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때 국어 선생님께서 '한번 읽어보라'고 하셨었는데, 1년이 지난 지금 일겍 되었다. 이렇게 술술 읽히는 책은 참 오랜만이다. 그렇게 쉽게 읽고 싶어서 잡았던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도 의외로 읽기 껄끄러운 면―한국과 일본의 차이인지, 현실과 소설의 차이인지 알 수 없는―이 있었는데 <모순>은 물 흐르듯, 마치 누군가의 블로그에 올라온 글을 읽는 느낌으로 읽어내릴 수 있으면서도, 너무 닭살스럽거나 너무 가볍지 않은 적당한 무게감이 있었다. (어쩌면 '블로그'를 떠올린 이유는 플라시보님이 떠올라서일 수도 있다.) 편하게 읽히지만 시간 낭비했다는 후회를 남기지 않는 책은 '좋은 책'이다.

  우리는 행복이냐 불행이냐가 아니라 어떤 '행복과 불행'이냐를 선택하며 살아간다는 것. 아, 정말 그렇다.

그리고, 사실, 진모가 나에게 설령 "누나는 사랑을 해봤어?"라고 물었다 해도 느글느글함 때문에 훨씬 더 괴로웠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천박함이 무명천처럼 고슬고슬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48쪽)

하지만 나는, 추억이란 계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만들어진다는 등,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일에 그렇게 머리를 쓰고 살자면 피곤하겠다는 등의 분위기 깨는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부득불 해가면서 살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아껴서 좋은 것은 돈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돈보다 더 아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었다. (68쪽)

  "이건 큰들별꽃. 다음 장소로 이동하느라고 계곡을 건너다가 기슭에서 이 꽃을 발견했는데……."
  김장우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놀라 쳐다보니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푸른 잎사귀 속에 숨어서, 저토록 아련한 큰들별꽃들이, 깜박깜박 조용히 빛나고 있는 거야. 안진진. 나, 그냥 울어 버렸다. 너무 작아서…아니, 저 홀로 숨어서 이렇게 아름답게 살아도 되는가 싶으니까 무지 눈물이 나대……."(94쪽)

  "안진진. 인생은 한 장의 사진이 아냐. 잘못 찍었다 싶으면 인화하지 않고 버리면 되는 사진하고는 달라. 그럴 수는 없어." (97쪽)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 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116쪽)
⇒정말 그렇다. 은혜를 입은 것을 기억하려고 해도, 그보다 상처입은 것이 더 먼저 떠오르고 만다. 이 부분은 경계의 의미로 받아적어 보았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며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139쪽)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은 '나'를 보여 주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이랬으면 좋았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노력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솔직함보다 더 사랑에 위험한 극약은 없다. 죽는 날까지 사랑이 지속된다면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 주지 못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나를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유혹을 극대화시키는 감정이다. (199쪽)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273쪽)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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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짱 2006-02-17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교때 읽었던 양귀자님의 책들이 줄줄줄 지나가네요... 이제는 흐릿해진 폴라로이드사진처럼 시간의 간극들로 선명한 인상들은 사라진채.
아, 부러워요. 명란님!

明卵 2006-02-19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귀자의 글은 쉽게 읽히는 것 같아요. (천천히 읽어달라, 고는 했지만.^^;) 번역 소설의 가볍게 읽힘과는 다른, 또 다른 '편안함'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