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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또 올게 - 아흔여섯 어머니와 일흔둘의 딸이 함께 쓴 콧등 찡한 우리들 어머니 이야기
홍영녀.황안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5월
평점 :
쓰고 읽을 줄 모른다고 믿었던 어머니의 글로 쓴 일기장이 발견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아무도 모르게 하루하루의 단상들을 열심히 기록해 둔 노트들을 발견하게 된다면. 바로 이 책이 그런 엄마의 일기를 담고 있다. 어머니 홍영녀씨는 쓰고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자식들이 그녀의 8권의 일기장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이 책은 그런 홍영녀씨의 일기들과 딸 황안나씨의 일기를 함께 담고 있다. 홍영녀씨는 자식들을 이야기하고 황안나씨는 어머니를 이야기 하고 있는 일기들이다. 이들의 삶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가 너무나도 편안하고 다정했다. 특히 믿을 수 없는 것은 손주의 책으로 독학으로 글을 깨우쳤다는 어머니 홍영녀씨의 글이 너무 아름다웠다는 사실이다. 글을 읽고 쓰지 못했던 할머니의 글이 어쩜 이리도 아름답고 훌륭할 수 있는지. 홍영녀씨의 시는 정말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웠다. 읽는 내내 한 권의 시집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그리고 참 반가웠다. 이토록 아름다운 심상들이 글로 이 세상에 터져 나올 수 있게 된 것이 일개 독자일 뿐인 나도 너무나도 반가웠다. 어머니 홍영녀씨가 글을 알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면, 이 아름다운 시들과 노래들은 고스란히 그 육신과 함께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을텐데.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왜 글을 몰랐던 할머니의 일기이기에 그 글들은 어설프고 유치하리라 생각했을까? 마치 글을 모르는 사람은 그처럼 아름다운 생각과 시적인 표현들이 불가능하다고 믿어 왔던 사람처럼. 육신 속에 담겨있었던 그 고귀한 정신과 아름다운 세계는 글을 모르는 이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해 온 것처럼. 그렇기에 그녀의 글은 충격이었다.(유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의 글은 시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중에서도 최고였다. 어떤 독자도 염두에 두지 않은 글이기에 더욱 진솔했을까? 이 노트는 유족들에게는 가보고(한 출판사의 실수로 분실되었단다. 말도 안 돼!) 나 같은 독자에게는 잊지 못할 감동의 글이었다.
홍영녀씨가 어린 아들 무남이를 잃고 쓴 일기에서는 나도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게 이제 막 두 달이 지난 어린 딸이 있어서일까? 어린 자식을 잃고 쓴 어미의 글에서는 정말 짠 냄새가 났다. 얼마나 평생의 한이 되었을까? 글이라는 통로가 없었다면 그것이 가슴 안에 응어리져 얼마나 그녀를 괴롭혔을까? 물론 글로도 삭일 수 없는 슬픔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내 시어머니가 떠올랐다. 오래전 남편의 지갑에 들어 있는 시어머니의 편지를 본 일이 있다. 홍영녀씨가 자식을 바라보며 썼던 한 줄 한 줄의 일기처럼 내 시어머니의 편지 역시 그랬다. 둘은 서로 참 닮아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모든 어머니들의 편지이자 일기일지도 모르겠다.
늙은 노인의 역정과 자식에 대한 섭섭함과 삶에 대한 한숨이 담긴 글들에서는 '아, 내 엄마도 내 시어머니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자식을 향해 퍼주고 쏟아붓고 주는 것만을 보여 온 우리 어머니들의 삶에서는 그와 같은 감정들이 없을 것만 같았는데. 그토록 오랜 세월 자식 바라기를 하며 산 억척같은 한 늙은이는 여전히 연약하고 소심한 작은 여자였다. 내 어머니와 내 시어머니도 다르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면서 더 섭섭치 않게 해 드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너무나도 솔직한 글들이기에 더욱 가슴 깊이 느껴지는 글들이었다.
"어떡해. 나 오늘도 안 죽을건가봐" 병상에 누워 있던 홍영녀씨가 울며 딸인 황안나씨에게 한 말이다. 마지막까지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그야말로 눈물겨웠다. 임종의 순간을 묘사한 황안나씨의 일기를 보니 얼마 전 외할머니의 죽음이 생각났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가는 할머니를 배웅하는 엄마와 이모들, 삼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역시나 너무나도 닮은 장면들. 어머니에게 어머니였던 외할머니 역시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외할머니를 바라보는 엄마 역시 그런 기분이었을까?
정말 내 엄마 살아계실 때 이 책을 읽은 것은 참 다행이다. 만약 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이 책을 읽었다면 나는 대성통곡을 하지 않았을 자신이 없다. 책을 읽으며 내내 엄마가 그리웠다. 전화를 하면 받을 것이고 보고 싶어 찾아가면 문을 열어줄 엄마가 있다. 그러나 세월은 이것들을 결코 영원으로 두지 않는다. 이 책은 나에게 그런 그녀를 더욱 사랑하라고 또 사랑하라고 말했다. 내게 있는 두 어머니. 나를 낳아준 내 어머니와 내 사랑하는 사람을 낳아준 그의 어머니를 더 사랑하며 섬겨야겠다는 생각을 가슴 깊이 한 날이다. 이 글은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모든 자식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