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적어야 할 지, 망설여진다. 단 한 마디조차 조심스럽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다큐멘터리 속의 과거를 적은 소설의 무게가 이토록 크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 전에 읽은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생각났다. 평민들의 생활을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실상을 알게 될 수록 충격을 거듭 받는 오스칼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벼운 면이 많은 작품이라 난쏘공을 읽고 할 생각이 아니라는 생각이 잠시 스치긴 하지만, 그래도.)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지가 낳은 죄라는 것은.

칼날
  “아저씨.”
  신애는 낮게 말했다.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 (57쪽)

우주 여행
그는 A대학 법학과 사학년 재학중에 쫓겨났다. 쫓겨난 이유를 윤호는 몰랐다.
  “말해 봐요.”
  “뭘?”
  “형은 어떻게 됐어요?”
  “내 생각을 말했더니 누가 뒤에서 쇠망치로 때렸다. 나는 넘어졌다.” (63쪽)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폭력이란 무엇인가? 총탄이나 경찰 곤봉이나 주먹만이 폭력이 아니다. 우리의 도시 한 귀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도 폭력이다. /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이 없는 나라는 재난의 나라이다. 누가 감히 폭력에 의해 질서를 세우려는가? / 십칠세기 스웨덴의 수상이었던 악셀 옥센스티르나는 자기 아들에게 말했다. “얘야, 세계가 얼마나 지혜롭지 않게 통치되고 있는지 아느냐?” 사태는 옥센스티르나의 시대 이래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 지도자가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면 인간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그들의 희생이라는 말은 전혀 위선으로 변한다. 나는 과거의 착취와 야만이 오히려 정직하였다고 생각한다. /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한 것은 아닐까? / 세대와 세기가 우리에게는 쓸모도 없이 지나갔다. 세계로부터 고립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에 무엇 하나 주지 못했고, 가르치지도 못했다. 우리는 인류의 사상에 아무것도 첨가하지 못했고…… 남의 사상으로부터는 오직 기만적인 겉껍질과 쓸모없는 가장자리 장식만을 취했을 뿐이다. / 지배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할 일을 준다는 것,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일, 그들이 목적 없이 공허하고 황량한 삶의 주위를 방황하지 않게 할 어떤 일을 준다는 것이다.’ (110쪽)

육교 위에서
  두 사람에게 이 사회는 괴물덩어리였다. 그것도 무서운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괴물덩어리였다. 동생과 동생의 친구는 저희 스스로를 물 위에 떠 있는 기름으로 보았다. 기름은 물에 섞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도 합당한 것은 못 된다. 정말 무서운 것은 두 사람이 인정하든 안 하든 하나의 큰 덩어리에 묻혀 굴러간다는 사실이었다. (146쪽)
  주간의 관찰은 정확했다. 그러나 그 정확이 옳은 것은 아니었다. (153쪽)

궤도 회전
  “여러분은 십대 노동자 문제를 놓고 삼십 분 동안이나 이야기를 했습니다.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십대 노동자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행복동에서 살 때 어느 분의 소개로 난장이 아저씨를 알게 되엇습니다. 그분은 평생 동안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아들과 딸이 공장 지대에 가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잡하고 힘든 일을 합니다. 그들의 어린 동료들은 자기 자신을 표현할 줄도 모르고, 인간적인 대우를 어떻게 해야 받는지도 모릅니다. 현장 일이 그들의 성장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위에서는 날마다 무지한 생산 계획을 세웁니다. 노동자들은 기계를 돌려 일합니다. 어린 노동자들은 생활의 리듬을 기계에 맞춥니다. 생각이나 감정을 기계에 빼앗깁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 생각나죠? 그들은 낙하하는 물체가 갖는 힘, 감겨진 태엽 따위가 갖는 힘과 같은 기계적 에너지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처럼 십대 노동자 이야기를 하며 노동이라는 말, 의무라는 말, 자연적인 권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처럼 그들을 돕자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갖는 감상은 그들에게 아무 도움을 못 줍니다. 난장이 아저씨의 아들딸과 그 어린 동료들이 겪는 일을 보고 느낀 것이 있습니다. 197×년, 한국은 죄인들로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166쪽)

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회장님이 사회 복지를 위해 해마다 이십억 원을 내놓으시겠다는 기사지?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해마다 거액을 희사하시겠다는 거야. 이미 복지 재단의 이사진이 결정됐을 걸. 그건 훌륭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노사 협이 때 회사측에 상기시켜주실 게 있습니다.”
  “그게 뭐지?”
  “그 돈은 조합원들의 것입니다.”
  “어째서?”
  “아무도 일한 만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금은 너무 쌉니다. 제가 받아야 할 정당한 액수에서 깎인 돈도 그 이십억 원에 포함됩니다.”
  “좋은 걸 지적해줬네.”
  “정작 받을 권리가 있는 노동자들에게 주지 않은 돈을 이제 어떤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는 건지 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207쪽)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게으른 낙오자들!” 그들이 말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일한 만큼 주지 않은 돈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221쪽)

클라인씨의 병
그는 부를 생산이라는 샘에서 솟아나는 물에 비유하고, 그것은 사람의 손에서 손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한 곳에 괴어 썩어버린다고 말했다. 그 말을 받아 누가 꽤 진지한 목소리로 “역사와 같군요”라고 말했는데, 그는 안경을 치켜올리더니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그게 아니라 부의 생산자가 바로 여러분 자신이란 점입니다”라고 했다. ‘사회조사연구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날 “나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동료들이 열심히 부를 생산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라고 목사는 말했다. “그러나 부를 생산하고도 그것을 제대로 나누어 받는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못 보았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242쪽)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미국의 노동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그는 말했었다. “한국 섬유 노동자의 임금은 얼마?” 그곳 노동조합 대표가 선창하면 노동자들은 “시간당 십구 센트!”라고 외쳤다는 것이다. (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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