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모든 것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낭만적 편집증 환자로 만든 것은 욕망이었다. 욕망은 나를 상징 암호를 해독하는 사람으로, 풍경을 해석하는 사람으로 [그 결과 감상적 오류(무생물도 감정을 가졌다는 생각/역주)의 희생자가 될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안달한다고 해도, 이 질문들이 자아내는 흥분-모든 수수께끼가 묘한 흥분을 자아내듯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 모호함은 구원 아니면 저주를 약속하는 것이었으나, 어느 쪽인지 드러나는 데에는 평생이 걸릴 터였다. 내가 오래 희망을 품을 수록, 내가 바라는 사람은 더 고귀해지고, 완벽해지고, 희망을 품을 만한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욕망의 충족이 지연되기 때문에 그 대상은 더 바랄 만한 존재가 되었으며, 즉각적인 만족에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자극을 주었다. (35, 36쪽)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는 역설적으로 외친다. "나에게 도전하면 너를 사랑하겠다. 나한테 제시간에 전화하지 않으면 너에게 키스해주겠다. 나와 함께 자지 않으면 너를 사모해주겠다." (79쪽)
차이를 농담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적어도 사랑의 90퍼센트를 이루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는 표시]이다. 유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짜증의 벽들을 따라서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긴장이 완화된 차이였고, 따라서 상대를 학살할 필요 없이 벽을 넘어갈 수 있었다. (110쪽)
나는 욕망에 밀려서 직선적인 것을 버리고 비유를 찾았다. 나의 의미는 결코 'ㅅ-ㅏ-ㄹ-ㅏ-ㅇ'을 타고 여행을 떠날 수 없었다. 다른 운송수단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약간 변형된 보트, 늘이거나 줄인 보트, 보이지 않는 보트. 대상 자체를 재현하기보다는 그 신비를 포착하는 보트. 히브리 신(히브리인들은 신의 이름이 너무 거룩하여 발음하지 못하게 했다/역주)과 같은 사랑.
순간 나는 클로이의 팔꿈치 근처에 있던, 무료로 나오는 작은 마시멜로 접시를 보았다. 의미론적 관점에서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갑자기 나는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시멜로가 어쨌길래 그것이 나의 클로이에 대한 감정과 갑자기 일치하게 되었는지 나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너무 남용되어 닳고 닳아버린 사랑이라는 말과는 달리, 나의 마음 상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 같았다. 더 불가해한 일이지만, 내가 클로이의 손을 잡고, 험프리 보가트와 로미오에게 눈을 찡긋하며, 그녀에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나는 너를 마시멜로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가 평생 들어본 가장 달콤한 말이라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사랑은, 적어도 클로이와 나에게는, 이제 단순히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입에서 맛있게 녹는, 지름 몇 밀리미터의 달콤하고 말캉말캉한 물체였다. (132, 133쪽)
연인은 말한다. 나는 주어진 이름을 가진 너를 발견했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새로운 이름을 줌으로써, 너라는 존재가 나에게 주는 의미와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 사이의 차이를 표시하고자 한다. 너는 사무실[정치적 공간]에서는 X라는 이름을 가질 수도 있으나, 내 침대에서는 늘 "나의 당근이 될 것이다.…… (152쪽)
상대방에게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는 것은 예의에 속한다. 개인적인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어떤 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 속성이나 특질을 넘어선 존재론적 지위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다. 사랑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부유함 속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애정/소유를 얻고 유지하는 수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금기를 지켜야 한다. 사랑에서건 돈에서건 오직 빈곤만이 체제에 의문을 품게 한다. 그래서 아마 연인들은 위대한 혁명가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209쪽)
물론 니얼리 박사는 보바리 부인의 문제를 해석하기는 했다. 그러나 문제를 파악하는 것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 지혜와 지혜로운 인생은 크게 다르다. 우리는 모두 능력 이상으로 똑똑하다. 그러나 사랑이 미친 짓임을 안다고 해서 그 병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 어쩌면 지혜로운, 또는 전혀 고통 없는 사랑이라는 개념은 무혈 전투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모순일지도 모른다. 제네바 조약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그런 전투는 존재할 수가 없다. 보바리 부인과 페기 니얼리 사이의 대립은 낭만적 비극과 낭만적 실증주의 사이의 대립이다. 그것은 지혜와 지혜의 대립물 사이의 대립인데, 지혜의 대립물이란 지혜를 모르는 것 [이것은 고치기가 쉽다]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아는 것에 따라서 행동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연애가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그것이 클로이와 나에게 도움이 된 것은 전혀 없다. 우리가 바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우리가 현자가 되지는 않았다. (281, 2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