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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 지음, 천경록 옮김 / 책갈피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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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알 수 있듯, 크리스 하먼은 자신의 역사관을 표지에서부터 명시하고 있다. 이어서 책 서문의 시작을 장식하는 브레히트의 "독서하는 노동자의 질문"은 이 책을 이끌어 가는 그의 기본적인 자세를 아주 잘 보여준다. 두말 할 필요 없이 그것은 바로 맑스주의 역사관이다. 특정한 관점에 의한 역사의 파악은 세상의 전부를 설명해 주지는 못하지만, 애초에 세상의 모든 단면을 포괄할 수 있는 역사관이 어디있겠는가. 이러한 한계를 감안한다면, 이 책은 기존의 그 어떤 역사서 보다도 의미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마도 책을 읽고 있는 대부분의 ‘나’라는 존재는 알렉산더나 나폴레옹보다도, 그들이 전쟁을 하기 위해 동원한 병사에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서를 읽는 까닭은 ‘내’가 잘 살기 위함이지, 노무현이나 이건희를 잘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선언>에서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을 정치경제학에 대한 자신들의 비판과 결합해 사회와 역사에 대한 총체적인 과점을 제시했다. 여기서 그런 관점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 책 전체가 그런 관점에 입각해서 역사를 해석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 427p


마르크스주의적 역사파악의 핵심을 도식적으로 설명하자면, 사적 유물론의 바탕 위에서 정치경제학적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드러내며, 그 흐름 안에서 필연적으로 촉발되는 민중의 투쟁을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자본주의 분석의 측면에서 그다지 세밀한 접근방식을 보여주고는 있지 않다. 경제, 사회, 문화, 정치 등 각 분야에 관련한 수치나 도표 등의 자료들을 거의 인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물론 이것에는 크리스 하먼이 경제학자보다는 활동가에 가깝다는 점이 필연적인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것보다 이 책은 크리스 하먼이 자신의 방식으로 완전히 소화시킨 자료들을 바탕으로 역사의 면면에 이어져 내려오는 민중의 '투쟁'을 ‘소개’하고 ‘설명’하는데 주력한다. 따라서 책 자체의 학적 엄밀성이 좀 떨어지는 인상을 주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 물론 객관적 자료와 주관적 자료의 차이란 것이 백지장 한 장의 두께보다 크다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같은 내용일지라도 구성되는 방식에 따라 그것이 전달되는 양상은 판이하게 달라지는 법이다. 


하지만 이 책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넓은 시간적 범위와 서양과 동양을 모두 포함하는 넓은 공간적 범위를 다룬다는 점과, 그 모든 것을 책 한권에 담아야 한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이러한 한계는 불가피한 것이다. 어차피 이 책의 목표는 크리스 하먼의 말처럼,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지, 그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한 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나치게 구체적인 사료의 인용을 피하는 서술방식은 이 책의 일관적인 구성과 어울린다고 까지 할 수 있다. 이 책은 애초부터 과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는 전제를 두지 않는다. 민중의 투쟁이 비록 시대의 극히 일부분일 지라도, 하먼은 그 조각에, 미래의 거대한 투쟁의 씨앗이 될 수 있을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 당연히도 신석기 혁명 이후로 세계사는 곧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다시 확인하자. 이 책의 제목은 ‘민중의’ 역사이다.(‘맑스주의 철학자들의 역사’ 또한 물론 아니다. 그가 호의적으로 소개하는 맑스주의자들은 레닌, 로자, 트로츠키, 칼리프크네이트 등 격동의 20세기에 파시즘과 싸우다가 진 몇몇 별들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커다란 역사적 사건의 연원을 파악함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에게 있어서 2차 세계대전의 이유는 노동계급 혁명의 실패이며, 스탈린 체제 소련의 파시즘의 뿌리 또한 노동계급 혁명의 실패 - 로 인한 맑스/레닌 주의의 변질 - 이고, 20세기 후반의 ‘신세기 무질서’ 또한 노동자 계급 투쟁의 실패 때문인 것이다. 매번 이런 식이니, 이것을 명제로 만들면 ‘역사의 비극적인 사건은 민중의 투쟁이 실패했기 때문에 발생했다’라는 얘기가 될 터인데, 이래서야 책의 목적에 지나치게 충실한 것이 아닌가 싶은 느낌까지 들 정도이다. 하지만 이것을 ‘다양한 시선 중의 하나’로 이해함을 전제로, 이러한 관점이 신자유주의의 세뇌장치들이 온 미디어를 휘젓고 다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야가 열리도록 해 주는 점화장치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대로 의미는 충분할 것이다.


오히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유머러스한 크리스 하먼의 문체다. 이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의 색을 더욱 선명하게 한다. 또한 건조한 문체 만큼이나 뜨거운 문체 또한 그것을 구사하는 ‘인물’이 받쳐준다면 상당히 괜찮은 것임을 확인시켜준다. 예컨대 그에게 있어서 클래식 음악은 '비교적 발이넓은 착취 계급을 위한'것이며 기독교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매력을 준 종교였지만, 초창기부터 부자들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했"고, 영국은 "중국 관리들이 아편유입을 금지하려 하자 마약 중독을 확신시킬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1839년에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물론 ‘문체가 뜨겁다’라는 말이,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거짓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이와 같은 예를 몇 개 더 들어 보자.


철학자들은 유럽의 커피하우스에서 평등권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마신 커피를 생산한 사람들은 아프리카 서부에서 총구에 떠밀려 배에 실리고 끔찍한 환경에서 대서양을 건너(도중에 10명중 1명 이상이 죽었다) 경매 시장에서 팔린 다음 죽을 때까지 채찍질을 당하면서 하루에 15시간, 16시간, 심지어는 18시간 노동을 한 사람들이었다. - 326p

인종차별은 아프리카 노예제에 대한 변명에서 한 층 더 발전해 지구의 모든 사람을 '흰색, '검은색', '갈색' '붉은색', '노란색'으로 끼워 맞출 수 있다는 생각으로 완전히 성숙했다. 비록 많은 유럽인들의 피부가 연분홍이고, 많은 아프리카인들은 갈색이며, 많은 남아시아 출신 사람들의 피부색이 유럽인들 못지 않게 옅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피부는 분명히 붉은색이 아니며, 중국인과 일본인은 전혀 노랗지 않는데도 말이다! - 332p

"....그러나 임시정부해체 후 독일과의 강화 이후 소비에트, 볼셰비키당, 적군은 더는 살아있는 노동계급의 일부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최신판 자코뱅주의와 비슷했다. 1790년대의 자코뱅주의가 부르주아지의 급진 분파의 이상에 따라 움직였다면 최신판은 노동계급 사회주의와 세계 혁명이라는 이상에 따라 움직이기 했지만 말이다. - 546p

세계 지배자들은 선조들이 지난 5천 년 동안 그래왔듯이 죽을 힘을 다해 그런 시도를 분쇄하려 들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신성한 권력과 재산을 수호하기 위해 필요하다만 세계를 끝없는 야만에 빠뜨리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본주의 질서를 지키려 할 것이다. 설사 그것이 조직화된 인간 생활의 종말 초래하더라도 말이다. - 783p


역사연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는, 나아가 현재를 움직이는 행위다. 그것이 보수적 사관이든, 진보적 사관이든, 실증주의적 사관이든, 상대주의적 사관이든, 미시사든, 거시사든 모두 마찬가지다. ‘객관성’ 혹은 ‘사실성’은 ‘태도’의 형태로 추구되는 이상으로서 왜곡에 대항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근본적 목적으로서 연구를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되며(그러한 태도 자체가 현실 속에서 특수한 이데올로기로서 구체적 작용을 하기에)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크리스 하먼의 ‘민중의 세계사’는 저자의 목적에 부합하는 아주 잘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은 솔직하며, 어렵지 않고, 무엇보다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이 책에서 알 수 있듯, 민중은 대체로 지배계급에 대항한 싸움에서 패배했으며, 간혹 승리했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지배계급에게 배신당했고, 어쩌다가 배신당하지 않은 경우에도 이내 스스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러니 남은 것은 독자의 선택 뿐이다. 여기, 인간답게 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저항한 사람들의 영원한 패배의 기록이 있다. 기록을 읽은 당신은,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는 사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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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07-13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의 마이리뷰, 축하드립니다.
역시, 잘 쓴 리뷰라고 생각했어요. ^^

happyant 2005-07-13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칭찬 감사합니다. 그런게 있는지도 몰랐는데;;;하하. 다시 정신차리고 힘내서 미뤄두었던 리뷰를 써야 겠네요.^^

돌바람 2005-07-13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솔직하고 어렵지 않으며 공감을 형성하는 리뷰네요. '인간답게 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저항한 사람들의 영원한 패배의 기록'을 조만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happyant 2005-07-13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칭찬 감사합니다. 네에. 꼭 읽어보세요.^^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
정문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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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분쟁 전문기자이자 아시아네트워크(Asia Network)의 편집장이기도한 한겨레21의 정문태기자가 그의 지난 취재 기록들을 모아 책을 한권 냈다. 아시아네트워크가 한겨레21을 통해 출판한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와 궤를 같이하는 이 책은 ‘아시아의 작은 나라의 비주류 언론사’에 소속된 한 기자가 작성한 ‘전쟁기록’을 통해 CNN같은 미국 언론을 중심으로 하는 주류 언론들이 보여주지 못하는/않는 아시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 대한 적확한 서평은 인터넷을 뒤지면 금새 찾을 수 있을 '전문 서평가'들의 글을 통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테니, 난 그저 사사로운 느낌들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적확한 서평’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저자가 의도한 책의 핵심과 그것에 대한 보편적인 감상을 모호하지 않은 어휘로 효과적으로 드러냄'을 의미한다. 이 글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이 책은 크게 두가지로 채워져 있다. 그 두가지 중의 하나는 개념이며, 나머지 하나는 현실이다. 문자를 통해서든 사진을 통해서든 어쨌거나 현실을 차가운 언어로 표현하는 언론인이어서 그런지 저자는 전선/종군기자, 평화, 비폭력, 중립, 시위, 테러 등의 표현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새롭게 규정하는데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그런데 그것이 재미있는게, 규정이 무척 '뜨겁다'. 예컨대 ‘평화는 힘센 놈들이 만들어낸 거짓말이었다. 비폭력은 그놈들이 뱉어낸 거짓말에 쳐준 맞장구였다’, ‘그 ‘중립’이란 말은 백인,기독교,자본주의, 서양중심주의로 무장한 국제 주류언론들이 떠받드는 신줏단지였다’ ‘테러리스트란 미국에 해로운 행위를 하는 개인,집단,국가다’ 와 같은 식이다. 전선의 '냉랭함'이 그 안에서의 생존의 유일한 길임을 알고 있는 그가 내리는 이 뜨거운 규정은 일견 모순된 듯 하면서도 어찌보면 필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잔뜩 달아오른 총구에서 뿜어나오는 공포스런 서늘함 처럼 말이다.

아무튼 이런 식의 재규정이야 자료집이나 대자보를 만들 때 글 쓰면서 이미 많이 경험했던, 세상을 바로 보기 위한 의식화의 기본단계이지만 이 책 속에서 그러한 규정들의 울림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것은, 그러한 인식이 머릿속에서가 아닌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미국이 뿌려댄 집속탄에 의해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아이들 사이에서, 목숨을 건 저항군들의 투쟁에 동행하는 가운데 획득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그의 사유의 틀인 동시에 그가 생산해내는 '개념'들과, 이미 그곳에 주어진 잔혹한 현실은 때로는 격렬하게 부딪치거나 때로는 융합하며 기자이자 동시에 한 인간인 ‘정문태’의 생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표현들은 절실했으며, 딱딱한 그의 기록들은 어떠한 문학작품보다도 아름다운 문장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글은 미문이되, 그것이 담고 있는 현실은 여전히 공포스러웠다. 그의 ‘발에 차이는 사실’들은 너무도 끔찍했다. 책의 마지막에 부록으로 담겨있는 그의 취재도를 보면 코소보, 르완다, 아프가니스탄, 버마, 라오스, 캄보디아 등등 지도는 분쟁을 의미하는 무수한 빨간색 표시로 뒤덮여 있다. ‘2년 8개월에 걸친 인티파다로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2,286명이 목숨을 잃었고 중상자 2만 2,611명이 발생했다’, ‘미국은 1964년에서 1973년에 이르는 '비밀전쟁'기간 동안 라오스에 200만톤에 이르는 폭탄 700만개를 뿌려댔다’. 모든 전쟁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과거'와 '현재'로 인하여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종교/민족갈등이라는 주류 언론들에 쳐 놓은 장막 뒤에 숨어서 그 분쟁을 미국이라는 악의 축이 조종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벌이는 그들의 서슴지 않는 살인행위는 나의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 잔혹했다.(미국의 침략사를 제목으로만 모아도 A4용지 한 페이지가 나온다) 그런 끔찍한 모습들을 읽으며 문득 나는 '알아야 할 것'들이 정말 많다고 생각했다. ‘헐리우드 영화 킬링필드’는 진실을 죽이는 또 다른 만행이라는 것, ‘발리에서 생긴 일’은 미남미녀들의 사랑놀음 뿐만이 아니라는 것, 등등.

그런데 그러한 개념과 현실을 바라보며 나는 처음에는 격렬한 분노를 느꼈으나, 그것이 절정에 도달한 어느 순간, 내가 품고 있던 분노는 순간 공허해졌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그들은 내 생각이나 글과는 이미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나의 안온한 일상에 비추어 보았을 때 책 안의 처절한 게릴라들의 삶은 내게 너무도 먼 존재였던 것이다. 억압받는 바로 옆의 외국인 노동자와의 연대도 해내지 못하는 내게 있어서 이 책이 교양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이 문득 날 스쳐지나갔다. 각자의 치열함이 있는 것이겠지만, 그저 ‘각자’라고 이야기할 수 만은 없는 것이지 않은가. 나는 내게 질문했다. 여전히 이 나라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수한 전쟁 속에서 너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지만 여전히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책을 읽다보니 드문드문 여성에 대한 표현이 눈에 걸렸다. 그것은 재작년 부터 작년 초에 이르기까지 선정적인 언론이 두 중학생의 죽음을 ‘꽃다운 소녀들의 숭고한 죽음’으로 묘사한 것과 궤를 함께하는 것일텐데, 희생양으로서의 약한, 그래서 더 슬픈 여성의 이미지를 책에서 군데군데 강조하고 있다. 원래 그것이 불쾌한 보수민족언론 한겨레의 마인드일텐데, 그래도 저자의 일터가 전장이며, 마초 생산의 온상지인 군대와 잇닿아 생활한다는 점에서, 그의 그러한 인식의 한계를 ‘존중’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저자는 ‘타이가’에 관한 장에서 ‘전사’로서의 여성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반성하고 있었다. 비록 그가 자신의 오류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남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투철한 정신을 바탕으로 남자 이상의 전투력을 보이는 여성들'이었다는 점이 씁쓸하긴 했지만 말이다. 문득, 그에게 있어서 만큼은 '시민권'이라는 것이 공허한 개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잠시 멍하니 앉아있다가 다시 책의 표지를 넘기자 항상 그러하듯 저자의 소개가 눈에 들어왔는데, 문득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난 생각했다. 정문태 기자가 만난 중요한 사람들은, 혹은 그를 중요하게 - 저명한 전선기자로서 - 만드는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의 마수드나, 버마의 보먀처럼 ‘전설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라오스의 비극을 말없이 표현하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커다란 포탄 위에 쪼그려 앉은 소녀나 코소보 해방군으로 활동하다 전사한 아버지의 사진을 목에 걸고 울고 있는 소년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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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06-29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훌륭한 리뷰군요.

happyant 2005-06-30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말씀을요.감사합니다.

마냐 2005-07-05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서 마초적 일면을 발견하시다니...정말 예리하심다. 이 책은 널리 읽혀야 마땅한, 진정 2004년 올해의 책으로 꼽을만한 책인거 같슴다.

happyant 2005-07-05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감당이 안될 만큼 훌륭한 책인것 같습니다.^^
 
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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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꼬박꼬박 세금내고 국가대표 경기가 있는 날이면 태극기도 흔들어주고 한국 국적의 배우가 딴 나라에서 인기 있다면 기분 좋아해 주기도 했건만 이놈의 나라는 결정적일 때는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취미인지라, 지진해일로 지네 나라 국민이 죽던 말 던 시체가 어디 쳐 박혀서 썩던 말 던 도무지 아무런 관심도 가져주지 않는다. '국가를 택하지 못하고, 국가가 우리를 택한 것이' 무엇이 그리 원죄라고 국가를 향한 우리의 원초적 짝사랑은 끝도 없는데, 그것에 대한 응답은 세금 고지서나 징집 통지서가 전부다. 그래도 여전히 나의 국적은 한국이며, 이름도 대체로 한글로 쓰고, 한국인이라면 함께 사용하는 표준시에 맞춰 생활하며, 퓨전이든 뭐든 해도 한국적인 -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 공유하는 - 문화에 젖어서 산다.

아마 19세기 중후반에 태어나서 조국 땅에서 살아가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의식이 그다지 없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도 이룰 수 없는 허상을 절망적으로 움켜잡으려는 노력에 불과하며 '민족'이란 개념도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제라는 타자의 침략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인식된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18,19세기의 격변기동안 세계는 산업혁명을 지나 근대에 접어들었고, 그것은 못난 나라가 선택한 죄로 이국땅으로 팔려간 피지배국의 민중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이 선택한 '일포드'호는 거대한 과도기의 용광로가 되어 매우 짧은 시간에 그들을 근대의 - 근대로 격렬하게 접어드는 - 땅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제 타자의 세계에 내동댕이쳐진 그들이 자신의 세계를, 즉 (되돌아)가야할 자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두고 온 제물포의 기억에 끊임없이 얽매인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항상 목적한 곳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고 만다. 각기 다른 처지와 신분의 그들은 애처롭게 조국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다가오는 것은 그것이 소멸했다는 소식뿐이다. 그러는 와중에 타국 땅에서도 노동조합이나 종교적 갈등 같은 근대적인 사건은 민중들의 삶에 스쳐지나간다. 이국땅이든 어디든 개인도 나이를 먹고, 시대정신도 결국 나이를 먹기 때문이다. 이내 모국에 닿을 수 없음을 인식한 그들은 이국땅에라도 어떤 식으로든 뿌리내리려 애써보지만 그것마저 녹록치 않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남의나라 혁명인 것이다. 그들의 거대한 상실에 대한 치유의 욕망은 항상 어그러지고 만다. 결국 그들은 막다른 골목에서 이렇게 얘기할 뿐이다. '무국적이 되려고 해도 나라가 필요한 거라구' 그들은 이윽고 나라를 세운다. 적들로 우글대는 정글의 한복판에 세워진 흔적도 남지 않을 국가의 이름은 '신대한新大韓'이다. 아 이 얼마나 희극적인 비극인가.

그리고 그러한 '이주민의 상실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가족이라는, 돈이라는, 성공이라는, 권력이라는 꿈을 잡기위해 그것의 외부도 한번 생각해 볼 여유 없이 노동하는 현대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실질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하는 그때의 민중들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주체가 탄생하긴 했는데, 그 주체는 도무지 몸 붙일 곳이 없는 것이다. '노마드' 같은 것이야 있는 사람들의 잘난 체이지, 없는 사람들로서는 터전 없는 떠돌이가 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국가는 비겁한 표정으로 민중을 착취할 따름이다. 이미 백 년 전부터, 자본주의의 민중들은 정신분열을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비극적인 어그러짐을 자연스럽게, 담담하게 일상을 스케치하듯 - 물론 여기에서 번뜩이는 그의 ‘기교’는 논외로 해두자 - 묘사해나가는 것에 작가 김영하의 저력이 있다.

그는 절망을 그리는데 있어서 담담하며 희망을 그리는데 있어서 처연하다. 모든 등장인물의 일생을 두리번거리며 더듬는 듯한 그의 필체는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일상을 포착하는데 있어서 적실하다. 형식상에서도 그는 결말을 맨 앞에 배치함으로서 근대인의 운명적인 비극을 선취한다. 그는 절망을 말하는데 있어서 머뭇거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절망을 말하는데 있어서 무기력하지 않다. 그의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비극성은 결코 저열한 일상/인생을 비꼬는 관념의 유희에 머물지 않는다. 또한 그는 결코 섣부른 이분법을 늘어놓고는 그것에 의한 갈등을 잡다하게 피워놓고, 카타르시스로 내려앉는 통속적인 관습을 반복하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불우한 과거시대의 '개인'의 삶을 그림으로써 이제 이데올로기와 무관할 수 없는 어휘인 '민중'으로 포섭되지 않는 ‘현대인의 삶’을 성찰한다.(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포화 속에 천박한 자본주의가 심화되는 현실에서 ‘현대인이라는 범주가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까’라는 ‘비판적’ 질문은 어떠한 형식과 내용을 내포한 ‘김영하’라는 하나의 ‘취향의 대상’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로서 여기에서 다룰 성질의 것은 아닌 듯싶다)

어쨌거나 김영하의 그러한 성찰이 읽는 이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것은 그 '현대인'이 '민중'과는 전혀 무관하거나 혹은 단순히 반 편향으로 생성된 대상이 아니라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의 소설의 등장인물은 정신분석학적으로든, 정치경제학적으로든 어떠한 개인의 노력으로 벗어날 수 없는 구조에 연유한 헤어날 수 없는 삶의 절망을 겪는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고통의 근원은 그저 대책 없이 포스트 모던한 '개인적 이유'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다시말해 과거의 민중문학이 거대한 치열함에 천착했다면, 김영하의 소설은 작은 각자의 치열함에 천착한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파편화된 작은 것들을 그것 자체로 존중하면서 나름의 방식으로 거대한 이미지 하나를 직조해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작품을 보면서 때때로 짧은 숭고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다. 그리고 아마 이것이 그의 소설이 홍상수의 영화와 궤를 달리하는 지점일 것이다.

문득 '진지한' 민족문제를 - 물론 소재로서 - 다루는 그의 소설을 읽으며 김훈이 떠올랐다. 왜 역사에는 쿨하고, 삶에는 냉정하며, 미에는 끊임없는 집착을 보이는 김훈이 - 김영하 못지않게 국내 유수의 상을 휩쓴 - 그의 소설에서 떠올랐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를 성공케 한 '계급에서 벗어난 새로운 치열함과 정제된 세련됨'이 구성이나 문체를 통한 예술가적 유희로 전화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내 머리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사회와 개인(혹은 이런 이분법을 극복한 그 무엇)에게 모두 세심한 관심을 쏟지만, ‘나의 개인적인 취향에 비추어 보자면’ 그는 항상 '너무 돌리고 꼬아서' 말하는 것 같다. 물론 쉽게 읽으면, 그가 돌리고 꼬았다는 것조차 눈치 채기 어려울 정도로, 그가 지어내는 이야기는 그것 자체로 매혹적이지만 말이다.

소설 ‘검은 꽃’의 후반부, 누군가가 총을 손질하며 말한다. ‘이봐 정치는 모두 꿈이야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무정부주의든 다 마찬가지야. 서로 총질을 해대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란 말씀이지’ 하지만 그 말을 하는 그가 하는 행동이 무기의 손질이듯, 그럼에도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는 작가로서 김영하가 자신이 낳은 인물들의 ‘죽음’까지 치열하게 추적했듯, 우리도 이렇게 죽는 날까지 살아갈, 그리고 싸워나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혹은 어그러지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가’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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