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전원 교향곡 - 을유세계문학전집 24 을유세계문학전집 24
앙드레 지드 지음, 이동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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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과 '전원 교향곡'은 이름 난 고전이다.  그러나 나는 부끄럽게도 이제서야 이것을 읽어봤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왜 이제서야 이 책을 읽었나' 후회스럽기도 하고 '이제서라도 이 책을 읽은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다.  그리고 새삼 고전만이 간직하는 이 문학적 기품에 적잖이 매료당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소설이다.  이처럼 아름답게 인간의 번뇌와 고민 그리고 감성을 묘사한 책이 또 있을까.  '좁은 문' '전원 교향곡' 이 두 편 모두 굉장히 서정적이고 목가적이다.  '좁은 문'은 내가 사랑하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는 듯 하기도 했다.  이 모두 서신(좁은 문: 제롬과 알리사의 편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베르테르가 빌헬름에게 보낸 편지)이 작품에서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비극적인 결말도 그러하고 독자에게는 마지막 고백이 될 글들(좁은 문: 알리사의 일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베르테르가 죽고나서의 이야기들), 무엇보다 자연에 대한 찬양과 경이로움을 담았다는 점이 그러했다.  

  알리사와 제롬의 사랑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렇게나 서로를 갈망하지만 결코 결혼만은 할 수 없는 사랑이라니.  세상에 이런 사랑이 또 있을까.  이 둘의 사랑이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한 편으로는 알리사가 야속하기도 했다.  그들의 사랑이 결혼으로 옮겨가지 못하는 모든 이유가 그녀에게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알리사의 일기를 읽는 순간, 나는 그녀를 동정하고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작품을 이야기하자면 종교 이야기도 해야만 할 것 같다.  알리사의 절대적인 신앙.  그녀는 신 앞에 겸손하고자 했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드리는 삶을 원했다.  그러나 자신과 제롬 사이에 존재하는 그 분 앞에서 제롬을 택할 수 없었기에 그 힘든 싸움을 했던 것이다.  기독교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신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사랑의 방해자가 될 수 있나'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는 그 누구도 신에게 향하는 경배와 찬양 이상의 것을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불경한 일이기도 하다.  알리사는 이 점에서 번민했던 것이다.  제롬을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모든 감각과 자신의 존재함 그 모든 것을 바칠 만큼 사랑했기에 그녀는 그런 마음을 바로 잡고 싶었던 것이다.  누가 그녀를 어리석다 할 수 있을까.  이런 지고지순하고 숭고한 신에 대한 사랑을 누가 함부로 말 할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좁은 문'에서는 당대 문학에 대한 비판도 숨어있다.  제롬과 알리사가 나누는 대화나 그들이 읽는 책들이 그것을 밝히 보여준다.  이 점을 읽는 것도 재미난 일이다. (아쉬운 점은 나는 겨우 그들의 몇 작품만을 읽어봤을 뿐이라는 것)  그러나 '좁은 문'에서 내게 가장 으뜸가는 부분은 그들이 나눈 대화였다.  그것은 아름답기그지 없었다.  그리고 자연 곳곳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는 이 작품이 얼마나 서정적이고 섬세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이런 대목들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전원 교향곡' 역시 너무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과연 누가 이런 숭고하고 겸손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도 앙드레 지드는 종교적 딜레마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 사랑은 목사와 시각 장애인 소녀(제르트뤼드)와의 사랑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 사랑을 천박하다 하지 못할 것이며 아무도 이 둘을 지탄할 수 없다.  그 사랑은 인간 그 자체만을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사랑에는 뜨거운 욕정의 순간이라든지 서로를 탐하고 취하려는 욕심은 결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문학적인 기품에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을 만큼 독자를 사로잡는게 아닐까 싶다.  제르트뤼드는 보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느끼고 분별하는 세상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나는 내가 이 세상을 너무나도 뚜렷이 볼 수 있다는 것이 아주 짧게나마 원망스럽기도 했으니 말이다.  특히나 인상적인 부분은 목사와 제르트뤼드가 음악회에 간 장면이다.  악기의 음색을 색깔로 표현하는 대목.  이 찬란하고 경이로운 묘사를 과연 누가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제르트뤼드가 목사에게 자신이 호수에 뛰어든 진짜 이유를 말하는 장면이다.  제르트뤼드는 모두가 말한 것처럼 호수에 핀 꽃을 꺽기 위해 호수가 육지처럼 단단하리라 생각하고(그녀는 한 번도 호수를 본 일이 없으니 이렇게 유추한 것이다) 발을 딛어 빠진 것이 아니었다.  개안수술을 하고나서 처음 보는 아멜리(목사의 아내)를 보고 그녀의 고통이 스민 얼굴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도 제르트뤼드도 둘은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목사는 제르트뤼드에게서 눈을 뜨고 보는 것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엿볼 수 있었고 제르트뤼드에게 목사는 단 한 줄기의 빛이였다.  오로지 그를 통해서만이 세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옳지 않지만 '그건 나빠요' 라고 말하고 나설 용기를 주지 않는 사랑.  이들의 사랑이었다.    

  앙드레 지드가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것처럼 이 두 작품 안에는 종교에 관한 갈등의 순간과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종으로 살고 싶었고 영광을 돌리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는 이 신앙으로 인해 넘지 못할 문제들에 직면한 적이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이 두 작품에서는 이상하리만치 남녀의 욕정에 대한 묘사가 없다.  이 점은 앙드레지드가 지독한 금욕주의자였단다.  그렇기에 그는 이 두 편의 어느 순간에도 남녀의 애욕을 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알리사는 앙드레 지드 자신이 아닐까?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며 그 사랑이 깊어감과 동시에 신에게 대한 죄스러움을 느꼈으리라 생각된다. 

  이 두 작품은 정말 어느 것을 우위에 둘 수 없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고상하고 숭고하다.  이런 인간의 번뇌와 신에 대한 절절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귀하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정신의 주축이 될 만한 어떤 사건과 상황에 대해 지나치리만치 고민하지 않고 밤을 지새우지 않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괴로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말이다.  그것은 비로소 인간에게 부여된 원죄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이 아닐까.  아름다운 이 두 편의 소설은 내게 또 하나의 등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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