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왔습니다. 앞서서 디시인사이드와의 인터뷰 때문에 한시간 넘어가서 8시 16분에 시작. 웬 디시인사이드와의 인터뷰? 라고 생각했는데 이 분이 한국의 대형웹은 꾸준히 검색한다는 수군거림이 어디선가 들려오더군요.

강연은 책 소개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거의 원론 수준이었습니다. 1995년 이후의 일본의 변화와 2001년을 전후로 하는 오타쿠 세대 교체, 그리고 인터넷 출현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판단 하에 책이 쓰여졌다는 얘기는 조금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실제로 이 날도 1995년에 있었던 오움진리교, 고베대지진, 에반게리온 방영이라는 사건들이 어떻게 1990년대에서부터 시작된 일본의 붕괴, 더 나아가 대서사의 붕괴를 보여주는가를 강조하더군요. 이후 90년대 후반이 그 붕괴의 서사들을 꾸준히 따르고 있음과 동시에 2000년대 벽두를 장식하게 될 캐릭터소비로서의 '모에'문화의 도래를 예고한다는 것도 제가 생각했던 게 그대로 재생되었던지라 일찌감치 이 양반 책을 구해볼 걸 하는 뒤늦은 억울함이 밀려오더군요-_-

저로선 이 지점에서 [카우보이 비밥]이 비록 그 명맥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런 서사의 붕괴에 대한 반작용의 증거로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만, 그자신도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2권이 서사의 불가능함 속에서 그 반동으로서의 서사는 어떻게 생존해나가는가에 대한 연구라고 밝히더군요. 아직 수정중이라 확정은 안됐지만 일본에선 올 여름에 발간될 예정인가 봅니다.

미소녀게임에 대한 이야기도 넘어갈 순 없었죠. 그 분야는 소위 '모에'의 흐름이 가장 응집되어 있는 분야니까요. 아즈마 히로키씨는 리프가 [시즈쿠]를 시작으로 만들어낸 비주얼노벨 시리즈를 미소녀게임 진화의 하나의 분기점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에바 이후의 그 영향을 짙게 수용함과 동시에 모에와의 공존을 이룩한 결과라고나 할까요. 그에 대한 최종진화상태를 나스 키노코가 참여한 타입문의 게임들로 보고  있더군요. [fate/stay night]의 발매 이후, 그러니까 2004년 이래로 미소녀 게임은 매너리즘에 빠져있다는 얘길 들려줬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미소녀게임을 특정한 커뮤니티 구성의 매개체로서 강점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였습니다. 일본 내에선 80년대 애니메이션 커뮤니티와 미소녀게임 커뮤니티가 다를 바가 없다는 반론도 나왔지만, 저로선 탁견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미소녀게임은 게토화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것은 그 노골적인 표현과 기호화된 요소들로 인해 그 분야의 지식-그게 모에적이든 뭐든 간에-을 가진 이에게 보다 강력한 특권의식을 불어 넣어주는 기능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서사의 붕괴가 그토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에 대해선 추가적인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일본만의 고유한 환경 때문이라는 견해였습니다. 하나는 2차창작의 전통. 거의 30여년 전부터 소위 동인문화로 대표되는 일본에서의 2차 창작은 너무 익숙해져서 이젠 사람들에게 더이상 작품의 서사가 '유일'하다고 생각지 않게 만들 수준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것이 현재 일본의 오타쿠들이 캐릭터에 집착하고 게임 플레이어와 같은 자유로운 상상(망상), 혹은 플레이의 기분을 느끼고 싶어하는 열망을 갖게 만드는 거겠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하나는, 바로 인터넷에서 '자기주장'의 의미가 죽어있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어떤 의견이나 사상 등이 있으면 그것은 유희의 소재(이것도 일종의 모에화라고 지칭했습니다만)로 쓰이거나, 혹은 그저 그렇게 있는 것만으로 여길 뿐 어떤 의지나 준동movement으로는 도저히 발전이 되지 않고 있다는 거죠.

강연은 이즈음에서 끝나고 10분 정도 쉰 다음 이후엔 문답이 이어졌습니다. 좀 취지가 빗나간 것도 있었고 촛점이 안 맞는 것도 있어서 대강 넘겼습니다만, 질문자가 워낙 많아서 저로선 강연중 생각나서 준비한 질문-[우주전함 야마토]에서부터 지적되던 오타쿠의 정치적 냉소주의와 이미지적 고착이 현재 이라크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는 것과 미국에서의 오타쿠적 양상의 대표격인 스타워즈(에피소드3)마저 정치적 의지를 드러내는 현실에서 일본에서의 정치적 오타쿠란 가능한 것인가-을 그저 고이 접어야했습니다.

흥미로웠던 문답중엔 근간의 오타쿠의 현재를 보여줄 추천작으론 어떤 게 있느냐는 것에 대해서 [쓰르라미 울 적에]를 꼽았다는 것과 일본내에서 소비되는 '모에적인 것'과 해외에서 더 인정 받는 산업적 의미에서의 '저패니메이션'이 구분이 이뤄지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저 '저패니메이션'이라고 불리는 것들로 [공각기동대]류를 선별해놓음으로써 분명한 단절지점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는데 그 저패니메이션이라는 범주가 앞으론 일본이란 지리 안에서 해석되야 할지, 아니면 크리에이터의 차이에서 해석되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이미 [공각기동대SAC] 같은 것을 만들 크리에이터는 중국이나 한국, 대만에도 있으니 프러덕션IG는 제작만 맡고 그들을 스텝으로 불러와서 일련의 '저패니메이션'들을 만들 수도 있다 이거죠. 저로선 그것이 흡사 시부야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momus만 봐도, 혹은 [지뢰진]에서의 담배가게 할머니의 대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시부야는 이미 일본이 아닌지도 모를 일이죠. 그렇다면 그와 같은 탈국적 저패니메이션의 등장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그리고 일본적이란 거란 무엇인가(이것은 아즈마 히로키씨가 오타쿠연구를 시작한 동기와도 관련되는 것입니다).... 는 앞으로 아즈마 히로키씨가 열심히 고민해주실 겁니다. 헐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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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최고의 문답은 가위바위보까지 해서 기회를 얻어낸 마지막 질문자의 질문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질문 : [시즈쿠] 이후 미소녀게임의 진화가 이뤄졌다고 하셨는데요, 우리나라에서 수입된 리프와 타입문 등등의 비주얼노벨 게임 유저들의 커뮤니티에선 자신들이 즐기는 게임이 포르노그라피가 아니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 키Key의 팬들은 그런 말 해도 될지도 모르겠는데, 리프나 타입문의 팬들은 그런 말할 자격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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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랄까 편집실수랄까. 222쪽의 주석 17의 사토 다쓰오 내용이 16의 사다모토 요시유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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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2006-03-23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어린이들(ㅡㅡㅋ 저도 즐겨보지만)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끈 케로로 중사 시리즈에서눈 아이들에게 오타쿠적 이미지를 매우 평범? 자연스레 당연한것으로 받아들이게끔 하던데.. 오타쿠적 신간은 케로로중사가 아닐까 ㅋ 음 저는 수준이 에바까지는 잘 이해 못하겠소라..비밥도 그냥 멋있네, 재미있다.. 라고 생각할정도라서 ㅋ

hallonin 2006-03-23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로로중사는 오타쿠적 요소와 소년만화 본래의 즐거움을 절묘하게 매치시키고 있다고나 할까요. 전 처음 봤을 때 머리카락이 빠지고 손톱을 박박 뜯으면서 그 폭풍 같은 큐티함을 보여주는 캐릭터 디자인 하나만으로도 대박을 칠 수밖에 없는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쟈 2006-04-08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즈마 아키라를 검색하다가 들르게 됐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hallonin 2006-04-10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야말로 전부터 로쟈님의 러시아이야기가 무척 도움이 되고 있는 중입니다. 아울러 매일마다 뿜어내시는 그 무지막지한 글생산량에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음, 그런데 히로키가 아니라 아키라라는 오타가... 흘.