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재동화백이 양영순을 가리켜 우주에서 떨어진 것 같다고 표현했을 때, 난 동의할 수 없었다. 당시 이미 수많은 프랑스서원산 에로만화들의 상상력에 찌들어있던 나로선 그때 한국현실에서 섹스를 소재로 만화를 그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간과했던 것이다. 그런 탓에 [누들누드]에서 상상력과 현실 간의 절충적 절묘함이 아닌 답답함만을 봤던 난 이후 그가 [철견무적]의 실패 이후 스포츠신문과 영지의 단막극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갈 때, 그리고 그 안에서 장르를 통해 뽑아낼 수 있는 멋진 에피소드들을 만들어낼 때도, 이야~ 센스있는 만화가구나.... 하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그것은 박재동화백이 표현했던 그 평가와는 아직 거리가 먼 영역에서의 인식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1001]은, 그가 괴물이었음을 알려주는 만화다. 난 드디어 이 작가가 우주에서 떨어진 작가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교묘하게 센티멘탈리즘을 자극하는 스토리텔링이 가지는 고전적 풍모의 탁월함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양영순은 이 작품에서 강도하의 [위대한 캣츠비]와 더불어 장편 웹툰의 모범답안을 제시했다.
전부터 지적됐던 바이지만 웹툰의 구조에서 기존의 만화형식들에서 보여주는 배경과 인물에 대한 디테일함이 그 효과를 쉬이 드러내긴 태생적으로 힘들다. 그렇지만 [1001]은 되려 그런 단점을 장점으로 밀어부쳤다. 웹문서의 스크롤바식 서사구조를 세로식 그림으로 풀어낸 [1001]의 형식에서 연출의 주안은 기존의 만화들이 보여줬던 세세한 디테일함이 거세된 자리에 단막극을 통해 단련된 양영순의 만화 스타일이 그 빈자리에 들어가 채워진 결과로 드러나고 있다.
기실 스포츠신문에서 이어진 웹툰의 단막극들이 그리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마치 [1001]속 세라자드처럼, 매일매일 변덕스러운 네티즌들의 순간적 감수성을 자극해야 먹고 살 연재가 떨어지지 않는 작가들의 활로개척의 결과라고 봐야할 것이다. 따라서 웹툰의 작화는 필연적으로 작중의 사건과 상황에 대한 집중적이며, 명료한 시선을 보장해야 한다. 그리는 것만큼이나 생략의 묘미 또한 고려해야 하는 그런 단막극의 구조 속에서 필요한 것에 대한 단순하고도 확실한 선택법에서 이 낯선 세로서사구조의 인물들이 생명을 얻게될 방법이 발견됐다. 방법론적으로 볼 때, [1001]에서 보는 이는 웹툰단막극의 이해조건을 충실하게 지켜주는 구성으로 인해 독법에 있어서도 같은 독법을 보장받게된다. 그것은 이 이야기들이 가지는 보편적 감수성과 더불어 단막극 특유의 강조법으로 확장된 인물들의 표정과 컷구성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양영순에 의해 [1001]이 짧은 시간동안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박혀오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실제로 [1001]에서 단순하게 처리된 배경이나 컷구성의 명료함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는 지루하거나 질릴 겨를이 없다. 느껴지는 건 오직 만화 속 인물들의 감정의 흐름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일체감이다.
재밌는 것은 이것이 바로 이제까지 양영순이 가졌던 한계였던 점이란 사실이다. 그가 영점프에 연재했던 [철견무적]은 [누들누드]의 단막극 형식에 너무 깊이 들어가버린 작가가 보여준 한계였다. 장편의 호흡을 끌어가기에 각 컷들은 너무 빈한했고 스토리는 조급증을 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1001]에서 양영순은 웹툰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컷구성의 묘미를 바탕으로 하여 빈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작품을 단막극적 연출을 통한 인물의 감정과 사건상황의 확장들로 채우고 액자식 에피소드의 나열을 통해 작품의 긴장감을 꾸준히 유지하게 만들었다. 양영순은 단막극과 장편만화의 결합을 웹툰이라는 도구 속에서 성공적으로 완성시키고 형식을 창조해냈다. 이것은 단순히 걸출한 만화의 탄생이 아니라 장르의 재구성에 가까운 결과다.
그가 차기작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은 일전에, 폭력의 극한을 그려보이겠다고 했었지만 실패했던 [철견무적]의 재창작. 이미 결혼까지 해버린 터라 세계관이 많이 바뀐 듯한 그(관련 코멘트 : “그때는 폭력 장면이 많았는데 이제는 ‘근육질 남자들의 사랑’을 보여주고 싶습니다.”)가 어떤 세계를 보여주게 될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