왔다. 물론 그 당시에는 너무나도 경외감을 불러 일으켰을 법하다. 어쩌면 이때 발견된 나무 십자가 덕에 1571년 때까지, 최초의 십자군으로부터 5백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레파톤 해전까지, 피 터지는 전투에 임했는지도 모른다. 본래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힌 십자가는 자유와 해방의 십자가였다. 하지만 교황과 결탁한 권력의 수뇌부들은 그 당시의 나무 십자가를 그처럼 전쟁을 위한 십자가로 미화시켰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도 집단 이기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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