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가끔씩 박찬욱이 자주 스스로의 상업적 역할에 대한 자각을 얘기한다는 걸 기억한다. 한국에서, 영화판에서 먹고 사는 사람으로서 그런 태도는 당연한 것이며 도덕적으론 훌륭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자세다. 그리고 그런 기준점은 JSA 이후 박찬욱 영화에서 꾸준하게 영화의 연출준거점으로도 작용해왔음이 틀림없다. 그의 영화가 보여주는 그리스비극적 내러티브들은 하도 많이 언급되서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거니와 그와 관련해서 부연하자면 그의 이야기가 호응을 얻는 것은 외디푸스왕이 그리스시절의 인기있는 연극대본이었으며 아직도 읽히고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런 입장이 워낙 꾸준한 탓에 대중들이 복수는 외면하고 금자씨에겐 열광적인 성원을 보내는 것을 대중성향의 부조리함과 장사의 90%는 운이다 라는 통설을 입증시켜주는데 좋은 예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금자씨는 [올드보이]의 연장으로 여겨질 정도로 화려한 세트에 대한 집중과 잘 짜여진 촬영, 프러덕션 디자인과 같은 외적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미니멀리즘과 보다 충실한 희랍비극을 선택했던 [복수는 나의 것]만큼의 임팩트가 없다. 비현실적인 색감, 2050년 즈음으로 추정되는 시점에서의 나레이션, 교훈극 등등의 요소들은 [친절한 금자씨]가 지향하는 세계가 처절한 그리스비극이라기 보다는 우울하고 잔혹한 동화의 세계라는 것을 알려준다. 스토리적으론 전작들이 보여줬던 마초적인 클라이막스로의 전력질주식 시나리오를 포기한 이 마지막 복수의 이야기는 후반부를 복수의 의미에 대한 긴 심리극으로 구성해놓는다.
복수에 대한 죄의식이 없기 때문에 흡사 일본만화와 같은 감수성을 보인다고 지적한 외국의 어떤 평자의 전작들에 대한 지적도 있었거니와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걸 알았음에도 가차없었던 송강호나 자신의 죄를 깨닫는 순간이 붕괴의 순간으로 준비되어있던 올드보이와는 달리 금자씨는 긴시간동안 마련된 극도의 죄의식과 고뇌 속에서 제대로 구원에 이르는데 실패한다. 그래서 영화 내내 예쁜 것만 찾는 금자씨의 태도나 고도로 세밀하게 구조된 화려한 배경과 촬영은 금자의 복수가 완성되는 순간부터 색을 잃고 흑백으로 변해간다(나는 이 영화를 디지털 버전으로 봤다). 백선생이 세상에 완전한 인간은 없다고 읊조리는 순간, 그 모든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복수에 미친 아이들의 가족이 아니라 인간말종 백선생이다. 그래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표정과 태도는 뒤바뀌고 오랫동안 백선생의 몸뚱이에 가해지는 폭력을 통해 관객은 혼란스럽게된다. 동시에 이 과정을 통해 영화에는 이전 복수극들에선 볼 수 없었던 애정과 인간적 고민이라는 요소가 붙게된다. 이런 성찰이 몇몇 외국평자들에게 영화가 성숙했다는 판단을 내리게되는 원인일 것이다. 인간적인 고뇌와 성찰이 장식처럼 달리게되면 보다 차원이 높은 것이라는 판단기준을 가진 이에겐 유효한 얘기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반복되어 온 성찰이 아닌가? 심지어 뤽베송의 [잔다르크]에서조차도.
전형성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자. 전작들이 계급에 대한 노골적인 은유들을 담고있었다면 금자씨에선 도전적 페미니즘에 대한 도식적 장치들을 언어영역 시험문제를 풀 때처럼 확인할 수 있다. 주인공 금자는 여성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복수를 실행하며 마초적 캐릭터의 표상이자 극내에서도 손짓만으로 섹스를 벌이는 최민식은 기록상 대다수인 '남자' 연쇄살인마다. 더군다나 그는 모성의 목적인 아이를 전문으로 골라 죽이는 인간이며 금자는 오로지 사생아로 낳은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13년을 썩게될 누명을 뒤집어쓴다. 만약 페미니즘 진영이 이 영화에 대해 비판할 수 있다면 딱딱 아구가 맞아떨어지는 이런 공식성 때문일 것이다. 풍성한 텍스트일지 뻔한 스노비즘일지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는 이런 구도는 이영애가 금자씨를 맡고 있다는 것 때문에 후자쪽에 좀 더 기울어진다. 그녀는 어머니를 맡아본 적이 없다. 그리고 어머니일 뻔한 적에도 그녀는 어머니였던 적이 없었다, [봄날은 간다]에선 자신보다 열살 연하인 남자를 후리고 차버리고 할 정도로 충분히 매혹적이고 자유로운 이혼녀이고 [선물]에선 죽음이 만들어내는 아우라에 잠긴 소녀적 아내였으며 [대장금]에서 왕은 그녀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그녀를 궁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은 살짝 언급되는 레즈비어니즘과 예쁜 것만 찾는 그녀의 태도에는 쉬이 공감하지만 딸에 대한 그녀의 집착에는 의아해 한다. 어쩌면 [친절한 금자씨]는 그녀가 문소리와 같은 영역에 들 수도 있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나리오는 단순히 사생아로 낳게된 딸 때문에 스스로 누명을 쓴 그녀를 보여주면서도 정작 딸에 대한 얘기는 털끝만치도 보여주지 않는 감옥에서의 세월과 아이만 골라서 죽이지만 유아에겐 관심이 없었는지 입양까지 되도록 놔둔 백선생의 위협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딸, 그런데다 말까지 안 통하는 딸을 보여줌으로써 상대적인 긴장감을 증발시켜버렸다. 이것이 금자라는 '여성'이 어쩌다보니 끌고다니게 된 딸이라는 존재에 대한 의도였다면 그 흐름의 당위성은 부분적으로는 수긍이 가능하나 딸을 그렇게 만든 금자의 사정, 그리고 딸이 금자에게 가지는 상징적 역할들과 이가 안 맞아서 충돌하며 영화를 근본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백선생이 보낸 두 해결사에 의해 딸이 협박당하는 와중에도 그것은 딸이 아니라 그저 소중한 물건처럼 느껴질 정도다. 예를 들면, 구원을 뚝딱 해결해주는 드래곤볼.
박찬욱과 정서경의 공동시나리오가 보여주는 또하나의 맹점인 금자씨의 도덕적인 방향으로의 태도변화는 아예 언급이 안되는 백사장의 의식의 당위성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박찬욱이 전작들에서의 여자들의 행동에 대한 부족함을 메꾸려했다고 말한 발상지점에서부터 지적될 수 있는 것이지만, 이전 복수극들에 대한 일종의 반대급부적 태도에서 나온 것 이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금자씨와 전작들은 카메오들의 대거 출연 같은 걸 생각하지 않더라도 뗄레야 뗄 수 없는 진짜 트릴로지적 성격을 가지게됐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의 마지막이 진부한 성찰로 드러났다는 것은 그의 마초적 전작들이 가진 영화적 쾌감의 탁월함에 비춰볼 때 외디푸스왕이 진보적으로 보이게 만들 정도다. 너무 많이 얘기된 잠언을 듣느니 뭉크나 베이컨의 미발표된 새로운 그림을 보길 원하는 사람이라면 닳아버릴 정도로 자주 이야기됐던 이 바로크식 답안지 앞에서 실망감을 드러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