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달려오던 전개가 이번 5권에선 다소 주춤한 느낌. 가슴을 적시는 자기희생담(....)의 심심한 결말과 어느 양순한 소녀의 짤막한 에피소드. 그리고 역시나 하나 끼워넣는 지어스 세계의 비밀 한토막. 이어지는 모던한 외톨이의 일상과 파국의 전개부분이 잠시동안의 평온을 제치고 암울함을 기약하고 있다.

 

할말을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환장할 정도로 늘어지는 전개의 이유는 뭘까? 역시나 원작의 장황한 중언부언은 그렇다 치더라도 큰 전개도 없는 격투씬을 2회씩에나 걸쳐 그리는 연출의 지지부진함 때문이 아닐런지.

 

 

업계에 속해있었던 모님께서 보면서 꽤나 비웃었다던 만화-_- 전개의 인과성이나 감정을 다루는 호흡이 영 서투르고 급작스러우며 은근하게 먼치킨삘을 담보하고 있음. 에로계 출신 작가들의 메이저 입성은 분명 환영할만 하나 그 완성도가 영 성에 차지 않을 때 항상 드는 생각이 있다. '에로만화나 계속 그려주셨으면....'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웹툰의 감수성이란 것은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물건. 물론 이 책은 출판이나 상업목적이 아닌 순수하게 개인 작업의 일환에서 시작되어 이렇게 책으로까지 나온 결과물이기에 사소설적 성향이라도 불러도 좋을 그런 감수성의 수치가 현저하게 높을 수밖에 없음을 미리 견지해두고 있어야 할 듯. 제목의 처절함에 비해서 그리 지독하진 않다.

 

가장 처음에 실린 박해천의 '우리 파시스트, 테크놀로지의 강철폭풍'은 파시즘에의 매혹의 한 철을 어느 수다쟁이 파시스트의 입장에서 매력적으로 떠들어보인다. 파시즘의 민중적 속성과 대안적 가능성을 열변하는 그 현학적 흐름은 열정적인 통찰을 견지함과 동시에 자신들이 가졌던 한계점에 대한 냉정한 결론을 도출해낸다. 끝에 가면서 지나치게 점잖아지는 그 가상의 파시스트가 좀 더 앞뒤 가릴 줄 몰랐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은 꽤 즐거운 상상이다.

'오이디푸스 느와르-'에서의 [올드보이] 분석은 진부하고 과잉적이었다. 그것이 [친절한 금자씨]의 개봉 직전이었다 하더라도.

 

리얼 조폭스토리를 빙자하고 있지만 자신의 주변에 널린 페이소스들을 '해석하지 못하고' 결국 파국으로 달려가는 병두의 역할에 비추어 지옥에 남게된 민호를 키로 삼아 풀어낸, 결과적으로는 창작자가 겪어야 할 악몽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노골적으로 곽감독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은 거 같아서 유하 감독(이젠, 그리고 예전에도 그랬지만 암튼지간에 감독 딱지가 더 어울린다)이 배째라는 심정으로 만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음.

마놀라 다지스가 [킹덤 오브 헤븐]의 평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겨올 수가 있겠는데 '감정의 극한과 내러티브를 전달하기에 충분할정도로 파워풀한 배우들을 필요로 하는데, 이 영화의 배우들은 그 정도를 감당하지 못했다.' 이보영의 비중이 무지 작아서 열라 슬펐음.

 

요즘 듣는 음악은 생활의 사운드트랙 같다. 있는 듯 없는 듯 울려퍼지는 탄력적인 에코. 느릿하게 무언가 벌어질 듯한 천공속 느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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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시절 이야기다. 팀 버튼과 그의 아이콘이 온전하게 매혹 그 자체로 불릴 수 있었던 때가. 그는 마치 내가 만들어내고 싶어하는 것을 완벽하게 드러내보여주는 세계와의 통로 같았다. 나는 귀신이 된 광인이 튀어나왔던 슬랩스틱코미디 [비틀주스]에 열광했고 더없이 우울한 기운으로 가득했던 두 개의 [배트맨]의 태생적인 마초성과 우울함에 중독됐으며 그가 그려낸 에드워드 우드 주니어가 겪어야 했던 어느 짤막한 시간의 연대기에서 실패한 삶에 드리워지는 우울이 어떻게 관조적 페이소스와 만나 미래의 영광으로 드러나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앞서 [가위손]에서 절절하게 확인할 수 있었듯이, 그는 우울한 동화와 풍자극의 일인자였다. 그것을 잊지 않았다면 모두가, 심지어 [가위손]과 [배트맨]에 눈이 익어버린 그의 지지자들마저도 [화성침공]을 낯설어하고 있을 때, 60년대식 [비틀주스]의 재림에 기뻐하는 것이야말로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그런 그가 순수하게 불온한 동화의 세계를 열어제끼기 위해 선택한 것이 너무도 팀 버튼 다운 설정으로, 또 너무도 팀 버튼 답게 아날로그적인(그래서 언제나처럼 돈이 많이 드는) 결과물로 드러난 것이 [크리스마스 전야의 악몽]이었다.

 

[크리스마스 전야의 악몽]은 성공적인 작품들이 가지는 공통된 조건들 중 하나이자 팀 버튼이란 인물의 본능적인 경지라고 불러도 좋을 이미지와 플랫폼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 독자적인 시너지를 자아낸다. 팀 버튼이 가지는 특유의 음울한 세계에서 수혈 받은 망가진 인형을 모티프로 삼아 그의 디자이너적 재능의 집적체로 창조된 감성적 열외자들을 대변하는 더없이 매력적인 캐릭터들은 그가 관여했던 어떤 작품들에서보다 영화 자체를 완전하게 관장하며 크리스마스를 악몽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다수의, 혹은 소수의 모든 어린이들 또는 어른들의 불온한 감수성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타고 완성됐다.

 


2004년 10월에 발매된 PS2용 [크리스마스 전야의 악몽 : 부기의 역습]. 애니메이션에서 1년이 흐른 뒤의 시점이 배경으로 잠시 여행을 떠났던 잭이 그가 없는 사이에 마을을 가로챈 우기부기와 맞서 싸우게 된다는 내용. 아트디렉터였던 딘 테일러의 참여 하에 액션게임의 명가 캡콤이 제작하여 상당한 호평을 받았었다.
 

 

실상 영화가 보여주는 플롯의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 전야의 악몽]이 만들어진지 벌써 13년이 되어 오는데도 수많은 파생물들(PS2, GBA용 게임, 보드게임, 피규어, 팬시 등등. 일본에선 무려 1년 하고도 2개월 전에 발매된 통상판 DVD가 여전히 주간 애니메이션DVD 판매량 20위권 안에 들어있다!)을 통해 아직도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팀 버튼이 고안해낸 세계의 매력과 그 모든 것이 조합되어 형성해낸 막강한 아우라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새침한 우울증의 매력에 눈뜬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또는 어떤 이에겐 처음으로 자신의 틀에 꼭 맞는 봉제인형 수퍼스타를 만난 것이다. 당연히 이후의 크리에이터들에게 끼친 이미지적 영향력은 지대했다. 그들이 잭과 샐리의 응용판을 내밀면 내밀수록 팀 버튼이 원전에서 보여줬던 디자인적 탁월함은 확고한 클래식이 되어가고 있었다.

 

 


새 포스터.... 근데 영 황스럽다.... 우리나라에선 12월 초에 개봉 예정.

그런 [크리스마스 전야의 악몽]이 디즈니의 울궈먹기 전략에 의해서 기쁘게도 이번에 다시 찾아온다. 3D라는 타이틀이 붙은 새 버전 [크리스마스 전야의 악몽]은, 아무래도 색감이나 소소한 묘사의 부분에서 원작에 덧씌워진 기술력의 힘으로 업그레이드된 듯.... 이미 [화성침공] 이후 디지털과의 동거를 허락한 팀 버튼이 이번 버전에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예고편만 봐선 변화된 부분이 잘 포착되지 않는달까.

http://adisney.go.com/disneypictures/nightmare/index.html

 

그러나 이번 개봉과 함께 무엇보다도 즐거운 것은 구하기 힘들었던 사운드트랙도 재발매됐다는 것. 그것도 2for1!

안녕하세요. 오늘 밤 어때?

 

헐리웃에서 가장 사랑하는 음악가인 동시에 팀 버튼 만큼이나 독자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대니 앨프먼의 존재감을 작곡 및 주인공 잭의 목소리 연기에 더하는 노래 솜씨의 출중함으로 인해 더없이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운드트랙은, 어쩌면 대니 앨프먼의 음악색깔에도 가장 잘 맞았던 영화 자체의 면모와도 완벽하게 어울리거니와 뮤지컬 형식이라는 장르를 소화하는데 있어서 하늘이 이 가뜩이나 재능 있는 양반에게 또 한 번 불공평한 손길을 내주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이번 [크리스마스 전야의 악몽] OST의 우선적인 메리트라면 원 사운드트랙의 리마스터링이란 점은 차치하더라도 무엇보다도 일단 절판된 사운드트랙을 다시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수익성이 별로 안 좋았던 탓에 일찌감치 시장에서 사장되야 했던 이 비운의 사운드트랙의 재발매를 오매불망 기다렸던 '크리스마스 악몽' 매니아들의 손을 떨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추가된 CD 한 장에는 본사운드트랙에 실린 곡들을 소스로 한 뮤지션들의 어레인지들과 원곡의 데모들이 실려있는데, 참가한 뮤지션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너무나 딱 맞는 캐스팅의) 마릴린 맨슨의 'this is halloween'과 피오나 애플의 'sally's song'. 특히나 피오나 애플의 노래는 더도 말고 그녀가 불렀던 비틀즈의 'across the universe' 어레인지, 그 수줍은 듯 거침없는 몽환적 중독성의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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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노량진 홍초불닭에서 술 마시다가 보니 티비에서 웬 조정린이 나오고 고속도로도 나오고 여자들 다섯도 주루룩 나와서는 한번씩 장기자랑 선보이듯 뽀샤시 화면 속에서 몸을 흔들어대길래 이건 또 뭔.... 싶어서 한 번 봐봤습니다. 중간중간 끊기면서 보다가 저기 홈페이지 시청자의견란에 올라온 표현에 따르면 '파키스탄 거지 같은 꼴'을 한 '킹카'가 자기는 여자를 볼 때 신발부터 본다는 페티시적인 발언을 하자 제작진이 여자들 신발들을 가져와주니 그것들을 그윽하게 살펴보는 씬부터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오우, 우리나라에도 이제 이런 게 나오는구나, 싶더군요.

 

일단 킹카라는 양반 자체가 그 호칭에 전혀 안 어울리는 외모를 보유한 주제에 20년 경력(추정)의 신발 페티시 다운 심미안을 과시하며 신발의 모양만 보고선 강남인지 강북인지에 사는지를 파악하는 장면에서부터 좀 깼는데.

암튼 이 양반 하는 짓이 아주 대놓고 싸가지인 것이라 키 작아서 맘에 안 들다고 20초만에 차버리질 않나 남녀의 속성은 섹스라느니 하는 징기스칸 시절 몽골전사 같은 발언을 하며 여자에게 자빠링을 시도하는 등 아주 이상적인 꼴통의 면모를 정말 '상상하는 그대로' 펼쳐 보여줍니다.

 

이거 사람들 좀 끓게 만들겠는데? 라고 생각을 했더만 말그대로 들들 끓여놨더군요. 시청자 게시판, 웹뉴스, 네이버 검색순위 등등.

김현진, <아찔한 소개팅>을 보며 경악하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얼마 전에 시끄러웠던 [재용이의 순결한 19]와 궤를 같이 하는 이 노골쇼의 원본은 [제리 스프링거 쇼]겠죠. 순수하게 가장 자극적인 미취를 낼 수 있는 것만이 가치가 있는 세상. 옳고 그른 것의 여부가 아닌 그 자체가 얼마나 화제가 되느냐에 따라서 점점 비대해지는 기표의 세계는 현실의 복제를 적극적으로 주장함으로써 자신을 완성시키고 사람들을 가치판단의 논란 속으로 몰아넣음으로써 논란 그 자체에 종속되게 만듭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그 이후입니다. 결국 스너프 필름은 범죄의 그늘 속에서 기어나와 리얼리티쇼의 극한이 추구하는 영광의 제대 위로 올라가게 될 것인가? 뭐 그렇게 된다면 방송 미디어라는 수단에 힘입어 가지게 될 전인류적 체험의 동시성에 근거하여, 가히 말세라고 당당하게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만.

 

아, 그리고 이거 다 짜고 치는 고스돕이랍니다. 그러니 너무 오랫동안 경악하거나 괜히 열 올려서 방송위원회에 고발을 한다든지 하는 시민사회의 주인스러운 시간낭비는 마시길. 그들이 바라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시간을 빼앗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니 채널을 돌려버릴 텔레비전의 합법적 소유주다운 의지나 솟아나는 스트레스를 즐길 마음이 없다면, 그 미취조차도 통째로 잡아 먹어버릴 수 있는 대범함이 필요한 법입니다. 아직은, 스너프는 불법이니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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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관련 서적을 알라딘에서 검색하면 [검은사기] 8권을 포함해서 1949권이 튀어나온다. 해서, '부동산'과 '10억'이라는 현재 대한민국 자본주의(현상만으론 자본주의, 내용적으론 이중구조의 착취행위에 가까운) 키워드의 두 정점이 결합된 책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이런 물건이 기획성 좋게도 이미 2003년에 떡 하니 나와있었다. 

 

 

 

 

 

 

 

 

 

좌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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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2006-11-11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동산은 커녕 동산도 제대로 없는 저같은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이 땅에 살겠어요? -_-
에휴, 그나저나 부동산 정책..이거 난리도 아니더군요. 한숨만 푹푹.

마법천자문 2006-11-11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혁명의 시기가 무르익고 있습니다.

수퍼겜보이 2006-11-12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끄응...

hallonin 2006-11-12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차기를 하고픈 나날입니다.
 
중세철학입문
에띠엔느 질송 지음 / 서광사 / 1989년 11월
평점 :
품절


대학서적으로 태어났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워드 프로그램에 기본적으로 내장된 디자인 외엔 어떠한 디자인적 기교도 부리지 않은 세 가지 서체가 흑백의 두가지 글씨색만으로 책제목과 저자와 역자의 이름, 그리고 출판사를 파란색 바탕 위에 무뚝뚝하게 그려놓은 표지를 가진 책이라면 그 책 제목이 '입문'이라고 하는, 지극히 건설적인 미래의 학생들을 위한 것처럼 유혹하는 이름을 달고 있다 해도 경계해야 마땅할 터이다. 우연이 아니게도 [중세철학입문]이 바로 그런 모든 외재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 책이다.

 

 

대개 입문이라고 불리는 서적은 그 두께가 사전만 하지 않은 다음에야 [중세철학입문]처럼 포켓북이 연상될 정도의 두께를 자랑한다면 그 안의 내용은 장난이 아닌 압축률을 자랑한다고 예상해봐야 마땅할 터이다. 1983년에 펴낸 판본을 2004년에도 그대로 쓰고 있는 이 책은 분명 에띠엔느 질송의 원저로서나 번역된 모양으로서나 중세철학을 생판 처음 접하는 초보자용이라고만 보기엔 무리가 있다. 질송이 쓴 원저의 제목이 [중세의 이성과 계시]인 만큼 [중세철학입문]이라는 만만한 제목을 보고 달려든 독자를 좌절케 만들 가능성이 농후한 이 저작의 본체는 중세철학시대를 신앙의 우위, 이성의 우위, 이성과 계시의 조화라는 세부분으로 시원간결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나누고 있다는 점에서도 짐작가능한 것처럼 안에서 보여주는 정보의 압축률이 예상대로 상당한 편이라, 되려 중세철학을 어느 정도 공부한 이에게 자신의 지식의 척도를 검증해보는 수단으로서 보다 적합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여전히 '입문'이라는 이름을 달 수 있는 이유라면, 소개되는 각 개념마다 빠지지 않고 친절하게 달려있는 장문의 주석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염두해둬야 할 사실은 책의 반절 가까이를 차지하는 부록의 양이나 본문에 실린 자잘하면서도 방만한 양의 역주를 보아 알겠지만, 실상 이 책은 에띠엔느 질송의 원저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질송의 원저에 더해 역자인 강영계가 그와 비슷한 정도의 작가적 책임을 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꼼꼼한 역주들에도 불구하고 1983년도 책이라는 시대를 증명하듯 주석이 따로 떼어져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매번 설명해야 할 개념이나 인물이 나올 때마다 그 뒤를 이어서 개념에 대한 해설이 줄줄 이어지기 때문에 흐름이 자주 끊겨 읽기에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그 시절의 독법이 어땠는지 몰라도 21세기에 이르러 이런 산만한 구성은 가독성을 현저하게 떨어뜨리기 마련이다. 물론 대학서적의 독서라는 것이 눈안에 모래알을 굴리는 것과 비슷한 감각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믿는 이들에겐 마조히즘적 축복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니 이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중세철학입문]을 기어코 읽어내야겠다는 의지로 충만한 이에겐 다음과 같은 독법을 추천해드린다. 우선 부록에 실린 '1. 에띠엔느 질송의 생애'는 심심풀이로 읽어주시고 '2. 중세철학 개관'을 눈에 힘을 줘서 읽는다. 그런 다음 에띠엔느 질송의 본문으로 뛰어들어서, 중세철학의 초보독자라면 각 페이지에 가득 실려있는 개념과 인물들에 대한 역주들만을 한 번 쭈욱 읽어본 다음 본문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어느 정도 중세철학을 공부한 이라면 반대로 주석들을 썩 신경쓰지 않으면서 에띠엔느 질송이 만든 본체를 즐기는 편이 이 복잡다단한 구성의 글덩어리를 더 쉬이 이해하는 방법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3부 이성과 계시의 조화'까지 해결이 됐다면, 마지막으로 부록에 있는 '3.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사상'에 도전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으면 될 것이다. 저자로서의 강영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사상에 대한 설명은 에띠엔느 질송, 더 나아가 중세철학의 구분법에 대한 메타테제로서 기능하고 있다.

의도했을 것 같진 않지만, 이 복잡한 구성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밟고 온 자리들을 부릅뜨고 돌아봐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이 책은 얇지만 작고 단단한 미궁이다. 이것을 온전히 상찬이라고만 할 수 있을진 모를 일이지만 어떤가. 나는 충분히 즐겼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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