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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배수아의 글은 작년, <철수>를 처음으로 읽었다. <철수>는 뭐랄까? 오만한 작가들이 흔히 그러하듯 자신의 글에 도취되어 쓴 듯한 느낌이 거북했다. 다시 말하자면, 누구도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작가 자신만의 세계를 담은 작품 같았다. 그런 혼자만의 공간을 넌즈시 보여주며 세상과 자신은 분명 다르다고 선을 긋는 작가들. 배수아의 첫느낌은 그랬다. 아니 <철수>는 그랬다. 지적 허영에 빠져있거나 자아도취에 빠져있거나 둘 중 하나라는 생각. 이렇듯 배수아와의 첫 만남은 그다지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의 글은 중독성이 있는 것일까? <철수>를 읽고서 맘에 들지 않아, 맘에 들지 않아.... 중얼대면서도 나는 어느새 그녀의 책을 또 펼치고 있었다. <내 안에 남자가 숨어 있다>를 읽었다. 그 작품을 읽고서 그녀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배수아. 이 여자 뭐지? 오만한 척 하는거야? 아님 정말 남다른거야?
세 번째로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를 읽었다.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이 얼마나 인터넷 소설틱한 제목인지. 이 얼마나 청소년기 풋사랑스러운 발언인지. 그러나 결코 가벼이 보아서는 안되는 책이었다. 마치 거울처럼 이 시대를 비추어 담은 책이었다. 감히 말하고 싶다. 비로소 배수아를 알게 한 책이라고. 배수아의 글은 그녀의 모습과 닮았다. 표정이 걷힌 얼굴에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듯한 냉소적인 눈빛. 그녀의 글이 바로 그러하다. 그녀가 글 속에서 인간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적나라하고 냉정하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세상 그대로를 투영시킨다. 이 책을 읽는동안 잠시 잠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 떠올랐다. 뭐랄까? 인간의 내면에 결코 들키고 싶지 않은 속내들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까발기는 바람에 당황스러웠던. 그래서 왠지 불편했던.
이 책,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군더더기 없이 단정한 그녀의 문체도 마음에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배수아식(?) 소설을 짓기에 가장 어울리는 문체가 아닐까 싶다.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는 삼십대 독신녀들의 사랑, 결혼, 일, 친구, 타인의 시선을 담고 있다. 나? 삼십대다. 독신녀냐고? 음.... 독신주의자는 아니지만 어찌되었건 지금 상황은 독신녀나 하등 다를게 없지. 그렇지 뭐. 그래서일까? 책 속의 그녀들 모두가 공감이 갔다. 왠지 표독스러운 그녀들이 나같기도 하고 내 친구들 같기도 했으니 말이다. 여자들이란 참 말이 많고 분란을 쉬 일으킨다. (여어~ 그렇다고 날보고 뭐라 하진 말라고. 나도 이런 여자니 말이야) 오죽하면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 는 말이 있을까? (점입가경이군.) 혹시, 당신도 뒷담화가 무서워 화장실 가는 것이 꺼려진 일이 있는가? 이 책에서의 그녀들이 딱 그러하다. 그네들의 뒷담화가 어찌나 진솔하며 어찌나 냉정하던지. 그런 여자들의 심리 묘사가 너무나도 잘 된 작품이다.
또 하나 내가 깊이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현실과 꼭 닮은 이야기라서 그러했다. 이 사회, 물질만능주의의 팽배라고 하지? 그 중 하나가 소위 말하는 '결혼의 조건' 아닐까? '사랑만으론 못 살아. 사람을 살게 하는 건 돈이지. 그러니 결국 바닥을 드러낼 사랑을 보고 시집을 가느니 얼마나 빵빵한지를 보고 가는게 현명하지 않겠어?'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면 팔자를 고친다' 속물주의에 찌들 찌든 배우자 사냥의 대표적인 슬로건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말들, 이런 사고들.... 역겹다. 이리 말하면 마치 나는 가질만큼 가진 사람이라 돈 아쉬운 줄 몰라 그런다고 하겠지? 아니 어쩌면 너무 없이 자란데서 길러진 자격지심이 아니냐 할런지도 모르겠다. 이 시대 젊음이들이 배우자를 선택하고 바라보는 시각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유경의 사촌 '금성' 의 배우자의 자격요건들을 보는 내내 현시대의 단상이 아닌가 싶어 씁쓸했다. 여담이지만, 난 좀 더 훌륭한 배우자를 선택하려는 젊은 눈이 못마땅하다는게 아니다. 단지 오로지 돈, 돈. '돈 이상은 아이 돈 노' 라는 그런 눈이 싫은 것이다. 이리도 수용할 수 없는 이야기에 왜 매력을 느꼈냐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그 치들의 속을 훤히 볼 수 있어서. 또 그것이 정당하고 타당할 수 있다는 설득이 재미있었다.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는 현시대 젊은이들의 모습과 움직임을 살필 수 있어 즐거웠던 책이다. 배수아가 이것을 단지 보고하고자 했다면, 고발하고자 하는 글을 썼다면 매력 절감, 가치 하락이었을지도. 그러나 문학적인 기품이 살아있다. 8개의 프롤로그로 들어가는 이야기 구성도 마음에 들었다. 나에게 있어 배수아가 겉멋들린 작가에서 글을 쓸 줄 아는 작가로 바뀌었다면. 그야말로 환골탈태요! 뭐랄까? 배수아는 오만하다. 그러면서 신랄하고 또 영리하다. 배수아에게 관심이 간다. 그녀의 작품을 더 읽어 볼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