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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쾌락의 급소 찾기
이명석 지음 / 시지락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고를 때, 나를 가장 유혹한 것은 바로 제목이었다. '만화, 쾌락의 급소찾기'. 저자의 문학적 괴팍함이 느껴지는 매혹적인 제목. 제목을 보는 순간 느낌이 왔다고나 할까? '이 사람은 만화 도굴꾼에, 글쓰는 스타일도 내 취향에 꼭 맞겠구나.'하고 말이다. 두께가 어떻고, 앞으로 책을 읽을 계획이 어떻고 하는 문제는 일찌감치 머릿속에서 지우고 무의식적으로 책을 골랐다. 마치, 굉장히 재밌어 보이는 만화책 한권을 집어드는 기분으로.
역시나 이 책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 장, 두 장 넘길 때 마다 나를 행복의 도가니로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만화에 취미가 없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할 지 뻔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재미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어.' 하지만 내 주위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사실 하나. 나는 만화읽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 외에 내가 이 책에 반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굳이 하나 더 적자면 나는 직설적이고 약간은 광적인 문체에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글을 쓰지는 못하더라도.
저자가 '만화 비교학'을 관철시키기 위해 선정한 45개의 주제와 각각에 따른 내용에, 나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몇가지를 골라 적어보자면, '가장 매력적인 프로페셔널은?', '가장 가슴 아픈 죽음은?', '가장 멜랑콜리한 뉴욕 스토리는?' 그리고 '가장 사랑스런 왕따는?'. 퀴즈처럼 툭툭 던져 놓은 주제들에서 나오는 그 명쾌한 해답이라니. '그 문제의 답은 바로 이 만화입니다.'하고 정확한 답을 말해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에는 너무 좋은 만화가 많아서 답을 내는 것이 힘들뿐더러,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상은 한 만화를 고를 수가 없다. 요즘 세상에 그런 짓을 했다가 어떤 비난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사람, 말솜씨가 아주 멋들어진다. '이게 뭐가 멋진가?'하고 반론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다는 거지. '가장 토속적인 만화는?'이라는 물음속에 들어있던 내용을 조금 가지고 와 봤다. '…볏짚을 썰매삼아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던 언덕, 자전거가 지나가는 논두렁 밭두렁에서 귀를 어지럽히는 개구리 소리. 주인공의 방에 찾아든 소녀조차 풀숲에 날아온 작은 새처럼 묘사된다.…' 이 외에도 정말 좋은 부분이 많았다. 특히나 내가 한눈에 반해버린 직설적인 묘사들은 나를 황홀경에 빠트렸는데, 문제는 지금 찾아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역시 좋은 부분을 발견하면 바로 메모를 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새삼스레 하고 만다. 아, 아쉬워라.
나는 내가 만화책을 꽤 많이 읽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알고보니 역시나, 세상은 넓고 만화책은 많은 모양이다. 이 책에서 한번이라도 등장하는 만화책은 모두 220권. 그 중에서 내가 읽은 것은 30권밖에 되질 않는다. 물론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책과 19세 미만 구독불가 딱지가 붙어있는 책들도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하지만 어차피 비율의 차이만 조금 생길 뿐, 내가 읽은 30권은 변하지 않는다. 그 정도라는 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가슴이 두근거린다. 앞으로 내가 읽을 만화책은 사방에 널리고 깔렸다는 게 되니까 말이다.
만화책을 탐탁치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도 전혀 놀라울게 아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이 있는 법이지. 나랑 별 상관도 없다. 하지만 아쉽다. 이렇게 권해주고 싶다고나 할까?
'만화의 멋들어진 미학속에 푹 빠져들어 보라구.' 이 책 속에는 만화속 명언들이 여러개 나와있다. 그 중 가장 강렬했던 이 말을 마지막으로 이 글을 끝마치고 싶다. 《허리케인 조》에 나오는 말이다.
'이런저런 패거리들처럼 빠지직 소릴 내가며 불완전 연소하는 게 아냐. 비록 잠깐이지만 눈부시도록 새빨갛게 타오르는 거다. 그리고 나중엔 새하얀 재만 남게 되지. 찌꺼기 따위가 아닌, 새하얀 재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