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홀씨 하나 큰 숲을 이루다
김영실 지음 / 물푸레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나는 교육을 농부가 과목을 접붙이는 일과 같다고 생각한다. 고염나무에 감나무 순을 접붙이면 뿌리는 고염나무로되 열매는 감이 달린다. 사람도 그 태어난 바탕이 좋지 않더라도 교육을 통해 위대한 사상에 접하고 감화를 받게 되면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 인간접목, 그것이 곧 교육이다.”


이는 한 평생 교육자로 살았던 김영실의 〈민들레 홀씨 하나 큰 숲을 이루다〉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강화도 마니산 산골 촌뜨기로 태어난 그가 어떻게 교육자가 되었는지, 그 삶을 밝힌 스스로의 자서전이다.


그가 보낸 어린 시절은 흔히 말하는 산골 소년의 삶 그대로였다.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그는 또래 아이들과 곧잘 어울렸다. 동네 아이들을 따라 소에게 꼴도 먹였고, 초가을엔 논두렁에서 게 구멍을 살폈고, 콩서리와 참외서리 같은 것도 즐겼다. 고무로 된 축구공도 없던 시절이라 그저 새끼로 둘둘 말아 만든 공을 즐겨 차기도 했다.


그런 즐거움에 빠져들 무렵 신식학교의 길이 열렸다. 이전까지 해 오던 서당식 한문교육과는 달리 새로운 보통학교가 시작된 것이다. 더욱이 서당에서는 마음껏 질문할 수 없는데 반해 그 학교에서는 여러 가지를 묻고 또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랬다.


그렇지만 그 즐거움도 초등학교를 기점으로 끝인가 싶었다. 배고픔과 학비라는 원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집들이 태산같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둘째 형의 도움으로 끝내 배제학당에 입학했다. 그 때의 경쟁률이 11대 1이었으니 그 스스로 큰 만족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입학 후 인천에 있는 친구 집에서 통학하는가 하면, 친구와 자취도 해야 했고, 서울로 올라 온 동생과 함께 서대문의 기숙사에 입사하기도 하는 등 여러 고초를 감내해야 했다.


배제중학교를 끝마칠 무렵 그는 경성제대 철학과에 가고 싶었으나 돈이 만만치 않았다. 급기야 여러 방도 끝에 일본 유학의 꿈을 품었고, 당시 배제학교의 교장 선생님이던 아펜젤러 2세를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 그 분은 20원이 든 수표를 그에게 건네며, 큰 용기를 북돋아 줬다.


“가서 열심히 공부하게. 세상으로 날아가 꽃을 피우게.”(49쪽)


이른바 그때를 기점으로 김영실은 민들레 홀씨의 사명을 이어받았다. 민들레 홀씨는 그야말로 들판이나 재방, 길가나 자갈밭 그 어디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생명을 터 나간다. 그처럼 그가 일본 본토 속에 들어가 유학을 하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헤쳐 나가길 그 분은 바랐던 것이고, 김영실 또한 그 뜻을 고이 간직했던 것이다.


꽃다운 18살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온갖 막노동을 했다. 처음 소개받아 간 곳은 하네다 공항이었다. 비행장 공사가 한창이었던 그곳에서 주로 철근이나 시멘트 그리고 앵글을 날랐다. 어떤 날은 슬레이트 공장에 나가 일하기도 했다. 그렇게 땀 흘린 결과 1943년 4월에 눈물겨운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그의 나이 24살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장 한국으로 귀국하여 학도병에 지원했다. 징집보다는 그것이 더 명예로운 일이라 생각했던 까닭이다. 그때 학도병에 함께 지원한 동료들은 대부분 만주 벌판을 지나 북지의 산동성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중국군을 상대로 싸우면서,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겼다. 끝내 일본군의 항복으로 인해 광복을 맞이했고, 그들도 머잖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미군청정 상무국 물가과에서 근무하다가, 부패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사람을 바로 세우는 길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그 길이 교육임을 깨닫고 곧장 숙명여고 교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 혼인한 후 서울고등학교에 재직했지만 6.25가 터졌고, 훗날 공군에 지원하여 항공병학교에서 근무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우리 민족의 살 길을 고민했고, 급기야 양을 키워서 온 국민에게 분양하기로 다짐했다.


“그때는 그야말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항공병학교 교관실장으로 군복무도 해야 했고, 충남대에 강의도 해야 했고, 집에서는 양들을 돌봐야 했다. 아내도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가정 살림을 꾸려야 함은 물론이고, 내가 출근한 뒤 양들을 돌봐야 했고, 또 돼지와 오리도 길러야 했기 때문에 일거리는 산더미 같이 많았다.”(165쪽)


이 책을 펴낼 당시 86세의 김영실 총장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평생 가난에 맞서 온 힘을 다해 배움의 길을 열고 달려 나아갔던 그. 이 나라의 가난을 뿌리 뽑기 위해 양 한 마리를 키웠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문일고등학교와 안양대학교를 세워 사람을 올곧고 바르게 세우려 애썼던 그.


그가 품었던 바람은 지금 이 땅에 민들레 홀씨가 되어 온 천지에 참된 생명력을 흩날리고 있다. 그에게 홀씨의 사명을 잇게 해 준, 평생에 잊지 못할 두 분이 있다고 하니 어린 시절 선원보통학교의 김재덕 선생과 배제학교의 아펜젤러 2세 교장선생이다. 그만큼 그 분들에게 많은 은덕을 받지 않았나 싶다.


모름지기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는 법이다. 솜털 같은 갓 털에 둘러싸인 조그만 민들레 홀씨가 박토에 뿌리를 내리고 여린 새싹의 숨결을 내 밀듯이, 그것이 자라 또 다른 생명을 흩어 뿌리듯이, 우리의 삶도 김영실 총장처럼 누군가에게 빚진 삶을 돌려 주는 참된 홀씨처럼 살았으면 좋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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