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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
정문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국제분쟁 전문기자이자 아시아네트워크(Asia Network)의 편집장이기도한 한겨레21의 정문태기자가 그의 지난 취재 기록들을 모아 책을 한권 냈다. 아시아네트워크가 한겨레21을 통해 출판한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와 궤를 같이하는 이 책은 ‘아시아의 작은 나라의 비주류 언론사’에 소속된 한 기자가 작성한 ‘전쟁기록’을 통해 CNN같은 미국 언론을 중심으로 하는 주류 언론들이 보여주지 못하는/않는 아시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 대한 적확한 서평은 인터넷을 뒤지면 금새 찾을 수 있을 '전문 서평가'들의 글을 통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테니, 난 그저 사사로운 느낌들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적확한 서평’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저자가 의도한 책의 핵심과 그것에 대한 보편적인 감상을 모호하지 않은 어휘로 효과적으로 드러냄'을 의미한다. 이 글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이 책은 크게 두가지로 채워져 있다. 그 두가지 중의 하나는 개념이며, 나머지 하나는 현실이다. 문자를 통해서든 사진을 통해서든 어쨌거나 현실을 차가운 언어로 표현하는 언론인이어서 그런지 저자는 전선/종군기자, 평화, 비폭력, 중립, 시위, 테러 등의 표현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새롭게 규정하는데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그런데 그것이 재미있는게, 규정이 무척 '뜨겁다'. 예컨대 ‘평화는 힘센 놈들이 만들어낸 거짓말이었다. 비폭력은 그놈들이 뱉어낸 거짓말에 쳐준 맞장구였다’, ‘그 ‘중립’이란 말은 백인,기독교,자본주의, 서양중심주의로 무장한 국제 주류언론들이 떠받드는 신줏단지였다’ ‘테러리스트란 미국에 해로운 행위를 하는 개인,집단,국가다’ 와 같은 식이다. 전선의 '냉랭함'이 그 안에서의 생존의 유일한 길임을 알고 있는 그가 내리는 이 뜨거운 규정은 일견 모순된 듯 하면서도 어찌보면 필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잔뜩 달아오른 총구에서 뿜어나오는 공포스런 서늘함 처럼 말이다.

아무튼 이런 식의 재규정이야 자료집이나 대자보를 만들 때 글 쓰면서 이미 많이 경험했던, 세상을 바로 보기 위한 의식화의 기본단계이지만 이 책 속에서 그러한 규정들의 울림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것은, 그러한 인식이 머릿속에서가 아닌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미국이 뿌려댄 집속탄에 의해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아이들 사이에서, 목숨을 건 저항군들의 투쟁에 동행하는 가운데 획득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그의 사유의 틀인 동시에 그가 생산해내는 '개념'들과, 이미 그곳에 주어진 잔혹한 현실은 때로는 격렬하게 부딪치거나 때로는 융합하며 기자이자 동시에 한 인간인 ‘정문태’의 생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표현들은 절실했으며, 딱딱한 그의 기록들은 어떠한 문학작품보다도 아름다운 문장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글은 미문이되, 그것이 담고 있는 현실은 여전히 공포스러웠다. 그의 ‘발에 차이는 사실’들은 너무도 끔찍했다. 책의 마지막에 부록으로 담겨있는 그의 취재도를 보면 코소보, 르완다, 아프가니스탄, 버마, 라오스, 캄보디아 등등 지도는 분쟁을 의미하는 무수한 빨간색 표시로 뒤덮여 있다. ‘2년 8개월에 걸친 인티파다로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2,286명이 목숨을 잃었고 중상자 2만 2,611명이 발생했다’, ‘미국은 1964년에서 1973년에 이르는 '비밀전쟁'기간 동안 라오스에 200만톤에 이르는 폭탄 700만개를 뿌려댔다’. 모든 전쟁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과거'와 '현재'로 인하여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종교/민족갈등이라는 주류 언론들에 쳐 놓은 장막 뒤에 숨어서 그 분쟁을 미국이라는 악의 축이 조종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벌이는 그들의 서슴지 않는 살인행위는 나의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 잔혹했다.(미국의 침략사를 제목으로만 모아도 A4용지 한 페이지가 나온다) 그런 끔찍한 모습들을 읽으며 문득 나는 '알아야 할 것'들이 정말 많다고 생각했다. ‘헐리우드 영화 킬링필드’는 진실을 죽이는 또 다른 만행이라는 것, ‘발리에서 생긴 일’은 미남미녀들의 사랑놀음 뿐만이 아니라는 것, 등등.

그런데 그러한 개념과 현실을 바라보며 나는 처음에는 격렬한 분노를 느꼈으나, 그것이 절정에 도달한 어느 순간, 내가 품고 있던 분노는 순간 공허해졌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그들은 내 생각이나 글과는 이미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나의 안온한 일상에 비추어 보았을 때 책 안의 처절한 게릴라들의 삶은 내게 너무도 먼 존재였던 것이다. 억압받는 바로 옆의 외국인 노동자와의 연대도 해내지 못하는 내게 있어서 이 책이 교양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이 문득 날 스쳐지나갔다. 각자의 치열함이 있는 것이겠지만, 그저 ‘각자’라고 이야기할 수 만은 없는 것이지 않은가. 나는 내게 질문했다. 여전히 이 나라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수한 전쟁 속에서 너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지만 여전히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책을 읽다보니 드문드문 여성에 대한 표현이 눈에 걸렸다. 그것은 재작년 부터 작년 초에 이르기까지 선정적인 언론이 두 중학생의 죽음을 ‘꽃다운 소녀들의 숭고한 죽음’으로 묘사한 것과 궤를 함께하는 것일텐데, 희생양으로서의 약한, 그래서 더 슬픈 여성의 이미지를 책에서 군데군데 강조하고 있다. 원래 그것이 불쾌한 보수민족언론 한겨레의 마인드일텐데, 그래도 저자의 일터가 전장이며, 마초 생산의 온상지인 군대와 잇닿아 생활한다는 점에서, 그의 그러한 인식의 한계를 ‘존중’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저자는 ‘타이가’에 관한 장에서 ‘전사’로서의 여성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반성하고 있었다. 비록 그가 자신의 오류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남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투철한 정신을 바탕으로 남자 이상의 전투력을 보이는 여성들'이었다는 점이 씁쓸하긴 했지만 말이다. 문득, 그에게 있어서 만큼은 '시민권'이라는 것이 공허한 개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잠시 멍하니 앉아있다가 다시 책의 표지를 넘기자 항상 그러하듯 저자의 소개가 눈에 들어왔는데, 문득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난 생각했다. 정문태 기자가 만난 중요한 사람들은, 혹은 그를 중요하게 - 저명한 전선기자로서 - 만드는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의 마수드나, 버마의 보먀처럼 ‘전설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라오스의 비극을 말없이 표현하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커다란 포탄 위에 쪼그려 앉은 소녀나 코소보 해방군으로 활동하다 전사한 아버지의 사진을 목에 걸고 울고 있는 소년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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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06-29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훌륭한 리뷰군요.

happyant 2005-06-30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말씀을요.감사합니다.

마냐 2005-07-05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서 마초적 일면을 발견하시다니...정말 예리하심다. 이 책은 널리 읽혀야 마땅한, 진정 2004년 올해의 책으로 꼽을만한 책인거 같슴다.

happyant 2005-07-05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감당이 안될 만큼 훌륭한 책인것 같습니다.^^
 
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꼬박꼬박 세금내고 국가대표 경기가 있는 날이면 태극기도 흔들어주고 한국 국적의 배우가 딴 나라에서 인기 있다면 기분 좋아해 주기도 했건만 이놈의 나라는 결정적일 때는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취미인지라, 지진해일로 지네 나라 국민이 죽던 말 던 시체가 어디 쳐 박혀서 썩던 말 던 도무지 아무런 관심도 가져주지 않는다. '국가를 택하지 못하고, 국가가 우리를 택한 것이' 무엇이 그리 원죄라고 국가를 향한 우리의 원초적 짝사랑은 끝도 없는데, 그것에 대한 응답은 세금 고지서나 징집 통지서가 전부다. 그래도 여전히 나의 국적은 한국이며, 이름도 대체로 한글로 쓰고, 한국인이라면 함께 사용하는 표준시에 맞춰 생활하며, 퓨전이든 뭐든 해도 한국적인 -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 공유하는 - 문화에 젖어서 산다.

아마 19세기 중후반에 태어나서 조국 땅에서 살아가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의식이 그다지 없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도 이룰 수 없는 허상을 절망적으로 움켜잡으려는 노력에 불과하며 '민족'이란 개념도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제라는 타자의 침략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인식된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18,19세기의 격변기동안 세계는 산업혁명을 지나 근대에 접어들었고, 그것은 못난 나라가 선택한 죄로 이국땅으로 팔려간 피지배국의 민중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이 선택한 '일포드'호는 거대한 과도기의 용광로가 되어 매우 짧은 시간에 그들을 근대의 - 근대로 격렬하게 접어드는 - 땅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제 타자의 세계에 내동댕이쳐진 그들이 자신의 세계를, 즉 (되돌아)가야할 자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두고 온 제물포의 기억에 끊임없이 얽매인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항상 목적한 곳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고 만다. 각기 다른 처지와 신분의 그들은 애처롭게 조국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다가오는 것은 그것이 소멸했다는 소식뿐이다. 그러는 와중에 타국 땅에서도 노동조합이나 종교적 갈등 같은 근대적인 사건은 민중들의 삶에 스쳐지나간다. 이국땅이든 어디든 개인도 나이를 먹고, 시대정신도 결국 나이를 먹기 때문이다. 이내 모국에 닿을 수 없음을 인식한 그들은 이국땅에라도 어떤 식으로든 뿌리내리려 애써보지만 그것마저 녹록치 않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남의나라 혁명인 것이다. 그들의 거대한 상실에 대한 치유의 욕망은 항상 어그러지고 만다. 결국 그들은 막다른 골목에서 이렇게 얘기할 뿐이다. '무국적이 되려고 해도 나라가 필요한 거라구' 그들은 이윽고 나라를 세운다. 적들로 우글대는 정글의 한복판에 세워진 흔적도 남지 않을 국가의 이름은 '신대한新大韓'이다. 아 이 얼마나 희극적인 비극인가.

그리고 그러한 '이주민의 상실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가족이라는, 돈이라는, 성공이라는, 권력이라는 꿈을 잡기위해 그것의 외부도 한번 생각해 볼 여유 없이 노동하는 현대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실질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하는 그때의 민중들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주체가 탄생하긴 했는데, 그 주체는 도무지 몸 붙일 곳이 없는 것이다. '노마드' 같은 것이야 있는 사람들의 잘난 체이지, 없는 사람들로서는 터전 없는 떠돌이가 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국가는 비겁한 표정으로 민중을 착취할 따름이다. 이미 백 년 전부터, 자본주의의 민중들은 정신분열을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비극적인 어그러짐을 자연스럽게, 담담하게 일상을 스케치하듯 - 물론 여기에서 번뜩이는 그의 ‘기교’는 논외로 해두자 - 묘사해나가는 것에 작가 김영하의 저력이 있다.

그는 절망을 그리는데 있어서 담담하며 희망을 그리는데 있어서 처연하다. 모든 등장인물의 일생을 두리번거리며 더듬는 듯한 그의 필체는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일상을 포착하는데 있어서 적실하다. 형식상에서도 그는 결말을 맨 앞에 배치함으로서 근대인의 운명적인 비극을 선취한다. 그는 절망을 말하는데 있어서 머뭇거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절망을 말하는데 있어서 무기력하지 않다. 그의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비극성은 결코 저열한 일상/인생을 비꼬는 관념의 유희에 머물지 않는다. 또한 그는 결코 섣부른 이분법을 늘어놓고는 그것에 의한 갈등을 잡다하게 피워놓고, 카타르시스로 내려앉는 통속적인 관습을 반복하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불우한 과거시대의 '개인'의 삶을 그림으로써 이제 이데올로기와 무관할 수 없는 어휘인 '민중'으로 포섭되지 않는 ‘현대인의 삶’을 성찰한다.(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포화 속에 천박한 자본주의가 심화되는 현실에서 ‘현대인이라는 범주가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까’라는 ‘비판적’ 질문은 어떠한 형식과 내용을 내포한 ‘김영하’라는 하나의 ‘취향의 대상’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로서 여기에서 다룰 성질의 것은 아닌 듯싶다)

어쨌거나 김영하의 그러한 성찰이 읽는 이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것은 그 '현대인'이 '민중'과는 전혀 무관하거나 혹은 단순히 반 편향으로 생성된 대상이 아니라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의 소설의 등장인물은 정신분석학적으로든, 정치경제학적으로든 어떠한 개인의 노력으로 벗어날 수 없는 구조에 연유한 헤어날 수 없는 삶의 절망을 겪는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고통의 근원은 그저 대책 없이 포스트 모던한 '개인적 이유'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다시말해 과거의 민중문학이 거대한 치열함에 천착했다면, 김영하의 소설은 작은 각자의 치열함에 천착한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파편화된 작은 것들을 그것 자체로 존중하면서 나름의 방식으로 거대한 이미지 하나를 직조해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작품을 보면서 때때로 짧은 숭고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다. 그리고 아마 이것이 그의 소설이 홍상수의 영화와 궤를 달리하는 지점일 것이다.

문득 '진지한' 민족문제를 - 물론 소재로서 - 다루는 그의 소설을 읽으며 김훈이 떠올랐다. 왜 역사에는 쿨하고, 삶에는 냉정하며, 미에는 끊임없는 집착을 보이는 김훈이 - 김영하 못지않게 국내 유수의 상을 휩쓴 - 그의 소설에서 떠올랐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를 성공케 한 '계급에서 벗어난 새로운 치열함과 정제된 세련됨'이 구성이나 문체를 통한 예술가적 유희로 전화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내 머리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사회와 개인(혹은 이런 이분법을 극복한 그 무엇)에게 모두 세심한 관심을 쏟지만, ‘나의 개인적인 취향에 비추어 보자면’ 그는 항상 '너무 돌리고 꼬아서' 말하는 것 같다. 물론 쉽게 읽으면, 그가 돌리고 꼬았다는 것조차 눈치 채기 어려울 정도로, 그가 지어내는 이야기는 그것 자체로 매혹적이지만 말이다.

소설 ‘검은 꽃’의 후반부, 누군가가 총을 손질하며 말한다. ‘이봐 정치는 모두 꿈이야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무정부주의든 다 마찬가지야. 서로 총질을 해대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란 말씀이지’ 하지만 그 말을 하는 그가 하는 행동이 무기의 손질이듯, 그럼에도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는 작가로서 김영하가 자신이 낳은 인물들의 ‘죽음’까지 치열하게 추적했듯, 우리도 이렇게 죽는 날까지 살아갈, 그리고 싸워나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혹은 어그러지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가’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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