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치바 이사카 코타로 사신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러시라이프>, 그리고 <사신 치바>로 연이어 이사카 코타로까지 읽다보면

단골로 다닐만한 꽤 괜찮은 식당 하나를 알게 된 듯한 느낌이 든다.

메뉴 구비도 적절하고 맛도 일품. 자주와도 질리지 않을 그런 맛.

소개팅해서 맘에드는 처자라도 나오면 염두에 두고 있다가 기회 봐서 함께 올만한,

그런 식당.

이제 남은 메뉴는 <중력 삐에로>와 <칠드런>인데 또 어떤 맛을 선사해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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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hand 2006-06-27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난달에 읽은 러시라이프에 이어 지금 칠드런을 읽고 있는데, 동감입니다. 맛깔나는 소설들인것 같아요.

한솔로 2006-06-27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에 소설이란 곧 이야기라는 걸 새삼 증명하는 작가 같습니다
 
물거울
로제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6월
평점 :
품절


한 권에 책이 이끌리는 길은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며 그 경우의 수도 무수할 테지만
장 그르니예의 <섬>을 소개하는 까뮈의 글만큼 아찔한 유혹을 선사하기란 쉽지 않을 듯.

"알제에서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라고 시작되는 그 글.

프랑스에서 지붕 밑 방을 의미하는 '그르니예grenier'라는 이름과 접하기 위해서는
까뮈를 통과해야 한다. 앞서의 장 그르니예는 까뮈의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의 스승이며
<물거울>의 작가 로제 그르니예는 까뮈가 주도한 <콩바>지와 <프랑스 수아>에서
기자생활을 하였으며 까뮈의 죽음을 보도하기도 하였다
(로제 그르니예가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며 까뮈를 초대하자
평소 결혼에대해 회의적이던 까뮈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거 잘됐군. 어차피 어리석은 짓을 할 바엔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게 낫지, 그럼.")

로제 그르니예는 <시네로망>이라는 소설의 머리에 스콧 피츠제럴드를 인용한다.

"물론 어떤 삶이든 삶이란 붕괴의 한 과정에 불과하다."

<물거울>의 역자 김화영(한국에서 프랑스문학과 접하기 위해선 이 이름을 통과해야 한다)에 따르면
로제 그르니예의 "전작품을 관류하고 있는 어떤 톤을 암시"하며
"그의 작품은 무엇보다 삶의 덧없음에 대한 애틋한 인식과 그 덧없음 때문에
오히려 더욱 귀중한 삶, 그 "붕괴의 과정"에 대한 수줍은 증언과 향수,
그리고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고 한다.

그의 몇 개의 단편집에서 선별한 이번 책, <물거울에서>에서
"존재하는가"는 비행기사고로 사망한 여배우 요한나의 전기를 쓰기 위해
관련인물을 찾아나선 고스트 라이터(ghost writer) 나딘의 추적과정을
추리소설의 외피로 묘사한다. 본의아니게 탐정노릇을 하게된 나딘은
체코와 프랑스, 미국을 경유하며 요한나의 이면의 삶을 재구성하려하나
정작 그녀가 마주치는 수수께끼는 죽은 자의 과거가 아닌 '살아남은 자'간의 증언이며
그것은 그녀에게 애초의 물음, "요한나는 누군인가"에서 "그들은 누군인가"로
전환하게 하여 답이 없는 수수께끼로 차츰 인도한다.

"그시절 그사람", 3류 배우로 전락하여 (한때는 '인형의 집'의 노라역을 맡기도 했으나)
할머니역이나 하는 플로랑스가 우연히 고등학교시절의 친구라 자처하는
티에리와 마주쳐 '그시절'을 함께 회고하나 서로가 기억하는 '그시절'은
자꾸만 어긋나며 같이 추억하기엔 지금의 '그사람'은 너무나 비루하다.
티에리는 '그시절'의 욕정을 지금의 플로랑스를 안음으로써 해소하고자 하나
세월의 풍상은 시든 육체에 서리의 더께를 쌓아올렸고 '그시절 그사람'은
그들의 기억 속에서 서로 다르게 존재한다.

"카리아티드", 자크는 신경쇠약에 걸린 모니크를 요양원에 데려가주고
그들의 삶이 어서 빨리 정상으로 돌아오기를 갈망하며 "안나 카레리나"를 읽는다.
모니크는 요양원에 면회온 자크로부터 그간 읽은 "안나카레니나"를 전해 들으며
자신의 삶을 소설에 포개놓는다.
모니카는 자크와 그녀의 보금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가?
자크는 요양원으로 가는 길바닥에서 자신들의 희망을 소모해버린 사람들을
알고 있으나 그는 그렇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모니크는 '기껏 신경쇠약'이며
그녀는 틀림없이 완치될 것이라고 알고 있다.

"모니크가 다시 돌아오면 그것은 아주 영영 돌아오는 것이리라."

이 어두운 희망 앞에서 나는 처연해진다.

 

p.s. 혹자는 다음과 같은 구절 앞에서 밑줄 긋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게다.

"나의 삶, 이라고 말해보라. 그리고 눈물을 억제하라."

"바틀비, 가끔 나는 너의 우울한 이름을 되풀이하며 부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난다."

책 뒷 표지에 있는 이 구절들을 나는 소설 속에서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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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처럼 2006-06-2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모호한 문장이 많아서 <파르티타>는 읽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놓친 부분이 많았겠죠. 이건 좋았다니 담에 또 빌려볼게요.^^
 
논쟁과 상처 - 우리 시대 문학의 주요 논쟁에 대한 탐사!
권성우 지음 / 숙명여자대학교출판부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권성우가 훗날 그의 스승인 김윤식처럼 비평의 한 일가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또는 김현처럼 오래도록 견인력 높은 비평의 자장을 발산할 수 있을 것인가.

그건 알 수 없다(아마도 불가능하겠지. 문학적 감응력을 차치하더라도

꼬붕을 거느리거나 에꼴을 형성하기에  그가 도정한 비평적 지위는 '독고다이'였다).

그렇지만 현장의 비평가로서 김윤식이나 김현이 그래왔던 것처럼

권성우의 오늘의 비평은 그 누구보다 뜨겁다.

그리고 그의 미덕은 그 열기를 채 꺼뜨리지 않고 꽤나 오래 지켜왔다는 것이다.

계간지 <Review>에서 (그러니까 94년 겨울이었고 서태지가 표지였다.

그 이전에 <상상>이 창간하였고 <오늘예감>도 계간지화하고 있었다.

<시네21>과 <키노>가 등장하가 직전이었다) '전복적 상상력' '부정적 상상력'이라는

키워드로 문학판에 대해 날카로운 입장을 표명하는 글을 처음 읽고

이후 권성우의 글을 좇아 읽어온 편이다.

발표되는 그의 비평집을 대개 읽어왔고 그가 참여한 <포에티카>도 사보았고

문학권력 논쟁에 참여했던 <인물과사상>, <사회비평>, <황해문화> 등도

놓치지 않고 읽어온 듯하다.

그의 문장이 그가 겨누고, 겨뤄온 대상들에 비하여 현란하거나 화사하지 않다.

그러니까 그의 문장에는 화장기도, 인공의 향도 없다

외국 이론가라는 뽀사시한 덧칠, 또한 부족하다.

그래서(그럼에도?) 그의 비평은 에두르는 바 없이 말하고자 하는 그곳에 위치한다.

꽤 자극적일 수 있는 <논쟁과 상처>라는 제목의 이 책에서도 그렇다.

99년부터 2002년 사이 벌어졌던 '문학권력'에 대한 '논쟁'의 한복판에 서서

발표했던 글을 모은 이 비평집에서 그는 '상처'를 말한다.

서문에서 "나는 글을 쓰는 한, 영원히 그 시절을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시에는 힘들었으되,

지금은 내 인생의 그 시기를 기꺼이 사랑하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말을 하지만

그 상처는 결코 영광의 상처가 될 수 없다.

이 책에 실린 그의 뜨거운 비평들을 읽어보라.

그리고 문학동네의 남진우를 위시한 그 편집위원들의 비열함,

조선일보를 위시한 거대 언론이 가공한 한국 문학판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에 대한

권성우의 뜨거운 언어는 식은 나의 분노에 군불을 땐다.

그러나 오늘을, 여전히 광화문 한복판에 우뚝선 조선일보를,

문학판에 도도하게 서 있는 그 일당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절망스럽다.

그 상처는 그렇게 헤벌어진 채 여전히 아리다.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다시 권성우의 이 <논쟁과 상처>는 소중하다.

그래서 이 책이 숙대출판부에서라도 나오게 됨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이 많이 읽히기를 희망한다. 여전히 이 절망스러운 이 한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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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달콤하게 보다가 의외로 눈보라가 오래 갈지도 모르겠는데.”

에이이치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달콤하게? 눈보라가 맛이 있습니까?”

나는 느낀 그대로 질문했다.

-이사카 코타로의 <사신 치바>, '산장 살인 사건' 중




위 인용문 중 '나'는 바로 사신(死神) 치바. 인간의 외모로 변신할 수 있으나

인간의 어법,  특히나 비유에는 약하다.

그래서 앞 사람의 말을 듣고  "눈보라가 달콤하냐"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런데 첫번째 대사에서 "달콤하다"라는 말은 아마도 일본어 "甘い"를

번역했을 것인데 여기에서 "甘い"의 용법은 "달콤하다"가 아닌

"안이하다, 어수룩하다"(뉴에이스 일한사전 "甘い" 중 6번 용례)일 것이다.

자주 쓰는 표현이니 번역자가 실수한 것은 아니고 첫번째 대사에 이어지는

사신의 말 때문에 굳이 "달콤하다"라고 쓴 것이리라.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건 한국어 사전의 용례에서 "달다"나 "달콤하다"가

"안이하다, 어수룩하다"라고 쓰이는 경우가 없다라는 것

(내가 과문하여 그런 말쓰임새가 있는데 모르고 있는 거라면...

그래도 넘어가자).

이 문제의 "달콤하다"를 적절하게 해결할 만한 마땅한 대체어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 위 인용문을 다르게 표현할 경우의 수는 무엇일까.

두 가지 경우의 수가 떠오른다.

하나는 괄호나 각주를 통해 "甘い" 용법과 사신 치바의 오해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

그러나 소설에서 이런 게 달리면 지저분해지기 일쑤이고 다소 구차하다.

그럼에도 정확하게 의미 전달을 할 수는 있다.

또 하나는 문장을 한국식으로 바꾸는 것. 예컨대 다음처럼.


"하지만 그렇게 안이하게 보다가 의외로 오래 가서 눈보라에 쓴맛을 볼지도 모르겠는데.”

에이이치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쓴 맛? 눈보라에 쓴 맛이 있습니까?”


이렇게 되면 문장의 전체적인 뜻은 통하게 되는데 역시 원문을 훼손하게 되어

고쳐놓고 왠지 뒷맛이 찝찝하다.

개인적으로는 설명을 다는 쪽을 택하겠지만.

역시 이것도 취향의 문제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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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igha 2006-06-23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게 괴로움이고 묘미고 그렇죠!(일단은 무책임할 수 있으니까요;) 사실 '쓴맛'에 꽤 경탄했어요@_@ 느낌도 살리고, 부자연스러움도 없는 좋은 선택이지 않을까요?

한솔로 2006-06-24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야 군소리 많은 편집자고, 아니 그 이전에 시비거는 독자니까 이런 소리하지요. 일감으로 번역한다면 그냥 대체로 눈감고 넘어갈거에요^^
 

16일

H화백과 L취재팀장과 함께 도쿄 출장.

표면적인 목적은 자료 조사인데, 실제 H화백의 목적은 음식기행(그중 특히 생선)인듯.

출장 내내 생선만 찾다.

점심에 생맥주 2조끼.

저녁에는 H화백과 10여 년 친하게 지낸 일본 친구가

저녁에 이케부쿠로에 있는 전통일본주를 파는 가게로 데려가다.

전통화로에서 생선을 통째로 꼬챙이에 꽂아 구워줘서 넙치, 연어, 은어 등등의 생선을 먹다.

술은 꽤나 고급이라고 하는 일본 전통주.

5시부터 마시기 시작하여 끝나니 7시 반.

더 술마시자던 H화백은 침대에 누워 뻗고 나와 L팀장은 맥주 두 캔씩 더 마시고 취침.

 

17일

어제의 그 친구분이 이번에는 신주쿠의 이자카야로.

오징어소면과 사시미 세트, 이면수 구이, 고로케, 샐러드 등에 맥주와 일본주.

근처의 50년 됐다는 재즈 틀어주는 바에서 위스키.

호텔에 들어와 맥주 조금 더 마시다가 취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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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dai2000 2006-06-19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화백이라 하시니...다음 권은 일본 편인가 봅니다...명작이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한솔로 2006-06-19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 만화가 아니어요. 그 분은 맞는데 다른 거 조사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