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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입문
에띠엔느 질송 지음 / 서광사 / 1989년 11월
평점 :
품절
대학서적으로 태어났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워드 프로그램에 기본적으로 내장된 디자인 외엔 어떠한 디자인적 기교도 부리지 않은 세 가지 서체가 흑백의 두가지 글씨색만으로 책제목과 저자와 역자의 이름, 그리고 출판사를 파란색 바탕 위에 무뚝뚝하게 그려놓은 표지를 가진 책이라면 그 책 제목이 '입문'이라고 하는, 지극히 건설적인 미래의 학생들을 위한 것처럼 유혹하는 이름을 달고 있다 해도 경계해야 마땅할 터이다. 우연이 아니게도 [중세철학입문]이 바로 그런 모든 외재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 책이다.
대개 입문이라고 불리는 서적은 그 두께가 사전만 하지 않은 다음에야 [중세철학입문]처럼 포켓북이 연상될 정도의 두께를 자랑한다면 그 안의 내용은 장난이 아닌 압축률을 자랑한다고 예상해봐야 마땅할 터이다. 1983년에 펴낸 판본을 2004년에도 그대로 쓰고 있는 이 책은 분명 에띠엔느 질송의 원저로서나 번역된 모양으로서나 중세철학을 생판 처음 접하는 초보자용이라고만 보기엔 무리가 있다. 질송이 쓴 원저의 제목이 [중세의 이성과 계시]인 만큼 [중세철학입문]이라는 만만한 제목을 보고 달려든 독자를 좌절케 만들 가능성이 농후한 이 저작의 본체는 중세철학시대를 신앙의 우위, 이성의 우위, 이성과 계시의 조화라는 세부분으로 시원간결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나누고 있다는 점에서도 짐작가능한 것처럼 안에서 보여주는 정보의 압축률이 예상대로 상당한 편이라, 되려 중세철학을 어느 정도 공부한 이에게 자신의 지식의 척도를 검증해보는 수단으로서 보다 적합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여전히 '입문'이라는 이름을 달 수 있는 이유라면, 소개되는 각 개념마다 빠지지 않고 친절하게 달려있는 장문의 주석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염두해둬야 할 사실은 책의 반절 가까이를 차지하는 부록의 양이나 본문에 실린 자잘하면서도 방만한 양의 역주를 보아 알겠지만, 실상 이 책은 에띠엔느 질송의 원저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질송의 원저에 더해 역자인 강영계가 그와 비슷한 정도의 작가적 책임을 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꼼꼼한 역주들에도 불구하고 1983년도 책이라는 시대를 증명하듯 주석이 따로 떼어져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매번 설명해야 할 개념이나 인물이 나올 때마다 그 뒤를 이어서 개념에 대한 해설이 줄줄 이어지기 때문에 흐름이 자주 끊겨 읽기에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그 시절의 독법이 어땠는지 몰라도 21세기에 이르러 이런 산만한 구성은 가독성을 현저하게 떨어뜨리기 마련이다. 물론 대학서적의 독서라는 것이 눈안에 모래알을 굴리는 것과 비슷한 감각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믿는 이들에겐 마조히즘적 축복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니 이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중세철학입문]을 기어코 읽어내야겠다는 의지로 충만한 이에겐 다음과 같은 독법을 추천해드린다. 우선 부록에 실린 '1. 에띠엔느 질송의 생애'는 심심풀이로 읽어주시고 '2. 중세철학 개관'을 눈에 힘을 줘서 읽는다. 그런 다음 에띠엔느 질송의 본문으로 뛰어들어서, 중세철학의 초보독자라면 각 페이지에 가득 실려있는 개념과 인물들에 대한 역주들만을 한 번 쭈욱 읽어본 다음 본문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어느 정도 중세철학을 공부한 이라면 반대로 주석들을 썩 신경쓰지 않으면서 에띠엔느 질송이 만든 본체를 즐기는 편이 이 복잡다단한 구성의 글덩어리를 더 쉬이 이해하는 방법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3부 이성과 계시의 조화'까지 해결이 됐다면, 마지막으로 부록에 있는 '3.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사상'에 도전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으면 될 것이다. 저자로서의 강영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사상에 대한 설명은 에띠엔느 질송, 더 나아가 중세철학의 구분법에 대한 메타테제로서 기능하고 있다.
의도했을 것 같진 않지만, 이 복잡한 구성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밟고 온 자리들을 부릅뜨고 돌아봐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이 책은 얇지만 작고 단단한 미궁이다. 이것을 온전히 상찬이라고만 할 수 있을진 모를 일이지만 어떤가. 나는 충분히 즐겼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