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머릿 속에 계속 남는 영화들이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프레스티지]다. 일단은 재밌다. 두시간이 넘어가는 상영시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프레스티지]는 반전영화가 아니다. 아니 정확히는 반전을 착각하고픈 이들에게 바치는 재치있는 조롱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한 수많은 샤말라니스트(반전주의자)들의 아우성은 사뿐히 무시할만 하다. 사실 반전이란 요소 자체가 미끼로 쓰인 영화기 때문에, 언제고저제고 반전 터질 때만을 기다리느니 진중하게 이 영화의 유쾌한 장난과 영화 곳곳에서 보여주는 세세한 사려깊음에 즐거워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전작인 [메멘토]는 시간유희를 빼버리면 전형적인 필름느와르였고 [인썸니아]는 말그대로 정극스릴러였다. [프레스티지]는 흡사 그 두 작품을 합쳐놓은 듯한 느낌이다. 교차되는 화자를 통해 제시되는 불완전한 기억과 그를 통한 속고속임은 [메멘토]를, 두 사람을 축으로 한 갈등과 끝에 다다르려 하는 브레이크 풀린 의지는 [인썸니아]가 떠오른다. 그를 바탕으로 반전의 재기발랄함 대신 인간의 욕망과 디지털 딜레마를 중후하게 파고들어간 [프레스티지]에서 내가 매혹된 부분은 두 부분이었다.

하나는 영화가 보여주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잔인한 풍경화다. [프레스티지]의 비밀은 이미 오프닝에서 나오는 노인의 설명, 보여주고, 숨기지만, 돌려보낸다 에서 끝나 있었다. 정말로 충격적인 것은 프레스티지가 실은 그리 대단치도 않은 트릭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매번 자신을 죽여야 했던 엔지어의 잔혹한 딜레마와 직면하는 순간이다. 그곳에 이르기까지 보든과 엔지어가 서로에게 보여주는 주고받는 증오의 정서는 [인썸니아]의 노곤함 직전에 영원히 머무르는 시간대 같다.

두번째는 이 영화가 아날로그 시대를 배경으로 디지털적 환상극을 창출해내고 있다는 점이다(그러나 테슬라의 전설적인 일화들을 생각해보자면 농담이 아닐 수도 있다). 원본과 복제의 딜레마라는, 거의 고전에 가깝게 된 문제 속에서 엔지어는 한계를 초월한다. 그 깨어진 한계란 거리의 한계이기도 했으며(그로 인해 극장이라는 가상공간은 엄청나게 확장되버린다) 인간적인 것의 한계이기도 했다. 누가 죽게 될지 모를 불안에서 계속 쇼를 진행해야 했던 엔지어의 마지막 말은 그 자신이 빠진 지옥도의 프로세스를 알려준다. 이미 돌아오지 않게 된 것에서, '프레스티지'의 법칙은 무시당한 것이었기에 이 게임의 패자는 정해져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룰을 깨버린 이에겐 관객의 비난이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보드리야르가 극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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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리야르는 '호기심' 그 자체였다" 
'통찰력의 새 지평을 연' 보드리야르 서거에 부쳐 
 
2007-03-08 오전 10:06:12     
 
 
  
 
10년 전 미국의 물리학자 앨런 소칼과 벨기에의 물리학자 장 브리크몽은 <지적 사기>라는 책을 통해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장 보드리야르, 쥘리야 크리스테바, 자크 라캉, 질 들뢰즈, 펠릭스 카타리 등이 집중적으로 도마에 올랐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통칭되는 프랑스 철학은 겉치레와 수사, 현학을 빼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 지적인 사기라는 독설을 퍼부었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상대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철학의 개념을 오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프랑스 철학자들은 "과학의 단선적 객관성을 잣대로 인문학을 바라보려는 과학주의자들의 시각이야말로 또 다른 권위주의"라고 반박했다. 이렇게 해서 촉발된 것이 이른바 '과학전쟁'이다. 당시 소칼과 브리크몽에게 엄청난 비판을 받았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지식인의 비굴함과 나태는 우리시대의 올림픽 종목이 돼버렸다"는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 현대 프랑스 철학을 풍미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대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지난 3월 6일 향년 7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자크 라캉(81년 사망), 질 들뢰즈(95년 사망), 자크 데리다(2004년 사망)에 이어 현대 프랑스 철학의 또 하나의 큰 별이 진 것이다. 프랑스 최고권위의 일간지 르 몽드와 지식인들이 즐겨보는 리베라시옹은 3월 7일자 1면 톱기사로 보드리야르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프랑스 사회에서 보드리야르의 비중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섹스, 언어, 기호, 상품, 전쟁 등 그 어떤 것도 이 사회학자의 역설적인 분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장 보드리야르는 호기심 그 자체였다." 리베라시옹은 보드리야르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학문적 업적을 기렸다.
 
1929년 7월 20일 랭스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독일어를 공부했고 브레히트나 맑스의 번역자이기도 했던 보드리야르는 1966년 파리 10대학 낭테르의 강단에 서면서 사회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여러 학위들을 고려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65년 사회학만이 유일하게 개방적인 학문이었다."사회학을 선택했던 이유를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의 박사논문이자 첫 번째 저작인 <사물의 체계(1968)>와 1970년에 출간한 <소비의 사회>는 그를 일약 대철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현대인의 일상을 소비라는 측면에서 해부한 보드리야르는 현대인들이 물건의 본연의 기능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상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위세와 권위, 즉 기호를 소비한다고 주장해 큰 반향을 얻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시뮐라크르와 시뮐라시옹>(1981)에서는 독창적인 분석을 통해 포스트모던 사회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실재가 아닌 파생실재로 전환되는 작업이 시뮐라시옹(Simulation)이고 모든 실재의 인위적 대체물이 '시뮐라크르(Simulacre)'인데, 그에 의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모사와 복제에 의한 가상실재, 즉 시뮐라크르의 미혹이라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복제의 시대라는 그의 독특한 분석과 이론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 허물기를 시도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흐름을 이끌었고 미디어와 예술분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일상생활의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1901-1981)의 제자로 초기에는 맑시즘을 신봉했으나 1973년 <생산의 거울>이라는 책을 통해 맑시즘과 결별하고 구조주의와 기호학에 관심을 쏟았으며 그 뒤 줄곧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회이론을 전개해 왔다. <상징적 교환과 죽음>(1976), <푸코 잊기>(1977), <침묵하는 다수의 그늘 아래서>(1978), <유혹에 대하여>(1979), <시뮐라크르와 시뮐라시옹>(1981), <차가운 기억들 1,2,3>(1987~95), <아메리카>(1986), <악의 투명성>(1990), <완전범죄>(1994), <이타성의 형태들>(1994) 등 50편에 이르는 저작을 남겼고 그의 책의 한국에서도 20여 권이 번역되었다.
 
그의 포스트모더니즘은 1991년 걸프전 당시에도 지성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걸프전이 한창일 때 그는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미사일이 정확히 투하돼 목표물이 파괴되는 장면은 실제 아주 무섭고 비참한 것이지만 안방에서 TV를 보는 사람들은 컴퓨터 게임 속 가상현실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토모던 현실 속에서는 일상과 가상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모사된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5년 한국을 방한했던 보드리야르는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복제실험은 자연현실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시뮐라시옹의 극단적 사례"라고 주장했고, "문화와 예술, 행동양식에서 기호를 통한 현실의 재현을 가리켰던 근대의 시뮐라시옹과 달리 현대의 시뮐라시옹은 급격한 변화와 전이, 도약을 통해 더 이상 재현이 아니라 가상현실로 넘어간다"고 설명하며 '극단적 현실 청산에 대한 두려운 전망'을 언급한 바 있다.
   
 
"소비는 일종의 신화이자 현대사회 스스로에 대한 표현이며 (…) 충만한 자기예언적인 담론이고 (…) 총체적인 해석체계이자 사회가 스스로를 극도로 향유하는 거울이며, 예견을 통해서 사회가 스스로 성찰하는 유토피아이다."
 
소비에 대한 탁월한 분석과 통찰력을 담은 <소비의 사회>는 그의 학문적 입지를 단숨에 다져놓았다. 이 책의 서문에서 리딩대학교 토크빌연구소 메이어 교수는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는 뒤르카임의 <사회분업론>, 베블렌의 <유한계급론>,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과 같은 책의 대열에 자리 잡고 있다"고 격찬했다. 모더니티에 대한 분석, 현대사회의 작동기제와 이면에 대한 독특한 해석은 우리시대 지성의 폭을 크게 넓혀놓았고, 무한한 통찰력의 새 지평을 열었다.
 
'참여하지 않는 지식인', '유토피아적 망상가'라는 그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장 보드리야르의 인문학적 상상력과 자유로운 통찰력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인류의 지적 자산을 풍성하게 하는 자양분이다.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이 하나둘씩 떠나간 빈 공간에 그가 우려한 바와 같이 지식인의 무기력과 나태함이 자리잡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 때문에 그가 떠난 빈 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최연구/기획위원·프랑스 마르느 라 발레 대학교 국제관계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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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소칼과 장 브리크몽이 5년만 더 참았으면, 저런 말은 못했을 듯 싶다. 단순히 [매트릭스]와 관련해서 가장 많이 언급된 철학자로서가 아니라 미디어와 기술에 대한 가장 예리한 통찰자로서 그는 일찌감치 현대인들의 일상과 가장 결부되는 화두의 제시자였으며 그렇기에 스스로가 자명한 현대인이었고 끊임없이 '포스트모던'(이 단어의 장난질 같은 속성은 잠시 제쳐두자)할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통 속에 든 뇌인 이상, 그가 세상에 내놓은 목소리는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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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새로 만들어진 데이터 30만년 쌓아온 정보의 10배
 
[전자신문 2007-03-07 09:32]    
 


 
인류 문서 기록이 시작된 30만년 전부터 그동안 만들어진 데이터의 10배에 이르는 규모가 2006년 한 해에 새로 만들어졌다. IDC는 자체 보고서에서 지난 한 해에만 ‘1610억기가바이트(Gb)’의 디지털 데이터가 생성됐다고 집계했다. 이는 ‘161엑사바이트(EB)’로 지난 30만년 동안 학자들이 추정하는 축적 데이터 규모가 ‘12EB’인 점을 감안할 때 단순 비교해도 10배를 훌쩍 넘는 수치다.

◇2010년 ‘제타바이트(ZE)시대’ 개막=디지털 데이터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IDC는 사진·동영상·e메일·웹페이지·단문 메시지 등 아날로그 데이터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디지털 데이터를 추산했을 때 대략 161EB가 새로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1테라바이트(TB:1000Gb)가 A4 용지에 기록해 쌓으면 높이가 100㎞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들 데이터를 책으로 엮으면 지구와 태양을 12번 왕복할 수 있는 규모라고 덧붙였다. 또 이를 저장하려면 최대 저장 용량의 최신 MP3플레이어 제품 ‘아이팟’ 기준으로 20억개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IDC는 이런 추세라면 2010년께 천문학적 수치로 일컬어지는 ‘1제타바이트(ZB)’에 근접한 ‘988EB’까지 데이터가 폭증할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 2003년에 비해 8배 성장=이번 조사 결과는 폭증하는 디지털 데이터 현황을 그대로 보여줘 주목된다. 이에 앞서 버클리대학이 조사한 보고서에서는 2003년 당시 디지털 데이터 규모를 5EB로 추산했다. 5EB는 쉽게 이야기해 미국 의회 도서관 3만7000개에 이르는 용량이다.

 IDC 측은 2003년과 비교해 조사 결과가 차이나는 것은 당시에는 복제 데이터를 제외한 원본 데이터만을 계산했기 때문이라며 원본만을 고려해도 40EB로 2003년에 비교해 3년 만에 8배 이상 성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조사를 담당한 IDC 존 가츠 연구원은 “인터넷·UCC 등으로 디지털 콘텐츠가 범람하는데다 기업에서 대부분의 문서를 디지털로 보관하는 등 정보기술의 발달로 데이터의 디지털화가 가속화하기 때문”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저장 공간은 “뜨거운 감자”=데이터가 폭증하면서 이를 보관하고 접근할 수 있는 저장공간도 ‘뜨거운 감자’로 떠오를 전망이다. 보고서는 아직은 저장시스템 증가 속도가 데이터 속도를 앞서고 있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점차 격차가 벌어지면서 수많은 데이터를 보관할 수 있는 시스템의 필요성이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로 지난 한 해 161EB 데이터가 만들어진 데 비해 전 세계 메모리와 스토리지 시스템은 총 185EB 수준이었다. 하지만 2010년께는 저장공간은 601EB 수준인 데 비해 데이터 규모는 988EB까지 치솟는다고 예측했다. IDC 측은 “디지털 데이터의 특성상 이용하고 사라지는 데이터가 많아 아직은 여유가 있지만 점차 저장공간 문제가 산업계의 이슈로 떠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강병준기자@전자신문, bjkang@

◆용어 설명-기가(Gb)에서 제타(ZB)까지

모두 저장 용량을 나타내는 말이다.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가 바이트(Byte)다. 이어 킬로(kB), 메가(MB), 기가(Gb), 테라(TB), 페타(PB), 엑사(EB), 제타(ZB), 요타(YB) 순으로 단위가 커진다. 메가가 1000이 되면 기가가 되고 기가 다음 단위는 10조를 나타내는 테라, 테라 위에는 1000조를 나타내는 페타(Peta), 100경을 나타내는 엑사(Exa), 10해를 나타내는 제타(Zetta), 자를 나타내는 요타(Yotta) 식이다. 참고로 1000Gb를 의미하는 1테라는 MP3파일 25만개, SD급 영화 500편, HD급 영화 125편을 저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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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 속 귀신'이 현실화될 날도 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 안에 쓸만한 정보가 얼마나 있는지 생각해보자면, 보다 가까운 것은 삭막한 정보체들의 건축물이 달까지 이르게 구축된 [블레임] 쪽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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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ladin.co.kr/blog/mypaper/1073299

 

솔직히 난 도올 김용옥의 학자적 수준이나, 그 사고의 깊이 같은 것은 잘 모른다. 제대로 들어본 적이나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냥 몇 번 TV에 나와서 강의하는 걸 봤는데 발음은 부정확한데다 때때로 소리를 지르고 팔을 허우적허우적거리면서도 뭔가 이슈가 될만한 것들은 쿡쿡 잡아내는 게 연예인하고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래도 컴플렉스의 결과라곤 해도 여기저기서 학위는 많이 땄으니, 암튼 뭐 대단한 말쌈을 하시는가 싶었다.

사실 요한복음 강해에 대한 그의 이번 작업에 눈꼽만치라도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말마따나 현 기독교 교리의 핵심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거니와, 그에 따라 교회 목사들이 자신들의 신학적 깊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자주 인용하는 것이 그 요한복음이었기에 그에 대해서 도올은 어떤 굉장한 해석을 보여줄려나, 하는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내가 돈이 없어서, 뭐 돈이 있다고 해도 굳이 신청할 것 같진 않지만 암튼 언론에서 단편적으로 내보내는 그 요한복음 강의의 내용이란 것이 뭐 그리 색다르거나 처음 들어보는 것들은 아니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익숙하기까지 한 차원의 것들이라는 것이, 뭐 이런 거 가지고 그리 호들갑인가 싶었다.

호들갑. 그렇다. 도올의 내용이 그리 신선한 것은 없지만 어찌되었든 그의 강의가 지금 한국 기독교계를 도발시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아아, 솔직히 말하자면, 어처구니가 없다.

어렸을 적에 주일학교서 (강제로) 기독교 교리공부를 하고 뒤이어 가톨릭에 입문해서 세례명까지 받고선 그 뒤론 노라리가 된 나로선, 그냥 온전히 성서만 읽어도 지금의 교회 시스템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파악하기에 예수는 아나키스트였다. 그의 말들은 명백하게 권위와 허상과 인습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는 숭배할 시간에 실천하라고 말했고 가지고 있을 시간에 베풀라고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이븐 루슈드, 혹은 아베로에스라 불린 아랍철학자의 이성이 꾸란에게 경탄했던 이유와 통하는 바다. 철학의 복잡다단한 썰로는 풀 수 없는 것을 종교는 해낼 수 있었다. 예수는 하늘의 권위(라고 불리던 것)를 인간에게 내려주려고 했고 그 때문에 모욕 받은 이상주의자로 죽어갔으며, 종내는 부활했다. 안타깝게도 좀 뒤틀린 모습으로. 그렇게 기적이 있음에 십자 모양 신화는 성립됐으며 그 환상성을 바탕으로 지탱되는 권위는 위태위태한 기둥 위에 서서 끊임없는 반론자들을 만들어내게 됐다(고고학자, 해석학자, 원본주의자, 물개 JMS 등등).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가톨릭의 의례들, 기독교의 규칙들은 그들이 쓰는 성서에 적힌 예수의 행적과 말 하나하나에 모조리 반하는 것들 뿐이다. 사도 바울 이후로 교리는 거의 식민주의적인 것으로 바뀌어갔다. 그것들은 예수의 말을 핑계 삼아 인간이 만들어낸 권력과의 타협점에서 비롯된 결과들이다. 신이 되고자 한다면 스스로가 신처럼 굴어야 하건만, 똘스또이의 한탄처럼 그의 말과 상징적인 죽음에도 불구하고 기적과 권력의 힘을 빌어서만이 종교가 성립되는 세상이 지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논의는 2000년 넘게 계속 반복되고 있다. 솔직히 나는 요즘 우리나라 교계에서 이뤄지는 논의라는 것이 중세철학의 가장 편협한 시기에 이뤄지던 아집들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세상에, 그것마저도 벌써 1500년도 더 된 이야기다.

사실 도올의 강의에 따른 일련의 시끌벅적함이란 것이, 일반인에게까진 그리 와닿는다는 느낌은 아니다. 이 '문제적 강의'로 인해 벌어지는 이전투구들은 어찌 보면 교회 상층부와 도올의 쇼맨쉽과의 갈등, 더 나아가자면 사학-종교계로 확인되는 2007년 대선 헤게모니의 핵심에 선 세력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기이한 투쟁으로 비추인다. 여기서 기이하다는 것은 그 폼새가 꽤 웃기다는 것으로,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던 날 일군의 개신교인들이 자신들의 교세를 이끌고 가서 권력에 대한 상징적인 종교적 투항을 선언했던 그때만치로, (자칭) 상위 프로테스탄트들의 지식-신학에 대한 우회한 투항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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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X 2007-03-06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략 미녀 연예인의 프리 허그와 오덕후의 프리 허그의 차이? (…)

hallonin 2007-03-06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 어느 쪽이 미녀인 겁니까-_-
 



뒷북 치듯 플레이하게 됐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게임입니다.

뭐 워낙 찬사가 널렸으니 반복하는 건 제쳐두고, 이게 한 때 노블류 게임의 새로운 영역을 열었다고 평가를 받은 이유를 알겠더군요. 인터렉티브성이 아주 뛰어납니다. 매 편마다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각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문제제기를 통해 사건의 총체적인 양상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도록 플레이어에게 재촉하더군요. 단순한 방식이지만 플레이어의 머리를 가만 놔두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흡입력이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거기에 더해 저주와 논리적인 살인이라는 소재들 사이에 미묘하게 위치된 점이나 한 고립된 마을에서 벌어지는 살인극이라는 전통적인 배경들을 봐서도 그렇고 여러 모로 확실히 신본격 추리소설을 잇는 변종이라고 할만 합니다.

그에 비해 만화쪽은 각 편의 에피소드를 분할하여 동시에 연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만, 생각해보면 [쓰르라미 울 적에]는 순차적인 이야기의 흐름에 따른 뇌내 화학효과가 상당한 효력을 발휘했던 작품인만큼, 그런 분할 동시 연재는 물론 미디어믹스 차원에선 정석이지만 게임의 기능성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코믹스판은 현재 학산에서 발매예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떤 편이 먼저 나올지는 잘 모르겠군요. 아마 와타나가시편부터 차례로 나오지 않을까 예상중입니다.

 



원래는 사운드노블이란 장르명을 갖고 있었지만, 사실 효과음의 쓰임 같은 것은 뛰어난 편이나 그것만으로 사운드노블이라고 할 순 없겠죠. 정말로 제대로 된 사운드노블이라면 맹인도 할 수 있는 게임이라고 불렸던, 새턴으로 나왔던 워프사의 [리얼사운드 - 바람의 리글렛] 정도는 되야 하지 않을까요. 그 증거로 플스2로 컨버전된 [쓰르라미 울 적에-축제]는 비주얼노블이라고 장르를 개칭했더군요. 플스2도 이런 게임들 나오는 거 보면 확실히 말년.... 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건 꽤 구매욕을 당기는 타이틀. 국전에서 한정판이 11만원이었다고....

 



작가이자 감독이자 캐릭터 디자이너로 원맨쇼를 펼쳐보인 용기사07은 소설 [괴담과 춤추자, 그리고 당신은 계단에서 춤춘다]가 월간 소년 시리우스에서 만화로 연재되기로 했더군요. 시리우스라면 잘하면 북박스에서 낼 가능성도 있겠음. 그러고보니 시리우스엔 시무라 다카코도 연재하고 있는데 그것도 좀.... 아, 이건 왠 딴소리. 암튼 그외에 다른 사람 책에다 괴상한 그림도 그려주고, 이것저것 텍스트 프로젝트가 잔뜩이라 장르소설 잘 쓰면 먹고 사는데 지장 없는 소비풀을 가진 나라에서 잘 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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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서 [데스노트]는 좀 이상한 만화였다. 처음 시작은 소위 택티컬한 두뇌게임으로 시작됐지만 뒤로 갈수록 만화는 캐릭터에 집중되는 망상대결로 흘러갔다. 그래서 중반 이후로 내용에 대한 논의는 거의 사라지고 주로 캐릭터 팬덤에서의 얘기들만이 열정적으로 오갔다. 매체상으론 소년만화였지만 내용 자체가 완전범죄 성립을 위해 상황에 따라서 사람을 어떻게 죽여야 할지 고민하는 내용인데다가 가끔씩 보여지는 코드들은 작가의 취향을 드러내는, 어둠의 성향을 꽤 띄고 있기도 했다(거북줄묶음, 고스스타일들 등등). 그래서 애니메이션판은 심야에 방송중.

뭐랄까, 설익은 사과를 씹는 기분이랄까. 워, 이건 정말 멋진 걸, 하고 말하고 싶어도 항상 얼마간은 부족했다. 그중 가장 크게 작용했던 것은 캐릭터들의 정서적 풍부함이 컷을 가득 메우는 활자들과 사건 전개 이외의 씬에서는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대사와 상황에 근거한 인물들의 빈약한 드라마에 비례해서 사라져있다는 거였는데, 그것을 가까스로 살렸던 것이 오바타 다케시의 매력적인 작화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어찌되었든 근래에 나온 가장 파괴력 있었던 컨텐츠긴 했지만, 소년 점프가 아니라 애프터눈에 연재됐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게다. 뭐 그랬다면 또 이만큼이나 돈을 벌 수 있었을진 모르겠지만.

 

 

 

결론은 2기 오프닝이 맘에 들어서 올리려고 했던 것. 때깔 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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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X 2007-03-03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작가가 야오이나 H망가를 그려줬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이 엄청난 그림체로 그려낸다면 오구레히토 정도는 눈에도 안 들어올 겁니다!! (하악하악) 스토리가 무슨 필요 있겠습니까. 섹스노트 같은 걸로 그냥 고고씽

hallonin 2007-03-03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에토 아야가 AV계 데뷔하는 것과 비슷한 난이도겠군요.... 뭐 오바타급은 아니라고 해도, 에로만화쪽으로 가면 정말 굉장히 잘 그리는 사람들이 꽤 되죠. 한 번 그 넓디넓은 세계에 빠져보심도 좋을 듯.

그리고 야오이 전문 레이블 하나 만들어보는 게 어떻습니까? 야오이팬들의 충성도란 게 장난이 아니니까.... 그래도 수익구조는 좀 불안하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