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일간 차례차례 예정대로 이루어지는 다섯 개의 살인사건이란 컨셉이 전해주는 정해진 숙명에 대한 드라마는 익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든지 [장미의 이름]에서부터 봐왔던 흔한 컨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전례들이 보여줬던 모든 사건의 배경이 통례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혈의 누] 또한 죄와 업보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예정된 파국의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런 점에서 [혈의 누]가 자신보다 먼저 나온 비슷한 형제들에게 빚지고 있는 죄와 복수, 속죄의 알레고리는 김대승 감독의 전작인 [번지점프를 하다]가 환생을 다룬 순정만화들의 세계에 빚지고 있던 것처럼 노골적이다. 따라서 [혈의 누]는 조선조 연쇄살인극이라고 하는 독특한 소재에도 불구하고 그 익숙함에 의해 이야기의 얼개가 가지고 있는 스릴러적 긴장감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그러나 내용을 뻔히 안다고 오페라를 즐기는 재미가 감소하진 않는 것처럼, [혈의 누]는 그리 부실한 영화가 아니다. 죄의 알레고리에 대하여 관련된 얘기를 한다발은 쏟아낼 수 있는 구성이지만 동시에 상당 부분 낯익은 기억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야기를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만들어보이는 것은 조선조 연쇄살인극이란 낯선 세계에의 시도 때문이고 이 부분을 간파한 듯, 감독의 연출은 비극의 정해진 파국, 절정의 극대화를 위해 조선시대의 가상의 섬의 풍경들에 대한 밀도높은 구현에 집중된다. 촬영과 미술, 세트디자인이나 고증 측면에서 영화는 있었을 듯 없었을 듯 싶은 시간과 공간을 세밀하게 재현해내며 그 성과는 대단히 훌륭하다. 물론 상당히 강도 높은 하드고어씬들까지 포함해서.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원죄에 가까운 형태로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업을 해결해야 하는 인물들의 비극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며 보다 단단하게 영화를 만드는데에 충실한 기여를 한다.
개인적으론 워낙 이런 파국류를 좋아하기 때문에.... 남들은 다 별로라던 차승원의 연기도 괜찮았고. 하지만 잦은 플래쉬백은 반전 없는 스릴러의 긴장감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효과였겠지만 워낙 자주 튀어나오다보니 보는 사람 눈을 복잡하게 꼬아버리는 효과도 있었다. 그외엔 상당히 만족한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