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고로야, 고마워
오타니 준코 지음, 오타니 에이지 사진, 구혜영 옮김 / 오늘의책 / 200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동물과 마음을 나눠본 누군가라면 그들을 단순히 '동물' 로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는 가족이기도 하고, 또 친구나 동생이기도 하다.  여기에 다이고로라는 장애를 가진 새끼 원숭이도 마찬가지다.  다이고로는 사지장애를 갖고 태어나 숲 속에서 가사상태로 저자에게 발견된 새끼 원숭이다.  이 책은 이 원숭이와 가족 간의 사랑을 담은 책인데 글과 사진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귀엽고 앙증맞은 다이고로에게 더욱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대개 부모는 아이들에게 완전한 것을 주고자 한다.  예쁜 것, 바른 것, 건강한 것, 신선한 것....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다이고로는 사지가 없다.  솔직히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런 장애를 가진 동물을 품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아이가 있는 집에 이런 동물을 들이기란 쉽지 않은 결정일 것이다.  그런데 오타니네 부부는 이런 중증 장애를 가진 원숭이를 가족으로 맞았고 아이들 역시 다이고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최근 뉴스에서 늑대소년에 관한 소식을 본 일이 있다.  '인간이 고립되어 야생에서 자라게 되면 요즘도 저럴 수가 있나?' 싶었다.  우리는 학창시절 늑대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익히 들은 일이 있다.  인간이 인간의 양육도 보호 속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볼 수 있는 단적인 예였다.  그런데 여기 반대의 사례가 있다고 해도 될까?  다이고로는 아주 어렸을 때 숲 속에서 가사상태로 발견되었고 오타니 가족과 함께 지내며 다른 생명과 교류를 하게 된 셈인데, 이 원숭이는 신기하리만치 인간을 닮았으니 말이다.  토라지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하고, 오타니 부부의 자녀들과 다투기도 하고.  참 신기했다.  또 이토록 자유로운 감정을 표출 할 수 있었던 것도 진정 가족으로 받아들여 준 오타니 가족들의 사랑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동물을 기르는 것은 아이들 정서에 정말 좋다.  이것은 동물을 길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물론 건강상의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찬반이 거센 것이 사실이다.)  컴퓨터 게임이 아닌 따뜻한 온기를 가진 생명을 돌보며 보호하고 그들과 웃음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경험은 오늘날 우리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하지 않나 싶다.  몇해전 나는 아주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다.  아파트 단지에 아이들이 둥글게 원을 만들어 모여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기웃거리고 그 아이들이 만든 원의 한가운데를 보고 정말 경악했다.  그들이 만든 원 안에는 병아리가 있었다.  죽어가는 병아리.  단지 죽어가는 동물을 봤기에 참담했던 것이 아니었다.  사연인즉, 아이 중 몇은 아파트 고층으로 올라가 베란다에서 이 병아리를 던졌고 죽음을 맞으며 온몸을 뻗는 병아리를 보기 위해 황급히 엘리베이터를 다시 타고 내려와 이 무리에 합류했으며 나머지 아이들은 아래에서 기다리며 추락의 장면을 감상했다는 것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빨리 안 올라와서 짜증났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몇 번 날개짓했어.  봤어?' 라는 말과 함께.  이들에게 생명은 없었다.  병아리는 노란색이 아니었다.  현란한 색으로 물들여져 있었고 이 병아리는 학교 앞에서 싸게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 이게 순수하고 때 묻지 않았다는 아이들의 모습일까?  생명은 소중한 것이고 이런 행동은 나쁘다는 일장 연설도 그들에겐 먹히지 않았다.  한 아이가 비로소 완전히 죽은 병아리의 다리 한쪽을 붙잡는가 싶더니 원반던지기라도 하듯 화단으로 던져 버리자 일제히 만족스러운 웃음과 환호로 아이들이 흩어졌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당시 유치원 교사로 근무하던 나는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 너무 놀랐고 인간의 잔혹함에 치가 떨렸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나의 교육 철학은 '생명을 존중하며 자연 사랑하는 아이로 양육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 한 순간도 변한 적이 없다.  생명을 존중한다면 누군가에게 해코지 할 수 없다.  아무리 작은 생명이라 할지라도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닌 이상 의도적으로 죽일 수 없다.  생명과 자연은 어찌 보면 같은 맥락일지도 모른다.  자연을 사랑하는 아이라면 파괴할 수 없으며 훼손할 수 없는 것이다.  보존하고 가꾸어갈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만 하도록 하자.  아무튼 이런 아이들에게 생명의 귀함과 신비로움을 체험하고 목격할 수 있는 순간이나 경험이 있었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많은 무리의 누군가는 그것을 말렸을 것이고 그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의 표정은 어두웠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 하나가 되어 생명을 죽였다.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호흡과 떨림을 보고 즐거워했다.  그 아이들은 병아리가 아니라 급기야 친구에게 해를 입일지도 모른다.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오타니네 부부의 아이들이 다이고로를 돌보고 사랑하며 짓던 미소와 병아리를 죽이던 아이들의 미소가 서로 오버랩됐다.  너무나도 달랐다.  물론 생명 사랑을 반드시 동물 사육을 통해 길러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동물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동물을 좋아하세요" 라고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더구나 사지장애를 가진 다이고로를 거둔 이 가족들은 선하고 무심히 지나쳤을 누군가는 악하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단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끼지 않는 상황임에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해악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책으로 돌아가 보자면,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내내 감동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아내인 에이지씨는 다이고로에게 자신의 젖을 물리기까지 했다.  개인적으로 이것은 참 의문이 들었다.  동물을 가족처럼 대하고 사랑하는 것은 지당하지만 인간의 관점으로, 또한 인간의 양육방식을 그대로 동물에게 적용하는 것은, 글쎄다.  이것도 동물 사랑의 일환이며 서로 다른 관점의 차이라면 그냥 그렇다고 하자.  그래, 솔직히 말해 나는 동물에게 내 젖을 물릴 생각은 결코 없다.  단지 그것이 좀 비위가 상했다고 할까?  아무튼 나로서는 그랬다.  그리고 아이들은 다이고로를 사랑했지만 간혹 에이지의 관심이 다이고로에게 빼앗겼다는 기분이 든 것인지 서운해하는 고백들이 있었고 다이고로의 죽음 앞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혼절하는 엄마 에이지의 모습에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들도 보였다.  개인적으로는 반려동물과 동거하며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하나가 동물이 인간을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인간이 동물을 떠받들어서는 안된다.  둘은 생명을 가진 별개의 개체고 서로 공존하며 함께하는 것이지 동물이 인간의 응석받이가 되고 사람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에이지가 다이고로를 대하는 태도는 조금 더 절제되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년간의 시간 동안 다이고로는 가족들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사랑, 생명에 대한 신비, 가족애, 즐거움, 기쁨 그리고 그리움.  아마 이 가족들에게 다이고로와 함께 했던 경험은 두고 두고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며 이로 인해 아이들은 어떠한 동물도 사랑하며 어떤 장애를 가진 대상도 편견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 가족들과 다이고로의 사랑을 지켜보는 나도 참 흐뭇한 기분으로 읽었던 것 같다.  약하고 불완전한 몸으로 인간들에게 사랑과 생명의 감동을 준 다이고로.  다이고로야,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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