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은 처음 읽어보는데, 참 자유로워서 좋았다. 해석따위 적혀 있지 않아서 '공부'해야 한다는 짐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시를 '공부'하다가 해석을 납득할 수 없어서 선생님께 여쭤보면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네 생각도 맞구나." 문제는 그렇게 생각하면 답이 안 나온다는 거다. 최악이다.

  백석의 시에는 사람이 살더라. 눈이 보이고, 풍경이 보이고, 영상처럼 스쳐가는 시간들이 보인다. 어떤 짧은 순간이 주는 감동에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뛸 때가 있다. 이 순간에 나는 무엇이든 쓰고 싶어 안달하게 된다. 능력이 모자라서 아예 시작도 못하거나, 시작을 하더라도 그 느낌을 그려내듯 표현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백석의 시는 그림을 뛰어 넘어 영상을 보여준다. 무한한 순간들의 포착. 그런 걸 할 수 있는 이 사람은 참 좋겠다.

수라(修羅)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어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히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조당(澡塘)에서

나는 지나(支那)나라 사람들과 같이 목욕을 한다
무슨 은(殷)이며 상(商)이며 월(越)이며 하는 나라사람들의 후손들과 같이
한 물통 안에 들어 목욕을 한다
서로 나라가 다른 사람인데
다들 쪽 발가벗고 같이 물에 몸을 녹히고 있는 것은
대대로 조상도 서로 모르고 말도 제가끔 틀리고 먹고 입는 것도 모두 다른데
이렇게 발가들 벗고 한 물에 몸을 씻는 것은
생각하면 쓸쓸한 일이다
이 딴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마들이 번번하니 넓고 눈은 컴컴하니 흐리고
그리고 길즛한 다리에 모두 민숭민숭하니 다리털이 없는 것이
이것이 나는 왜 자꾸 슬퍼지는 것일까
그런데 저기 나무판장에 반쯤 나가 누워서
나주볕을 한없이 바라보며 혼자 무엇을 즐기는 듯한 목이 긴 사람은
도연명(陶淵明)은 저러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또 여기 더운 물에 뛰어들며
무슨 물새처럼 악악 소리를 지르는 삐삐 파리한 사람은
양자(楊子)라는 사람은 아무래도 이와 같었을 것만 같다
나는 시방 옛날 진(晋)이라는 나라나 위(衛)라는 나라에 와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만 같다
이리하야 어쩐지 내 마음은 갑자기 반가워지나
그러나 나는 조금 무서웁고 외로워진다
그런데 참으로 그 은(殷)이며 상(商)이며 월(越)이며 위(衛)며 진(晋)이며 하는 나라 사람들의 이 후손들은
얼마나 마음이 한가하고 게으른가
더운 물에 몸을 불키거나 때를 밀거나 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제 배꼽을 들여다보거나 남의 낯을 쳐다보거나 하는 것인데
이러면서 그 무슨 제비의 침이라는 연소탕(燕巢湯)이 맛도 있는 것과 또 어느 바루 새악씨가 곱기도 한 것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일 것인데
나는 이렇게 한가하고 게으르고 그러면서 목숨이라든가 인생이라든가 하는 것을 정말 사랑할 줄 아는
그 오래고 깊은 마음들이 참으로 좋고 우러러진다
그러나 나라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글쎄 어린 아이들도 아닌데 쪽 발가벗고 있는 것은
어쩐지 조금 우수웁기도 하다

 

팔원(八院)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妙香山行) 승합자동차(乘合自動車)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慈城)은 예서 삼백오십리(三百五十里) 묘향산(妙香山) 백오십리(百五十里)
묘향산(妙香山)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自動車)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텅 비인 차(車)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삼호(三湖)

문기슭에 바다해자를 까꾸로 붙인 집
산듯한 청삿자리 위에서 찌륵찌륵
우는 전복회를 먹어 한여름을 보낸다

이렇게 한여름을 보내면서 나는 하늑이는
물살에 나이금이 느는 꽃조개와 함께
허리도리가 굵어가는 한 사람을 연연해 한다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룻밤 뽀 오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어느 하룻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옛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재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 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심심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치미국을 좋하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굳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쇳스럽게 : 카랑카랑하게
이스라치전 : 앵두가 지천에 깔려 펼쳐져 있는 곳
쇠리쇠리한 : 눈이 부신, 눈이 시우린, 시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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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9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明卵 2006-08-21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귓속말님, 아아... 오랜만에 뵙는데- 어쩐지 조금 슬퍼서... '힘내세요', 라고 밖에는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아니, '힘냅시다'! 가 맞을지도요. ^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