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브라질이 아마존 강 유역의 열대림을 개발하는 문제에 대한 모의 회의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회의에는 브라질 대통령, 브라질 총리, 국제 환경단체, 브라질 내 환경단체, 미국 대통령이 참여했고, 중재자가 한 명 있었다. 나는 브라질 대통령의 역할로, 국민을 생각하는 동시에 대외관계를 생각해야 했고, 나의 정치적 입장도 고려해야 했다. 미국이나 환경 단체에서 의견을 내 놓으면, 그에 따라 일어날 국내의 파동이 염려되어 어떤 말도 쉽게 할 수 없었고, 심지어 그들이 내 국민들, 내 나라를 힘들게 하는 적으로 보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짧은 가상 체험도 이렇게 힘든데,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국가를 생각해야 하는 왕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책문’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알 만하다.

   ‘죽을 각오’이니, ‘주체적 결단의 절규’이니, 거창하게 적혀있는 것에 비해 책의 내용은 싱거웠다. 1장에서 임숙영이 ‘나라의 병은 왕에게 있다’고 한 것은 과연 당돌한 답이었지만, 가장 광고 문구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는 그 대책조차도 매우 조심스러운 내용이었다. 마케팅 전략과 상술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으나, 나에게 이 책의 모든 군더더기―실질적인 내용을 제외한 것들―는 상술로밖에 안 보였다. 책을 팔기 위해서는 자극적인 문구와 약간의 과장이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체로 과장은 곱게 보이지 않는 법이다.

  외적인 면은 접어두고 내용만 본다면, 기대한 만큼은 못 되었지만 읽을 만했다. 그런데 과연, 이들이 말한 대로 하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는 하지만, 중국의 고사를 들먹이며 제시하는 시책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시험장에 앉아서 이 정도 내용을, 풍부한 예시를 인용해가며 척척 써내려간 당대의 선비들의 능력은 놀랍지만 왕은 이 정도 생각도 못 해내는 사람이었을까? 구중궁궐에 있는 왕이 선비들의 의견을 물은 것은 자신보다 백성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의 의견을 듣고자 함이 아닌가. 그런데 굳이 왕도 다 아는 고사 속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까? 이런 면에서 책문은 현대의 논술고사와 참 닮은 것 같다. 논술을 하다 보면, 내 글인데도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말들만 늘어놓고 있는 모습에 조소하게 될 때가 많은데, 딱 그 짝인 것이다. 어쩌면 정답은 없지만 모범답안이 있고, 적어야 할 방향이 정해져있다고 하는 현대의 논술고사처럼, 당시의 책문도 어떤 일반적인 답안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악순환의 고리가 참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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