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거울
로제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6월
평점 :
품절


한 권에 책이 이끌리는 길은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며 그 경우의 수도 무수할 테지만
장 그르니예의 <섬>을 소개하는 까뮈의 글만큼 아찔한 유혹을 선사하기란 쉽지 않을 듯.

"알제에서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라고 시작되는 그 글.

프랑스에서 지붕 밑 방을 의미하는 '그르니예grenier'라는 이름과 접하기 위해서는
까뮈를 통과해야 한다. 앞서의 장 그르니예는 까뮈의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의 스승이며
<물거울>의 작가 로제 그르니예는 까뮈가 주도한 <콩바>지와 <프랑스 수아>에서
기자생활을 하였으며 까뮈의 죽음을 보도하기도 하였다
(로제 그르니예가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며 까뮈를 초대하자
평소 결혼에대해 회의적이던 까뮈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거 잘됐군. 어차피 어리석은 짓을 할 바엔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게 낫지, 그럼.")

로제 그르니예는 <시네로망>이라는 소설의 머리에 스콧 피츠제럴드를 인용한다.

"물론 어떤 삶이든 삶이란 붕괴의 한 과정에 불과하다."

<물거울>의 역자 김화영(한국에서 프랑스문학과 접하기 위해선 이 이름을 통과해야 한다)에 따르면
로제 그르니예의 "전작품을 관류하고 있는 어떤 톤을 암시"하며
"그의 작품은 무엇보다 삶의 덧없음에 대한 애틋한 인식과 그 덧없음 때문에
오히려 더욱 귀중한 삶, 그 "붕괴의 과정"에 대한 수줍은 증언과 향수,
그리고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고 한다.

그의 몇 개의 단편집에서 선별한 이번 책, <물거울에서>에서
"존재하는가"는 비행기사고로 사망한 여배우 요한나의 전기를 쓰기 위해
관련인물을 찾아나선 고스트 라이터(ghost writer) 나딘의 추적과정을
추리소설의 외피로 묘사한다. 본의아니게 탐정노릇을 하게된 나딘은
체코와 프랑스, 미국을 경유하며 요한나의 이면의 삶을 재구성하려하나
정작 그녀가 마주치는 수수께끼는 죽은 자의 과거가 아닌 '살아남은 자'간의 증언이며
그것은 그녀에게 애초의 물음, "요한나는 누군인가"에서 "그들은 누군인가"로
전환하게 하여 답이 없는 수수께끼로 차츰 인도한다.

"그시절 그사람", 3류 배우로 전락하여 (한때는 '인형의 집'의 노라역을 맡기도 했으나)
할머니역이나 하는 플로랑스가 우연히 고등학교시절의 친구라 자처하는
티에리와 마주쳐 '그시절'을 함께 회고하나 서로가 기억하는 '그시절'은
자꾸만 어긋나며 같이 추억하기엔 지금의 '그사람'은 너무나 비루하다.
티에리는 '그시절'의 욕정을 지금의 플로랑스를 안음으로써 해소하고자 하나
세월의 풍상은 시든 육체에 서리의 더께를 쌓아올렸고 '그시절 그사람'은
그들의 기억 속에서 서로 다르게 존재한다.

"카리아티드", 자크는 신경쇠약에 걸린 모니크를 요양원에 데려가주고
그들의 삶이 어서 빨리 정상으로 돌아오기를 갈망하며 "안나 카레리나"를 읽는다.
모니크는 요양원에 면회온 자크로부터 그간 읽은 "안나카레니나"를 전해 들으며
자신의 삶을 소설에 포개놓는다.
모니카는 자크와 그녀의 보금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가?
자크는 요양원으로 가는 길바닥에서 자신들의 희망을 소모해버린 사람들을
알고 있으나 그는 그렇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모니크는 '기껏 신경쇠약'이며
그녀는 틀림없이 완치될 것이라고 알고 있다.

"모니크가 다시 돌아오면 그것은 아주 영영 돌아오는 것이리라."

이 어두운 희망 앞에서 나는 처연해진다.

 

p.s. 혹자는 다음과 같은 구절 앞에서 밑줄 긋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게다.

"나의 삶, 이라고 말해보라. 그리고 눈물을 억제하라."

"바틀비, 가끔 나는 너의 우울한 이름을 되풀이하며 부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난다."

책 뒷 표지에 있는 이 구절들을 나는 소설 속에서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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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처럼 2006-06-2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모호한 문장이 많아서 <파르티타>는 읽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놓친 부분이 많았겠죠. 이건 좋았다니 담에 또 빌려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