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 - 아마존 예콰나족에게서 ‘인간 본성을 존중하는 육아법’을 배운다
진 리들로프 지음, 강미경 옮김 / 양철북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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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해당 출판사에서 발송한 신간 도서를 소개하는 메일을 보고 바로 주문해서 읽게 된 책이다.  신보를 접하게 되더라도 이래저래 살펴보고 어떤 내용인지 알아보고 책을 주문하는 편인데 이 책은 표지만 보고 곧장 주문했다.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이라....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이제 막 육아를 시작하게 된 내게 '육아의 원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몹시 궁금하게 했다.   

  나는 이 책이 이제 곧 쓰여진 책으로만 알았는데 국외에서는 1980년대 출간된 책으로 꽤 오래된 책이었다.  왜 이런 책이 국내에서는 인제야 첫 출간이 된 것인지 궁금하다.  이 책은 아마존 예콰나족의 육아 방식을 담고 있다.  이를통해 '인류가 지향해야 할 육아법을 되찾자'고 하고 있다.  요컨대,  그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 본성을 존중하는 육아법'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육아를 하면서 흔히들 '손이 타지 않게 기르기'를 원한다.  왜냐면 손이 탄 아이는 계속 안아달라고 하고 눕혀서 재울 수가 없으며 부모에게 껌딱지처럼 매달려서 성가시게 할 뿐만 아니라 아이를 돌보기에 체력 소모가 많이 되며 응석받이로 자랄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우리의 그런 생각이 인간 본성을 무시하는 육아법이라고 감히 말한다.  아기를 안아 재우다가도 잠이 들었다 싶으면 얼른 내려놓고 조금 칭얼대더라도 기저귀가 젖지 않았고 배불리 젖을 먹은 다음이라면 짐짓 모른 체 하고 아기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달려갈 수 있게 아기가 잠든 방문을 열어놓고 일을 한다.  그런데 이 책은 이렇게 아기를 내려놓으려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예콰나족의 경우는 아기를 항상 안고 다닌다고 한다.  말 그대로 항상.  오로지 부모 곁에서 떨어질 수 있을 때는 배변때이다.  그리고 아기를 안고 일을 하고 비바람을 맞고 일상생활을 한단다.  이렇게 자란 아기는 우리네 아기처럼 뻗대지도 않으며 악을 쓰고 울지도 하고 그들의 몸은 항상 부드럽고 부모가 어떠한 자세로 안더라도 균형을 잘 잡고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라서도 우리가 걱정하는 응석받이가 되기보다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자라고 있다고 증언한다.  더불어 포유동물 중 그중에서도 유인원의 경우 우리처럼 아기를 내려놓으려 고민하는 동물은 없다는 사실도 짚어준다.  그들은 어디를 가던 새끼를 달고 다니며 어미와 부모의 품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을 존중해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을 최소한 지켜가는 육아법이라고 말한다.  동물들이 지켜가고 있는 종의 연속성을 인간들은 무시하며 아기를 기르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논지다.  그러나 나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반드시 생활환경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진부한 반론이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예콰나족처럼 밀림에서 살지 않는다.  또한 아기를 항시 데리고 일하러 갈 수도 없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는 아기를 항시 안고 다니는 엄마를 나무라지 않으며 눈치 주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자급자족하고 살아가기에 임금을 받고 노동을 하는 형태의 생활 모습은 드물다.  (짐작건대,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기에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처럼 아기를 기를 수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고 무자비하게 사육(?)하고 있다는 말인가?  또한 인간의 육아와 동물의 새끼 돌보기를 서로 비교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인간은 분명 동물과는 다르다.  사고할 수 있으며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큰 차이점이 있음에도 비슷하게 생긴 생명체라는 이유만으로 유별나게(?) 양육하는 오늘날의 인간의 육아법이 그르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저자의 발견과 논지는 타당할 수도 있다.  그리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반문하고 싶다.  이런 육아법을 소개하며 '자연으로의 회귀, 본연의 육아법을 지킴으로 인간 본성을 존중하자' 고 한다면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시대의 흐름에 맞게 적응해나가는 인간의 습성은, 본성이 아니고 무엇이라 말인지?  우리 인류는 살아오며 도구를 사용하기도 하고 옷을 지어 입기도 하고 점차 발전(저자로서는 본성을 그르치는 일일지 모르지만)하며 살아가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옷을 입는 것은 인간 본성에 위배되는 일 아닐까?  우리와 같은 유인원을 보아도 옷을 입는 종들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부싯돌이 아닌 라이터와 성냥을 사용하는 것 또한 인간의 본성을 위배하는 일이 될까?  어쩌면 내가 억지를 부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나와 같이 까칠하고 머리 나쁜 독자를 위해서 현시대에서 인간의 본성을 존중하는 육아법을 제시했어야 옳다.  아무리 아름답고 보기 좋은 그림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걸어둘 빈 벽이 없다면 그것을 삶에서 늘 들여다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저자가 아마존의 예콰나족이 주는 원시의 느낌, 자연친화적 환경, 여행 중에 만난 삶의 또 다른 모습(저자는 여행 중에 아마존으로 가는 두 청년을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들과 갑자기 밀림으로 가게 되고 예콰나족을 만나게 된다)에 감동했으리라고 본다.  그것은 책의 앞장에도 잘 펼쳐져 있다.  그곳에 다다랐을 때의 느낌을 아주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저자는 나를 완전히 설득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주목하고 그것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밀림의 한 민족의 모습을 보여준 것은 상당히 가치로운 일이다.  그것은 이미 그것 자체로 몹시도 신성한 일이어서 누군가가 감히 옳다, 그르다로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도리어 현시대의 유행과 시대의 주된 흐름이 되는 사상을 아무런 의식 없이 바라보며 답습하기보다 문제점을 찾고 그것을 만족케 하는 대상이나 행위를 찾아내는 것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사실에 비견할만하다.  또한 현시대에 곳곳에 급파되는 무조건적인 서양 문화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진정 인간을 위한 육아법에 대해 고민한 흔적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전체적으로 아쉬운 부분도 있기는 했지만 '우리의 아이들을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고민해 보게 했고 지구의 작은 마을 예콰나족의 육아법을 내게 보여주었기에 충분히 흥미로웠다.  그러나 이들의 삶의 모습, 육아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몇 장의 사진들도 함께 수록되어(저자가 사진을 찍은 일이 있었다면, 문명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 그들에게 렌즈를 들이대는 일이 실례가 아니었다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어떤가?  우리가 아이들을 기르고 있는 일반적인 방식, 사회적 통념.  이것들이 반드시 옳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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