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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전경린의 작품으로는 <엄마의 집>, <열정의 습관> 이후 세 번째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고 안 일인데 영화 <밀애(2002)>의 원작소설이란다. 영화도 봤었는데, 영화보다는 책이 더 제대로가 아닌가 싶다. 영화를 보고서 드는 생각이라곤 '불륜은 왜 맨날 침대에만 눕지?' 하는 생각 밖에 안 들었으니 말이다. '야한 영화' 한 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 영화를 2002년도에 봤고 지금이 2008년이니 그로부터 6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때는 내가 어렸기에 그랬을까?
영화를 먼저 봐서인지 내 머릿 속에선 어김없이 미흔역은 김윤진이, 인규역은 이종원에게 맡겨졌다. 어찌보면 영상을 활자로 회상한 일이었을지도. 그러나 확실히 영화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이 책 역시 전경린만의 문체가 도드라졌다. <엄마의 집>을 읽었을 때도 역시 그랬다. <엄마의 집>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휘황찬란한 문체가 오히려 거슬리는 느낌이었다. 책을 덮고 나서는 그것이 하나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이다. 전경린은 잔뜩 기교를 머금은 모호함과 공감각적인 표현을 즐기는 것 같다. 그녀의 필명 전경린 역시 '고 전혜린' 여사의 그것을 흉내낸 것이라는데 그렇다면 전경린은 문체에 적잖은 비중을 두고 글을 짓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느 작가나 그렇겠지만 그녀의 경우 좀 더) 전혜린 글의 매력 역시 그녀만의 문체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글이 매력적인 이유는 비단 문체때문만은 아니다. 사유의 깊이 그리고 삶에 대한 진지함, 인텔리한 시선은 더욱 훌륭하다.) 그런데 <엄마의 집> 보다 이 전에 쓰여진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이 훨씬 단정하고 정돈된 느낌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갈 수록 기교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일지. 또 '이 문장을 반드시 쓰고 싶었나 보다' 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이야기를 위해 쓰여진 문장이 아니라 이야기와는 별 상관없이 쓰여진 문장들 같은 것이다. 지나치게 시선을 끄는 문장들.... 틀림없이 매력적인 문체인 것은 같은데 그것이 너무나도 의도적이 느낌이 든다. 똑같은 표현을 여러 군데에서 쓰고 있는 점도 들 수 있겠다.
그녀의 문체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하자. 그러나 전경린 소설에서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점 중 하나가 그녀의 문체일 것이다. 미흔과 인규의 게임은 사랑일까? '사랑' 거참 유행가 가사처럼 알다가도 모르겠다. 사랑은 뭐지? 불륜. 불륜도 사랑일 수 있을까? 사랑. 그것이 아름답고 고귀한 속성을 가진 정신적인(혹은 육체적인) 활동인 것이라면 불륜은 사랑이 아닐게다. 불륜안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손 치더라도 나로서는 그것을 곱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결코 아름답게 여길 수는 없을 것 같다. 불륜이라는 것은 소위 말해 결혼이라는 제도로 확증된 두 사람이 제도 속 계약권자가 아닌 다른 자를 사랑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배우자의 믿음과 신의를 져버린 그것을 어찌 미화할 수 있겠으며 아름답다 두둔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아름답지 못했다. (아름답지 못하다고 해서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표제가 주는 느낌은 소중하고 절대 잊지못할 기억들로 가득한 이야기들이 담겼을 것만 같다. 예를 들어, 잊지 못할 생일선물이라든가, 기분좋게 특별한 경험이라든가. 그런데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우울했다. 남편(호경)의 내연녀와의 대면에서부터 인규(외간 남자)와의 사랑 그리고 파멸. 이 책의 제목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이다. '하루뿐인' 도 아니고 '하루뿐일' 이다. 이것은 다시없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표현이다. 게다가 '꼭' 이라는 단어도 힘주어 써두었다. 내(미흔) 생에 꼭 하루 뿐일 특별한 날은 인규와의 만남이었다. 인규와의 사랑이었다. 호경(남편)에게 배신감을 떨칠 수 없었던 상처받은 미흔이 인규를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다. 인규는 그녀의 영혼을 위로해주고 오로지 그를 통해서만 정신적인 위안을 얻는다. 인규의 말대로라면 상처를 주고 받지 않아도 되는 '게임'이다. 어느 한 쪽이 사랑한다고 말해버리면 지게 되는 게임. 승자는 없고 패자만이 존재한다는 게임. 그런 게임을 제안하는 인규는 어떤 상처가 있었을런지. 이 책에 나오는 자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빈 집터로 남았지만 그 곳에 살았던 부희, 휴게소 여자 은연, 미쳐버렸다는 인실 할머니, 미흔의 엄마. 그리고 미흔, 인규, 호경. 모두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상처와 대면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자신 내부에서가 아닌 타인이나 바깥의 것으로 그것들을 치유하려 하고 있다. 살던 곳을 떠나 이사를 한다(미흔&호경, 휴게소 여자 은연, 부희네 집 사람들) 그러나 간절히 상처가 낫기를 바라며 번민하는 고독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전경린의 화두는 '성'이다. <엄마의 집> <열정의 습관> 그리고 이 책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역시. 전경린은 이 책에서 상처받은 자들이 서로를 치유하는 과정을 '성'을 빌어 풀었다. 두 사람의 정사. 서로의 몸에 자신을 기록하기 위한 정사. 그것은 인규와 미흔만의 대화 방식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흔히 하는 데이트 같은 것보다 서로의 몸에 탐닉하는 행위로 대화를 대신했다. 잘 모르겠다. 섹스라는 것이 남녀에게 혹은 부부에게 얼마나 큰 문제의 것이며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 것일지. 오로지 '미친듯이' 몸을 섞는 짓만으로 사랑을 할 수도 있는지. 아니 그것을 사랑이라 불러도 좋을지를 말이다. 이 책의 성애는 은밀하면서 노골적이다. 그런 행위 가운데 숨겨둔 뜻이 있으리라 믿기에 저질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 책에서 미흔과 그녀의 친구들은 이렇게 말한다. '대체 예술이 되는 섹스와 외설이 되는 섹스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니?....(중략).... 가슴이 빈약하고 머리가 짧고 화장도 하지 않고 단순한 속옷을 입은 여자가 하면 예술이고 가슴이 크고 머리가 길고 화장도 하고 튀는 속옷을 입은 여자가 하면 외설이야. 거의 그래(p.218)' 에서 처럼 미흔과 인규가 튀지 않는 평범한 자들이기에 그들의 짓을 예술로 읽어야 할지.
불륜. 그러나 그들은 그런 관계 속에서 상처를 떨친다. 절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을 것만 같던 인규가 '사랑한다' 말하고 다시는 삶을 삶같이 살지 못할 것 같던 여자 미흔에게도 열정이 생기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를 쏟을 수 있는 그 무엇. 헤어나오지 못하게 나를 빠뜨릴 수 밖에 없게 하는 그 무엇이 없는 일상은 무미건조하다. 그것이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야 하는 자들에게라면 더더욱. 전경린의 이야기는 모두 하나의 이야기다. 한 권의 소설은 또 다른 한 권의 소설에 속편처럼 존재한다. <엄마의 집>도 <열정의 습관>도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도. 서로가 서로의 속편이다. 어쩌면 전경린의 모든 소설이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그녀의 다른 책도 급히 읽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