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비문학 지문을 읽는데 복제 예술의 발달로 대중이 예술 수용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는 내용이 나왔다. 나는 그 글에서 이 한 줄의 문장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회화에 대해 입도 벙긋 못하는 이들도 영화에 대해서는 저마다 한마디씩 할 줄 안다." 나는 나의 그 '한마디'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남길 수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나도 영화를 '읽고', 영화를 '텍스트화'하고 싶다. 소유욕이라고 해도 좋다. 소유에게서 도망칠 생각은 없다.

  이렇게 의욕이야 대단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영화를 보고 나면 늘 뭔가 생각해보고, 기록해보지만 결과물은 늘 똑같다. 그저 떠오른 이야기를 주절거려 놓은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것도 틀에 박힌 내용과 고리타분한 사고의 결과물 정도다. 다시 읽어보면 한숨만 나오는 멍청한 기록들을 그래도 계속 해나가는 것은 그게 없으면 그나마 영화를 본 기억마저 스러지고 말기 때문이다. 써놓지 않으면 꿈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리는 것처럼, 영화도 금방 나를 떠나고, 나에게는 흐릿한 느낌과 한 문장만큼의 지식만 남는다. 누군가 나에게 그 영화가 어땠느냐고 물어보면 "아, 괜찮은 작품이었어"라고 말할 만큼의 지식말이다. '영화 한 편'에서 '영화'보다 '하나'라는 숫자가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아, 괜찮은 작품이었어"는 내가 그 영화를 봤다는 것의 과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계속되는 망각과, 단조로운 기록과, 그보다 더 단조로운 나의 대답이 싫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좋았다. 내가 늘 동경했지만 하지 못한 일이기에 좋았다. 영화와 철학을 연결시키려 했다는 것도 좋았다. 이 책은 마치 나의 동경을 집대성해놓은 것 같다.  번역투 문장은 그 좋아하는 마음으로 눈감고 넘어가기로 했다.

어쨌든 영화와 사귀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사귐은 영화를 작품work이 아닌 텍스트text로 만난다는 것을 뜻한다. 롤랑 바르트는 작품과 텍스트를 구분했다. 작품에서는 오직 작가의 뜻을 읽어낼 뿐이지만, 텍스트에서는 우리가 뜻을 만들어낼 수 있다. 작품은 닫혀 있으나 텍스트는 열려 있다. 작품은 때로 고통을 안기지만 텍스트는 언제나 즐거움을 준다. (6쪽)

그런데 한 사람에 대해 내리는 이 총체적 판단이 어처구니없이 단순한 사실들로부터 만들어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동사서독> 53쪽)

그러나 그 상황이 어떤 것이든 진짜 인간의 기준은 변함없는 것이니, 우리는 그런 기준으로 가짜 인간과 진짜 인간을 구분한다. 그것은 선택, 믿음, 사랑을 통해 자신을 어떤 존재로 만들어가며 실존하는 대자존재다. (<매트릭스> 81쪽)
⇒ <가타카>의 세계 또한 '선택'이 사라진 미래 사회를 다루고 있다. <아일랜드>의 도너들 또한 그런 세계 속에 살아간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은 다른 이들과 달리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였다. 왜 주인공은 언제나 살아 남을까? 왜 주인공은 언제나 성공할까? 반복되는 주인공 지상주의를 보면서 늘 드는 의문이었다. 우리가 아직 인간이길 바라기 때문이었나 보다. 다른 어떤 존재에게 세계를 바꿀 권리(아주 이기적인 생각이지만)를 넘겨주고 싶지 않아서였나 보다. 이런 점에서 는 특이한 영화다. 인간의 선택 의지에 앞서는 더 중요한 가치, 사랑을 부각하기 위해 인간만이 아니라 기계 또한 행복할 수 있는 결말을 준비했으니 말이다. 단, 그 결말이 인간의 세계가 종말을 맞아 '선택'이 사라진 뒤의 일이긴 하지만.

인생에는 모험 끝에 얻게 되는 보물 같은 것은 없다. 그 편력의 험난한 과정에서 다채롭고 풍요해지며 아름다워지는 삶밖에는.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288쪽)

그렇다. 사랑은 휴대전화를 눌러대거나 기도하거나 마술을 부리는 게 아니다. 상대를 위해 지금 당장 행동하는 것이다. (<오아시스> 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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