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민 지음
신국판|756쪽|컬러|
다산의 재발견
다산은 어떻게 조선 최고의 학술 그룹을 조직하고 운영했는가?
새로 발굴한 다산 친필첩으로
넓고 깊은 다산학의 새 지평을 열다
1. 인문학자 정민, 다산의 생생한 육성을 담은 친필첩을 발굴하다
― 다산 친필 편지의 발굴과 연구, 집필로 이어지는 필드 워크
역사의 현장 속으로 뛰어들어 전근대 자료와 사투를 벌이고, 자료 발견의 기쁨으로 연구에 몰두하여 논문을 쓰고, 여러 편의 논문을 새로운 관점으로 넓게 조망하거나 깊게 파고들어, 과거를 현재에 적용하는 연구와 집필을 지속하고 있는 인문학자 정민. 그가 근 5년 이상 집요하리만큼 다산의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한 글 22편을 모아 엮은 《다산의 재발견》을 펴냈다. 이 책은 1801~1818년까지 강진 유배 시기 다산의 생생한 육성을 담은 친필 편지를 발로 뛰며 찾아내, 이를 연구하고 정리하여 ‘사람 냄새 나는’ 다산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책이다.
다산의 강진 유배 시기, 그의 나이 40세에서 57세에 이르는 시기에 교유했던 수많은 제자, 승려, 자녀에게 쓴 시, 산문 등의 조각난 친필 편지(서첩)의 퍼즐을 앞뒤의 역사적 맥락, 좌우의 문화적 맥락, 전후의 개인적 맥락 속에서 맞춰내 다산의 면모를 재구성하고 있다. 다산 친필 편지의 발굴과 연구, 집필로 이어지는 다산 정약용 필드워크는 우리 시대 인문정신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지난 4, 5년간 나는 한사코 다산만 쫓아다녔다. 이제 그간의 글을 모아 엮으면서 이 글에 바탕이 된 자료들을 찾아 헤매던 시간들을 정리해볼 필요를 느낀다. 나 자신 자료를 구하려고 동분서주한 기억들을 갈무리하는 한편, 현장 공부의 중요성에 대해 후학들에게 몇 마디 군말을 덧붙이는 것도 의미 없지 않겠다는 판단에서다. 이는 소중히 간직해온 귀한 자료를 선뜻 혹은 우여곡절 끝에 제공해주어, 다산학의 새 지평을 여는 보람을 얹어주신 소장자 여러분에 대한 내 작은 예의의 표시이기도 하다.
― 본문 17~18쪽, 〈서설:다산의 자취를 찾아 헤맨 여정〉에서
2. 지은이 소개
정 민 충북 영동 출생. 현재 한양대 국문과 교수다. 무궁무진한 한문학 자료를 살아 있는 유용한 정보로 바꾸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꼼꼼히 읽어 《비슷한 것은 가짜다》와 《고전 문장론과 연암 박지원》을 펴냈다. 18세기 지식인에 관한 연구로는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과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미쳐야 미친다》 등이 있다. 또 청언소품(淸言小品)에 관심을 가져 《마음을 비우는 지혜》, 《내가 사랑하는 삶》,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돌 위에 새긴 생각》, 《다산어록청상》, 《성대중 처세어록》, 《죽비소리》 등을 펴냈다. 이 밖에 옛 글 속 선인들의 내면을 그린 《책 읽는 소리》, 《스승의 옥편》 등의 수필집과 한시 속 신선 세계의 환상을 분석한 《초월의 상상》, 문학과 회화 속에 표상된 새의 의미를 찾아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조선 후기 차 문화의 모든 것을 담아서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등을 썼다. 아울러 한시의 아름다움을 탐구한 《한시 미학 산책》과 어린이들을 위한 한시 입문서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가 있고, 사계절에 담긴 한시의 시정을 정리한 《꽃들의 웃음판》도 썼다.
4년 넘게 몰입해온 다산 관련 논문을 한자리에 모았다. 다산 친필이 있다는 말만 들으면 어디든 찾아갔다. 새 자료를 수소문해서 만나고, 정리해서 번역하고, 논문으로 썼다. 손에 못 넣으면 안절부절 몸이 달았다. 곁에서 보다 못한 아내가 혀를 찼다. 도도하던 사람이 자료 앞에선 왜 그렇게 속도 없이 비굴해 지느냐고, 보기 민망하다고 나무랐다. 그런 소리를 들은 다음 날도 친필 편지 한 장이 나왔다는 소식에 하던 일 비켜두고 카메라를 들고 달려갔다. 그렇게 모은 자료로 쓴 논문이 20편을 퍽 넘겼다. 지금도 나는 새 자료 소식만 들리면 어디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
― 본문 5쪽 〈머리말〉에서
3. 새로 발굴한 다산 친필첩으로 다산학의 새 지평을 열다
― 이 책의 개요
지은이가 5년 이상의 연구 기간 동안 발굴하고 찾아낸 다산의 친필 편지는 150여 통이다. 황상에게 준 다산의 친필 편지 31통을 모은 《다산여황상서간첩(茶山與黃裳書簡帖)》, 혜장과의 교유 내용이 담긴 《견월첩》, 다산이 월출산을 등반하고, 백운동의 12경을 친필로 써주고, 앞뒤에 초의를 시켜 〈백운동도〉와 〈다산도〉를 그리게 해 첨부한 《백운첩(白雲帖)》, 다산이 호의에게 보낸 편지첩 《매옥서궤(梅屋書匭)》, 다산과 은봉의 교유를 담은 《만일암지(挽日菴志)》 등이다.
그의 다산 연구는 2006년 겨울 첫 선을 보였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이다. 이 책은 다산 정약용의 지식 생산 메커니즘을 일목요연하게 매뉴얼화하여 다산을 지식편집의 관점으로 묶어내 주목받았다.
이번에 발간된 《다산의 재발견》은 그 두 번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새로 발굴한 다산 친필첩을 ‘다산의 강진 강학과 제자 교육’, ‘다산의 사지 편찬과 불승과의 교유’, ‘다산의 공간 경영과 생활 여백’, ‘다산 일문의 행간과 낙수’ 4개의 영역으로 분류하여 22개의 논문으로 깊이 있게 각론화했다. 또한 각각의 글을 가로세로로 엮으며 횡단하고 있어 강진 유배기의 다산학을 깊고 넓게 들여다보고 있다.
다산은 대단히 곰살궂은 사람이었다. 그의 취미는 조각 천이나 종이를 오려 공책을 만들고, 거기에다 정성스레 글씨를 써서 선물하는 것이었다. 이런 취미는 그의 아들에게도 그대로 대물림되어, 부자가 남긴 아름다운 서첩이 참 많다. 이런 자료들은 어쩐 일인지 대부분 문집에 수록되지 않았다. 연대도 분명하고, 사연도 진진해서, 이런 자료들이 다산학의 결락된 부분들을 메워주고 채워주는 것이다.
― 본문 49쪽 〈서설:다산의 자취를 찾아 헤맨 여정〉에서
4. 다산은 어떻게 조선 최고의 학술 그룹을 조직하고 운영했는가?
― 이 책의 특징 1
다산은 1801년 강진에 귀양 와서 1818년 여유당으로 돌아갔다. 40세에서 57세에 이르는 시기였다. 개인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조선의 학문을 위해서는 축복의 시간이었다. 강진에서 다산은 훗날 다산학단(茶山學團)으로 일컬어지는 제자들을 양성하고, 50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함께 완성하였다. 학문의 불모지였던 강진에 경이의 눈길이 쏠렸다. 학술사에서 불가사의로 일컬어지는 놀라운 성과는 제자들의 헌신적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했다. 다산 없는 제자나 제자 없는 다산은 어느 경우든 상상하기 어렵다. 다산은 초당 정착 초기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자들에 대해 “양미간에 잡털이 무성하고, 온몸에 뒤집어쓴 것은 온통 쇠잔한 기운뿐”이며, 발을 묶어놓은 꿩과 같아 “쪼아 먹으라고 권해도 쪼지 않고 머리를 눌러 억지로 곡식 낟알에 대주어서 주둥이와 낱알이 서로 닿게 해주어도 끝내 쪼지 못하는 자들”이라고까지 말했다. 다산은 그들을 도대체 어떻게 가르쳐서 단기간에 조선 학술사에서 달리 유례를 찾기 어려운 놀라운 학술집단으로 변모시킬 수 있었을까?
다산의 제자 교학방식을 단계별, 전공별, 맞춤형, 실전형, 토론형, 집체형 등 여섯 범주로 나누어 살폈다. 단계와 수준에 따라 효과적인 로드맵을 제시하고, 제자의 개성을 고려하여 전공을 정해주었다. 성격이나 신분을 따져 각자에게 맞는 맞춤형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부단한 실전 연습 과정에서 작은 성취도 진작(振作) 고무시켰고, 태만은 매섭게 야단쳤다. 토론을 통해 문제의식을 예각화하고, 작업의 핵심가치를 장악했다. 그러고는 조직적인 시스템을 갖추어 집체 작업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완수해냈다. 그 결과 잔털이 부숭부숭하던 촌학구들이 중앙 학계에 내놓아도 조금도 꿀리지 않는 큰 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다산이 제자 훈련과정을 자신의 작업과정과 일치시킨 점도 놀랍다. 다산은 작업의 원동력을 제자를 통해 얻었고, 제자들은 스승의 방법론과 작업 과정에 동참하면서 작업의 노하우를 익혔다. 서로 윈윈의 모양새를 갖추었던 것이다. 다양한 방식들의 이상적인 조합이 작업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시너지 효과를 창출했다. 다산의 교학 방식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대단히 체계적이다.
― 본문 13~14쪽, 〈강진 강학과 제자 교학 방식〉에서
5. 다산 친필 편지, 19세기 다산이 일거수일투족을 복원하다
― 이 책의 특징 2
조선에서 문집을 편찬할 때 편지글은 편집 작업을 거친다.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다. 편지의 내용 외에 글을 쓰는 사연, 쓴 날짜 등을 삭제한 뒤에 문집에 게재한다. 지은이가 새로 발굴한 다산이 직접 쓴 150여 통의 친필 편지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문집에 없는 것이 많다. 그런 자료에는 당시의 개인의 성정, 편지글의 사연, 날짜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자료적 문화적 가치가 상당하다.
이러한 편지들은 그 동안 볼 수 없거나, 보이지 않던 곳의 앞뒤가 이어지고, 이야기가 복원되고, 인과의 사연이 맥락에 따라 구성된다.
제자, 자녀에게 쓴 편지글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혜장, 초의 등의 승려와 교유한 글도 상당하다. 즉 불교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다산이 승려들과 친하게 지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성리학을 공부하는 선비로서 승려와 나눈 편지는 스스로 검열하여 문집에서 누락시켜야만 했다. 이런 사연을 담은 편지들이 발굴되면서 문화사의 빈자리가 메워진다. 이렇게 진열장 안에 핏기 없이 놓여 있던 편지 한 장, 시 한 수가 하나하나 모이자 자료들 나름대로 방향을 제시하게 된다. 무관하던 것들 사이에 네트워크가 생겨나고, 다른 방식으로 소트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그려내는 과정에서 두 가지는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연구 과정을 통해 그때까지의 지은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문학자 정민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자료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는 지은이의 연구 및 저술 방식이다. 엄밀한 이론 하에 다양한 자료들을 끼워넣는 것도 아니고 수많은 자료들을 들이대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지은이는 스스로 가장 본질적이라 믿는 관점으로 다양한 자료들을 배열함으로써 그 자료들이 이리저리 부딪치게 만드는 것이다.
흩어졌던 자료들이 숨어 있다가 한꺼번에 튀어나와 한 실에 서 말 구슬이 꿰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2003년 학고재에서 개최한 〈유희삼매〉전에 전시되고, 같은 제목의 책에 도판으로 수록된 〈여성화시첩(與聖華詩帖)〉 10수는 시문집에는 누락된 작품이었다. 흥미롭기는 한데, 앞뒤 맥락이 닿지 않고 내용 중에 이해가 안 되는 대목도 있었다. 이성화란 이름을 이리저리 찾아봐도 다른 기록이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앞서 말한 이을호 박사 구장 《정다산선생행서첩》을 강기욱 선생을 통해 받고 내용을 검토하는데 흥미롭게도 〈송이성화장귀서(送李聖華將歸序)〉란 글이 실려 있었다. 필치나 글씨 크기로 보아 같은 시기에 다산이 한 사람에게 써준 글씨였다.
2009년 6월 인사동 공화랑에서 〈안목과 안복〉이란 이름으로 전시가 열렸다. 그 얼마 전 유홍준 선생과의 대화에서 다산 관련 자료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이를 기억한 유 선생께서 공화랑에 다산 글씨가 나왔는데, 가서 한번 보라는 전갈을 주셨다. 그쪽에 자료를 보여주라고 이야기를 해두겠노라고 했다. 바로 달려가서 보니 〈여성화초천사시사첩(與聖華苕川四時詞帖)〉이었다. 수신자가 이성화였다. 액자의 유리 때문에 일단 본문만 알아볼 수 있도록 촬영해 와서 검토에 들어갔다. 앞서 〈여성화시첩〉을 읽었을 때 맥락이 닿지 않던 말이 뒤쪽 〈여성화초천사시사첩〉을 읽으니 비로소 소연해졌다. 둘은 원래 묶여 있던 하나의 서첩이었다.……원래 하나의 첩에 묶여 있던 것이 셋으로 떨어져 전혀 다른 문맥으로 전해오다가, 근 200년 만에 한자리에 다시 만나 비로소 조리와 문맥을 갖추게 되었던 셈이다.……다산이 자꾸 내게 무언가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 본문 34~36쪽 〈서설:다산의 자취를 찾아 헤맨 여정〉에서
[출처] Humanist [다산의 재발견] ☆ (북뉴스 ◈책과서평 전문카페◈ 베스트셀러 인기소설 시) |작성자 세라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