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나남창작선 116
이병주 지음 / 나남출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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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열풍이 뜨겁다. 그 일등공신은 KBS에서 올 1월부터 방영되고 있는 대하 드라마 정도전일 것이다. 사실 드라마 정도전1996년 방영되었던 용의 눈물과 시대가 겹친다.

  

당시 용의 눈물이 이성계의 조선 개국과 왕자(이방원)의 난이 중심이었다면 이번 정도전은 새 왕조 전후의 정국과 정도전의 개혁 의지를 주로 담고 있다. 드라마 정도전50부로 예정되어 있다고 하니, 올 한 해 내내 관심이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작금의 드라마 인기는 국민들이 새 정치를 열망하는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평소 정도전의 개혁 사상에 관심이 많았다
. 아마 고루한 정치판에 이골이 난 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져 봤음직하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정도전을 새롭게 인식하거나, 재조명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이 와중에 지난
1992년 작고하신 나림(那林) 이병주 선생이 쓴 장편 정도전이 재간된 것은 독자 입장에서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이 작품은 선생 사후 1993년에 초간 되었으니 그이의 유작이다.

고인의 파란만장한 삶은 우리 현대사의 질곡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의 경력을 보면 국제신보편집국장, 군사 정권에 의한 투옥, 그리고 일련의 사업 실패 등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이후 나이 4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마치 신()이 내린 듯 작품을 써 나갔으니, 장편 35편 등 단행본만 무려 80여 권이나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한국의 발자크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소설 정도전은 삼봉이 전라도 회진 적소 유배를 당한 시점에서 시작해 방원에 의해 참살되기까지를 다룬다. 선생은 삼봉의 독을 품은 강골이미지로 소설 분위기를 일관하지는 않는다. 자칫 읽는 재미가 사라질 판이니까.

그래서 등장하는 인물이 인고와 소윤 노복 부녀다. 인고는 삼봉이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노비 셋 중 자유의 몸으로 풀어준 해방 노비다. 그는 의리가 있어 유배지 움막으로 찾아와 기꺼이 수발을 든다.

여기서 소윤의 이미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녀는 바람이 건듯 지나며 그녀의 치맛자락을 펄럭 날리더니 삼봉의 수염을 부드럽게 쓸었다. 동시에 지분냄새가 그윽한 묵향처럼 날아와 그의 정신을 얼게만들 정도로 재덕과 미모를 겸비한 여인이다.

소윤은 개원사의 악덕한 주지 박천과 박관 형제의 탐욕의 재물이 되는 비운을 맞아 당시 불교계의 타락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비록 삼봉 곁에 편히 있을 수 없는 처지이나, 그를 향한 순고지정(純固之情)만은 누구 못지 않은, 비련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과연 삼봉과 소윤, 두 사람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를 지켜보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삼봉의 비극적 운명 탓에 자칫 상투적일 수 있는 소설적 흐름에 생기(生氣)를 불어넣어 준다.

게다가 소윤은 후에 현비 강씨가 되는 지화와도 친분이 있었다. 지화는 새 왕조가 들어서기 전 이성계의 둘째 아내가 되어 있었다. 지화가 현비가 된 어느 날 삼봉은 소윤을 화제 삼아 얘기를 나눈다. 현비는 조선 왕조의 탄생이 그 인연으로 이루어졌다고 회상한다. 왜냐하면 이성계와 삼봉이 만나게 된 것은 소윤이 중간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선생의 재치 있는 해학을 맛볼 수 있었다.

선생은 삼봉을 해동장량에 비유하고 있다. 장량은 유방을 도와 한고조를 세운 일등 공신이었다. 이는 결코 과언이 아니다.

나는 장량도 좋지만, ‘유기’(劉基, 1311~1375)와도 처지가 비슷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유기 역시 주원장을 도와 새 왕조[] 건국에 앞장선 일등 공신이었다. 하지만 유기는 삼봉이 아들 둘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에 비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명 건국 후 공신에 봉해진 37명 중 주원장 생전에 숙청된 이들이 무려 31명에 달했다고 전한다.

유기 또한 성품이 강직하고 악을 싫어하며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탓에 적도 많았다. 결국 그는 강경발언으로 파직당해 낙향하게 되는데, 이 무렵 유기는 쓰라린 심정을 달래면서 욱리자(郁離子)를 썼다고 전한다. 게다가 삼봉(1342~1398)과 동시대 인물이니, 삼봉이 유기에 대해 들은 바가 있지 않을까 싶다.

한편 선생은 여말선초 변혁기를 둘러싸고 다양한 인물들간의 권력 암투와 합종연횡(合從連橫)하는 모습을 장대한 필치로 실감나게 그려낸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겠다. 이런 맛에 역사소설을 읽는 것이려니.

드라마 정도전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 것인지 선생의 작품을 통해 그 실마리를 챙겨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가령 이성계에게 군사(軍師)로서 정도전이 있었다면, 이방원에게 책사(策士)는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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