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들어갔던 것이 국민학교 5학년 때, 아버지의 손에 끌려서였다. 워낙에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으면서 요령껏 오락실을 드나들던 나의 고약한 버릇을 없애려고, 그런 나의 음침한 문화를 양지로 이끌어내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리라.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 날, 당신과 함께 목욕탕을 가는 길에 오락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영재 오락실은 목욕탕에서 10초도 안 걸리는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얘기였다. 그 때는 스트리트 파이터2의 시대였고 나는 그 이후로 10여년을 훌쩍 넘게 될 2D 대전 격투 게임과 영재 오락실과의 인연을 그렇게 맺게 되었다.
처음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나더러 게임을 해보라고 독촉(!)했다. 나는 아버지의 그런 태도가 대체 어디서 기원하는 것인지도 몰랐거니와 결정적으론 그 게임을 거의 할 줄을 몰랐기 때문에 동전을 넣고 캐릭터를 고르고 나서도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격투 게임에서 가장 기본적인 커맨드인 승룡권 커맨드를 익힌 게 중학교에 올라가서였으니 지금도 그렇지만 어지간히 소질이 없는 녀석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내게 가르치는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한창 삽질을 하고 있는 내 옆에서 어느 틈엔가 와서는 앉아서 이렇게, 저렇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참견을 놓고 있던 나보다 좀 나이와 연륜을 먹은 꼬마에게 한 번, 시험 삼아서 너가 하는 걸 보여달라고 했다. 그 꼬마는 당연하다는 듯 무척, 능수능란하게 게임을 해치웠고, 나는 옆에서 부러움과 질투심이 뒤섞인 감정으로 멍하니 바라보다가 목욕탕엘 가는 수밖에 없었다. 첫 날의 얘기였다.
아버지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몰래 오락실을 드나드는 내 버릇은 고쳐질 줄을 몰랐고 일요일 날 영재 오락실을 가는 것외에도 나는 동네의 오락실이란 오락실은 거의 다 훑고 다녔다. 그러니, 나는 다른 오락실을 다니느라 영재 오락실의 단골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오락실은 그 때 우리가 살던 집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리품을 팔아 그곳을 가야 할 필요를 느낄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 중간 중간의 기억들은 무척 모호하고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다. 가끔씩 들리곤 하는 정도의 간격이 이루어지는 동안 가게 주인은 할아버지에서 20대의 젊은 주인으로 바뀌었고 처음 들어갔을 때, 그 나이였을 때도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던 형편 없는 인테리어도 어느 날인가는 세련되게-그 환경에 거기서 거기라곤 하지만-바뀌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영재 오락실이 나에게 중요하게 다가온 것은 고등학교에 올라가서였다. 이것저것, 시험이니 뭐니 하는 핑계로 책을 읽으러 도서관을 가는 일이 잦아진 나는 그 돌아오는 길에 영재 오락실에서 킹 오브 파이터즈를 하는 것을 청춘의 낙으로 삼게 되었다. 거의 매일마다 도서관을 가는 나날이었으니, 거의 매일마다 영재 오락실을 들렸다는 뜻이었다. 여전하게 발전의 가능성을 보이지 않는 나의 격투 게임에 대한 능력은 그 장르에 대한 애정에 반비례하여 나를 패배시킨 상대에 대한 좌절감과 분노를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쩔 것이냐? 이것은 말그대로, 재능 차원의 문제였다. 나는 정말 더럽게 게임을 못하는 녀석이었다.
시대는 피시방의 시대였다. 초기엔 컴퓨터 옆에 플레이 스테이션과 새턴까지 갖다놓는 애매모호함을 선보이면서 삐그덕하게 출발한 피시방은 어느 사이엔가 사회 문화에 있어서의 한 축으로 굳혀져 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곳저곳 우후죽순으로 피시방들이 출현하기 시작하면서 종래 있던 전근대식 오락실들은 하나둘 없어져 가기 시작했다. 오락실 주인들은 정리를 하거나 피시방으로 전업을 하고 있었다. 기존 오락실로는 수익을 내기 어렵다는 것이 공통된 생각들이었다.
그런데 영재 오락실은, 그 전근대적이고 구세대적인 오락실의 형태 그대로를, 요금 인상조차 단행하지 않으면서 이어나갔다. 더군다나 주인은, 그 당시에도 이미 슬슬, 한물 가고 있다는 2D 대전 격투 게임들을 고집스럽게 들여놓고 있었다. 킹 오브 파이터즈는 끈질기게 자리의 한 칸을 차지하고 있었고, 스트리트 파어터3는 세컨드 임팩트까지, 월화의 검사는 2까지. 유일하게 용호의 권 외전을 갖다놓은 오락실이었고 월드 히어로즈가 마지막 버전까지 그 모습을 내밀었었다. 뱀파이어 세이버가 가장 오랫동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국산 제작 아케이드용 대전격투 게임 1호였던 왕중왕과 기억이 잘 안 나는 괴이한 국산 대전 격투 게임도 있었다. 그 일련의 과정은 경이였고 나는 주인이 존경스러워졌다. 아랑전설 4, 가로우가 설치되는 그 모습은 그것은 수익을 최대 과제로 생각하는 장사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미친 짓이었지만 나에겐 천사가 강림하는 장면이었다.
주인은 센스가 없는 건지 돈이 없는 건지 남들이 리듬 게임으로 장사를 다 해먹었을 무렵에야 펌프를 그 안에 들여놓았다. 하긴, 워낙 좁아서 마땅히 둘 데를 찾는 것도 고역이었으리라. 그런데, 펌프를 치우고 들어온 게 이지 투 디제이라는 건, 역시 그 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반증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지 투 디제이는 마지막 버전까지 갖다놓는 걸 보자면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무모함이라는 것에서나, 취향이라는 것에 있어서나....
시간은 흐르고 나는 내가 겪어야했던 가장 힘든 시간을 그 오락실의 존재와 함께 지내왔다. 언젠가 없어진다는 생각은, 가끔씩 할 수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시간은 또 한 시기를 거쳐와서 모두가 돈을 벌 수 있다고 외쳐대던 피시방도 하나둘씩 몰락하고 이제는 강한 소스와 가맹점 유통방식을 지닌 기업화, 상표화된 피시방이 아니면 살아날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그 80년대, 90년대 초반의 음침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며 어둠이 공간의 반을 가리고 있던 오락실은 거의 없어졌다. 이제 오락실이라고 하는 데를 발견하려면 테크노 마트를 가거나 길가에 불투명 유리창에 붙여진 경고문고로 대변되는 성인 오락실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뮤즈먼트 파크외의 공간에선 가상 경마와 전자 빠찡꼬, 선물뽑기 기계가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서 나는 군대를 가게 되었다.
영재 오락실은 휴가를 나올 때마다 한 번씩 들렀다. 그럴 때마다 그 오래 묵은 오락실은 기껏해야 포스터가 몇 장 더 붙었을뿐인, 거의 꾸며지질 않은 제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 참, 가격은 십여 년 전에 내가 들어왔을 때하고 같은 백 원 동전 하나였다. 세상에, 그 때까지 '영재' 오락실이라니. 그 이름이 바뀐다는 건 내가 군생활을 2년만 하고 조기 제대한다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해 보였다. 영재 오락실이 그 자리를 버티고 있는 동안, 동네에 있는 모든 오락실들은 제 짐들을 꾸리고 있었다. 사실 그 대엔 내가 아는 오락실이란 것도 영재 오락실외엔 거의 없는 상태였다. 스쳐 지나가 듯, 오락실이 있었던 자리가 지금은 학원으로, 술집으로, 피시방으로, 채소 가게로 바뀌어 있는 걸 볼 수가 있었던 것뿐.
제대를 하고난 뒤, 심심찮게 오락실을 찾았다. 변한 것이 없는 그 모습. 심지어 2년여 전까지 나를 악받치게 만들었던 그 멤버들까지도 조금씩 얼굴의 선이 굵어진 것뿐 바뀌지 않은 모습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바뀐 것은 가격이었다. 드디어 주인은 킹 오브 파이터즈 2002의 1회 플레이 가격을 200원으로 100% 인상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시간은 2003년 1월 11일 토요일. 일주일 전, 주인은 킹 오브 파이터즈 2002를 하고 있던 나에게 오락실이 이제 간판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담담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만은.
2003년 1월 11일 토요일 저녁 8시, 나는 오락실엘 들어갔고 주머니에서 500원짜리를 꺼내는 동안 동전 교환기 앞에 붙여진 인쇄된 종이를 보게 되었다.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 종이엔 다음과 같이 써있었다 ; 영재 오락실 오늘까지 영업합니다.
오락실 안은 텅 비어있었다. 나는 여느때처럼 KOF2002에 동전 두 개를 넣고 게임을 시작했다. 그래 게임을 시작했다....
이윽고 안엔 예전부터 나에게 재능에의 문제까지 고려하게 만들었던 예의 그 멤버들이 들어왔고 각자들 게임을 시작했다. 이지 투 디제이가 돌아가고 나에게 난입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물론 그 사람은 중학교 시절부터 나와 안면이 있는 사람으로, 여전히 나에게 절망감을 안겨주는 실력을 갖고 있었다. 아니, 그건 절망감이 아니었다. 이제 그것은 허탈함이었다. 나는 동전을 넣어서 계속 이었다. 가끔씩 이기기도 했지만 스코어는 내쪽이 형편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의 분노도 일지 않았다. 어이 없는 패배가 계속되고 결국 포기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지 투 디제이 서드 믹스가 돌아가는 걸 보기로 했다. 허어, 지누가 리믹스한 곡이 있네.... 이소은이 보컬인 것도 있고.... 음악이야 뭐 신나는구만....
이지 투 디제이를 하고 있던 두 사람 중 한 명은 일찍이 대전 격투 게임의 고수의 경지에 올랐던 사람이었다. 그는 동전을 넣고 계속 플레이를 시도하고 있었다. 음악은 계속 나온다. 곧, 그는 200억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신경증적이고 무지막지한 테크닉이 요구되는 음악을 계속, 선택해서 플레이한다. 오락실 안은 소음에 가까운 드럼 엔 베이스의 비트들로 가득 찬다. 수군거림이 들려온다. 재정난이었다는, 일찍부터 닫았어야 한다는, 주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는.... 조금 어지러워진다. 밖으로 나와 집을 간다. 가기로 한다.
인간은 짜증나는 동물이다. 언제나,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야 후회할 줄을 안다. 그리고 계속 반복한다. 나는 단번에 자신에 대한 환멸과 지독한 아쉬움에 사로잡혀 버렸다. 젠장, 울고 싶을 정도였다. 이건. 이것은, 그 때가 되어 깨달을 수 있었던 건, 내가 가져왔던 한 부분이 끝나간다는 거였다. 나는 내 나이가 스물 네 살이란 걸 이제서야 깨달아 버린 것 같다, 빌어먹을. 나는 그 유치하게 반짝이던 간판이 떨어져 나간 부분을, 오락기들이 끄집어내어져 먼지 쌓인 휑한 꼴을 드러낼 오락실이었던 공간의 벽과 바닥을 상상한다. 그리고, 더이상 상상하기 싫어진다. 모욕이라면 우스운 일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렇게 믿고 싶다. 저 '영재' 오락실의 간판이 내려간다는 건, 끈질기게 버티어왔지만 이젠 흔적으로 남게 된 어떤 '인기 없는' 문화의 소멸이 드디어, 혹은 너무 잔인하다 싶을 만큼 분명히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부정하고 싶든 아니든, 무감각의 댓가로 지금껏 알 수 없었던 내 짝사랑의 상대는 이제야 영면의 시간에 들어가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캔맥주를 세 개 샀다. 그리고 이 글은 마땅히 알콜에 젖어가면서 쓰여진 글이다.
주인의 얼굴은 중학교 1학년 때의 어느 날, 도서관을 가던 길에 들려서 동전을 바꾸기 위해(그 때는 동전교환기가 없었다) 카운터를 빙자한 오락실 한쪽 구석 골방에 들어가 박혀 있던 그를 처음으로 알아봤을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었다. 어렸을 때 그는 내가 순전히 내 능력 탓으로 대전에서 져버려서는 화가 나서 죄 없는 스틱을 탁- 탁- 하고 치고 성질 더러운 발로 무고한 오락기를 두들길 때마다 소리를 질렀었다. 하지만 내가 돈이 떨어져서 아쉬운 마음으로 그저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자신하고 한 판 붙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내 몫의 동전을 넣어주었다. 그는 오락실을 운영하는 동안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다. 기판을 사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날이면 부인 되는 사람은 만삭의 몸을 하고 종종 오락실에 나왔었다. 그리고 얼마 뒤엔 귀여운 꼬마가 서툴게 걸으면서 오락실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것은 분명, 얼마 뒤라고 할 정도로 짧은 시간은 아니었겠지만 나에겐 마치 만화책의 어느 한 페이지에 그려져있는, 컷에서 다음 컷으로 이어지는 몽타주의 한 부분 정도로만 느껴진다. 십 이 년 동안, 그 좁고 어둡고 퀴퀴한 공간 안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온갖 만상들이 스치듯 지나가면서, 부디, 그들에게 축복을.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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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재오락실 주인장을 몇년만에 다시 만났다. 오락실에서-_- 로얄 더비에 잠식된 강동구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정통파 오락실인 둔촌동 사이버랜드에서, 그는 철권5를 하고 있었다. 크리스티, 그의 주력 캐릭터는 여전히 카포에라의 달인이었다.
먼저 나를 알아본 것은 그쪽이었다. 그의 얼굴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하남시에서 피시방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하고 가끔씩 철권을 하기 위해 그곳을 들린다고 얘기해줬다. 그는 이미 그곳에 터를 잡은 듯, 사방에서 고딩들이 알아보고 인사하고 게임을 하면서 참견하고 떠들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러고보니 저 양반, 예전에 아랑전설4 기판 점검차 여기에 왔던 적이 있었지....
600원 받았다. 게임하라고-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