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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진중권 지음 / 푸른숲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진중권의 <폭력과 상스러움>을 이제서야 읽었다. 이 책은 정혜윤의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를 읽으며 일고 싶어졌던 책이다. 사실 그 책을 통해 난 읽고 싶은 몇 권의 책을 더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그것들 중 가장 먼저 읽은 책이다. 이 책을 읽겠다 혼자 다짐을 하고 아홉여달이 지난 이제사 읽게 되었지만, 아무튼 내게는 제법 서둘러 읽게 된 책이기도 하다. 왜 이토록 이 책이 읽고 싶었냐고? 사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단지 나는 진중권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서. 그래서였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백분토론의 단골손님이기도 한 그의 언변이 얼마나 유창한지, 또 얼마나 논리적으로 탄탄한지 말이다. 솔직히.... 솔직히 말이다. 그냥 '진중권, 당신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보자!' 내심 뭐 이런 불손한 의도로 이 책을 집었다. 이게 다다.
폭력과 상스러움. 폭력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자비함과 상스러움이라는 단어의 경박함. 그러나 난 이 표제가 싫지 않았다. 도리어 단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분위기를 훌렁 벗어던질 수 있는 멋진 조합이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책이 담은 내용을 이처럼 함축적인 표제로 쐐기를 박을 수 있음이란. 아,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책에서 말한 그의 개인적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단지 진중권, 그가 이 책을 이리 간단 명료한 두 단어 속에 담았다는 것은 제법 경쾌했다.
먼저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잠시 이야기를 나눠보자. 이 책은 그의 말을 빌자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모두 '인용'과 거기에 붙인 그의 코멘트로 이루어져 있(머리말에서)'다. 다시 말해, 한 문장을 씹고 삼켜 제 나름대로 걸쭉하게 배설해냈다는게 아닐지. 그러니 나는 이제 진중권의 똥맛을 볼 일만 남았다. 얼마나 이쁘게 잘 싸놨는지 말이다. 오오, 이 책은 정말 아주 특별할 뻔 했다. 또 다시 그의 말을 빌자면, '실현되지 않았지만 원래의 의도는 인용에 붙인 코멘트마저도 남의 말의 인용으로 채우는 것이었(역시 머리말에서)'단다. 이 책이 이렇게 쓰여졌다면 필시 나는 읽기도 전에 이 책을 나의 베스트에 단숨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바로 발터 벤야민의 <파사주>에서 '인용부호를 붙이지 않고 인용을 하는 법....(또 머리말이야)' 이라는 대목을 거론했다. 한 마디로, 그는 인용구의 코멘트들을 전부 남의 말의 인용으로 채우지는 못했으나 결국 인용구를 붙이지 아니하고 남의 말의 인용으로 채우려는 자신의 의도와 그리 멀지 않게 접근한 글이라는 점을 짚어 주었다. 논증 없이 주장하는 것은 무모하다는 것을 아는 자 다운 서술이 아닌지.
그런데 이는 비단 책의 머리말에서 뿐만 아녔다. 1장 폭력에서 첫 chapter인 '마이너스1의 평화' 를 읽고는 감탄했다. '오호~ 최고봉 논객다워' 그는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에서의 '비폭력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화해의 희생양을 하나 뺀 모든 사람의 일치다' 라는 인용구에 붙임글이었다. 아, 르네 지라르라는 자가 말한 이 문장은 그의 이름처럼 얼마나 지라-ㄹ스러운지 모르겠다. 아니, 그렇지 않다면 이 문장을 한국어로 초기번역한 자의 죄로 치부해야 할까? 그런데 진중권은 이 문장을 아주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것도 아주 알아 듣기 쉽게. (근데 뒤로 갈수록.... 음, 소위 말해 지식인만이 해독할 수 있을 법한 어투와 단어로 내게 큰 소외감을 안겼지만 말이다.) 나는 이 chapter를 읽고 그에게 살짝 매력을 느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근데 이 매력이 오래갈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
폭력에 이어, 죽음, 자유, 공동체, 처벌, 성, 지식인, 공포, 정체성, 민족, 힘, 그리고 프랙털을 끝으로 그의 엑스리브리스는 끝이 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때로는 화가 나기도 했고(그가 거론한 자들과 사건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이 책을 읽었음에) 답답하기도 했고 또 톡쏘는 탄산음료 한 잔을 원샷하고 목구멍이 찢어지는 듯한 알싸함을 느껴야 했다. 이 여러 cahpter 중 특히 내게 관심이 있었던 chapter는 5장 처벌이었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내 관심사이자 고민의 대상이 되어왔던 사형제 존치, 폐지에 대한 대립과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피우스 12세의 <국제형법에 관하여>에서 형벌의 보복 기능을.... 부정하는 것은 부당하다;p.127' 라고 빌어온 것을 보면 굳이 가릴 필요는 없겠지만 그는 사형제 폐지론자인 듯. 이건 뭐 중요한 건 아니다.) 여하튼 그는 사회적인 이슈와 화두를 곱게 지나치지 못한다. 꼭 칼질을 하든, 똥칠(어떤 것을 소화하고 자기 방식대로 뱉아낸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을 하든 하고야 만다. 어쩌면 이는 이 시대를 사는 생명력있는 철학자가 되고 싶음이 아닐런지 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칭찬을 하고 싶다. 혹자는 '지가 뭔데 자꾸 여기 저기 들쑤셔?'' 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 자가 정말 수준높은(아무도 규명한 일은 없음) 논객이 맞나, 자질이 의심스럽다고 생각되는 대목 또한 여럿 있었다. 이를테면, 독자의 무지와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이 단죄하고 정죄할 자에 대해서는 거침없다는 점이다. 왜 그러한지, 그들이 왜 그리 당신께 욕을 잡숴야 하는지는 거두절미하고 막말을 해댄다. 어쩌면 그의 이런 태도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거침없고, 일부러 고상한 척 하지 않는 그의 언변으로 인해 때로는 통쾌해지기도 하고 우리와 같은 단어의 욕지거리를 하는 자라는데서는 동질감을 느끼며 그에게서 매운 고춧가루의 후끈함을 찾는게 아닐까 싶다. 이에 너무 심취하다보면 이게 무김치인지 배추김치인지도 모르고 그저 매운 맛만 알게 되는게 아닐지 염려스럽다. 비슷한 예로 와이텐 뉴스의 전유경기자가 변희재를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라고 공중파 방송에서 말한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놈이 듣보잡이라고 생각하는 건 당신인데 왜 우리가 그를 듣보잡으로 여겨야 하는 것인지 말이다. 듣보잡이고 아니고를 판단하는 기준은 각 개인에게 있는 것이다. 누가 감히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몹쓸 것으로 단죄할 수 있느냔 말이다. (나 살짝 흥분한듯;;)
각설하고 이 책은 굉장히 강렬하다. 그가 빌어온 인용구들에서부터 그러하고 '김이 모락모락나게 예쁘게 눈' 그것들은 더욱 그러하다. 이 한 권의 책으로 그를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어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진중권이라는 자에 대해, 그의 사유방법에 대해 조금이나 접근하게 한 책임에는 틀림없다. 기회가 된다면 그의 <미학 오디세이>도 한 번 읽어보련다. 아무튼 이 책은 나에게 굉장히 재미있는 책이었다. 진중권씨,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